
“누군가 우아하게 살던 곳으로 들어간다는 게, 당신의 영혼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모든 게 정돈된 곳으로 들어간다는 게 마뜩잖았습니다.”
아르헨티나 작가 훌리오 꼬르따사르의 단편소설 ‘빠리의 아가씨에게 보내는 편지’(‘드러누운 밤’, 박병규 옮김, 창비 펴냄)에서 화자는 남의 빈집에 들어가 살게 된다. 타인의 공간을 지배하는 세심한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찻잔 하나를 옮기는 것조차 그 집의 모든 관계, “사물과 사물의 관계, 개별 사물의 영혼과 집 전체 영혼의 관계, 멀리 있는 집주인과의 관계”를 바꿔놓기 때문이다. 주기적으로 토끼를 토하는 화자는 그 집에 온 뒤 주체할 수 없이 불어나는 토끼들을 어쩔 줄 모르는 채로, 집주인에게 편지를 남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번역가의 신경증으로 읽는다. 빈틈없는 세계의 침입자로서 원본 텍스트를 망칠 것이 분명하다는 의심 앞에 서 있는, 단어 하나를 고칠 때조차 작품의 영혼과 저자를 떠올리는 번역가의 불안 말이다. 아무리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해도 불쑥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와 머릿속 안팎을 휘젓고 다니는 토끼들을 마주하는, 번역가의 과제.
번역에 대해 생각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중남미 문학 번역가 이디스 그로스먼의 강연을 들을 때였다. 작업을 하지 않을 때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는 질문에 그는 종종 젊은이들이 모여 떠드는 곳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했다. 책을 읽는 척하며 앉아 말을 수집하는 노년의 번역가 모습을 상상하면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흰 고래를 떠올린다. 홍한별 번역가의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위고 펴냄)의 힘이다.
저자 홍한별은 번역을 말하기 위해 ‘모비딕’에서 시작한다. “흰 고래를 그리려고, 연필 선을 더해 흰 고래를 그리는 대신 흰 고래를 제외한 모든 것을 그렸”던 허먼 멜빌처럼, 비유를 통해 번역을 그리는 여정으로 독자를 이끈다. 책은 번역을 둘러싼 숱한 질문들―의역과 직역, 길들이기와 낯설게 하기, 기계 번역의 미래, 식민주의와 식인주의 등―을 풍부한 예시와 함께 정교하게 다룬다.
책 속에서 번역은 다양한 몸을 입고 벗으며 몇 번이고 변신한다. 인간은 바벨탑을 쌓아 신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서로 다른 언어를 쓰게 되는 소통 불능의 벌을 받게 되었다. 번역의 메타포가 되는 ‘탑’의 이미지는 책 전체에 걸쳐 이동한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번역에서 비롯하는 손실을 막으려고 원문의 몇 배가 넘는 주석의 ‘탑’을 쌓아올린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의 자리에 탑처럼 묻혀 있는 것은 바벨을 만들라 명령했던 니므롯으로, “번역가라는 직업을 만든 우리의 선조가 가장 깊은 지옥의 입구에 붙박여” 있다는 말에서는 웃음이 난다. 하지만 지옥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어쩌면 번역 이전의, ‘불변의 완전한 언어’라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오디세이’를 번역한 최초의 여성 번역가 에밀리 윌슨의 번역과 기존 번역의 차이를 설명한다. 여성주의적 관점을 가진, 동시대 소수자의 감수성에 민감한 번역가의 작업이 작품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편견을 넘어 원본의 틈새에 스며 있는 의미를 다시 발견하게 함을 보여준다. 베를 짜고 푸는 행위를 반복하며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는 페넬로페의 손을 묘사하는 단어는 직역하면 ‘두껍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전 번역가들은 ‘순종과 인내의 상징’인 페넬로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인지, 수식어를 생략하거나 ‘흔들림 없는’ 등으로 옮겼다. 윌슨은 ‘근육질의 단단한 손’이라 옮긴다. 오디세우스가 전쟁을 하며 학살한 대상을 ‘창녀’라고 덧씌워 영웅 서사를 정당화하려는 번역은 덜어내고, ‘하인’ ‘일꾼’으로 에두른 단어를 ‘노예’로 바꾼다.
번역가가 관계의 미묘한 역동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작은 차이는 켜켜이 쌓여 단어로 드러나지 않는 행간의 침묵까지도 다르게 표현된다. 번역은 번역가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의 시대문화적 상황에 영향을 받으며 원본에 또 다른 가능성과 끝나지 않는 삶을 준다는 것을 홍한별 작가는 생생하게 전한다.
최이슬기 번역가
*번역이라는 집요하고 내밀한 읽기. 번역가와 함께 책을 읽어갑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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