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에 함께 살았던 친구 H는 1년 내내 쓸 짐을 넣은 캐리어 하나―놀랍게도 그 안에는 침대시트와 액자까지 들어 있었다―를 들고 집에 도착했다. H는 휴대전화를 쓰지 않았고 집에서 쓸 거의 모든 가구를 거리에서 주워왔으며,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면 친구의 친구의 친구들까지 우리 집에 재워주길 원했다.
삶의 오만 것들 앞에서 주저하고 망설이는 나에게 대체 뭐가 그렇게 겁나냐고 그녀가 물었을 때, 나는 내가 가진 막연한 두려움을 처음으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환대를 흩뿌리고 다니는 동시에 뻔뻔한 부탁도 곧잘 하던 H는 그걸 ‘호의의 사슬’이라고 불렀다. 호의의 사슬은 그 자장에 있는 사람과 관계를 바꾸는 힘이 있었다.
추워지는 날씨에 홍콩의 무더운 여름을 상상하며 집어든 책,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오가와 사야카 지음, 지비원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에서 나는 호의의 사슬로 연결되는 세계를, 나의 좁은 세계를 부수는 이야기를 다시 만났다.
18년간 탄자니아의 상인들을 연구한 일본인 문화인류학자 오가와는 홍콩의 청킹맨션에 도착해 짐을 푼다. 오가와는 그곳에서 자타공인 ‘보스’라 불리는, “빅브러더이지만 덜된 인간” 카라마를 알게 되고 그를 통해 탄자니아인들의 삶을 연구한다.
저자는 카라마를 비롯한 여러 인물의 생활사를 구술하며, 그들의 ‘창업자’로서 장사 관행과 탄자니아인 홍콩조합의 독특한 운영 구조, 허술하기에 탁월한 공유경제 시스템에 대한 해석을 제공한다. 시간관념이 없어 약속을 지키는 법이 없고 사람들에게 늘 담배나 뜯어내며 노닥거리는 카라마를 의구심을 가지고 판단하던 저자는 다른 맥락 속에서 그를 이해하게 된다. 더불어 일과 놀이, 무심함, 낭비와 효율성을 바라보는 독자들의 시선 역시 서서히 변화한다.
주로 난민이나 망명자, 불법체류자, 성노동자 등 무슨 일이 생겨도 공식 경로를 의지해 헤쳐나가기 어려운 사람들로 이루어진 탄자니아인 홍콩조합은 갑자기 사망한 동포의 주검을 모국으로 운구해야 하는 사건을 계기로 결성됐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죽음 같은 일 앞에서 서로 돕는 것은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구성원의 유동성과 이질성을 생각해볼 때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들이 서로 돕는 구조와 논리”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따지지 않고 타자가 처한 상황 자체에만 응답해 각자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지원해주는 태도 덕분에 가능하다.
“누구나 ‘겸사겸사’에 편승한다는 태도를 표명하고 있기에 서로 돕는 행위는 도움받는 측에 과도한 부담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친절에 즉시 답례를 하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기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는 타자의 복잡한 사정을 누구도 속속들이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는 관점, 애초에 어떤 일을 개인의 노력이나 실천의 결과로 평가하지 않으며 “‘지금’의 상황에 한정하는 태도”로만 타자를 받아들이는 인간관에서 나온다.
손해 보지 않고 민폐 끼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고 선한 시민이 되는 길이라는 믿음, 지나간 카톡 대화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흔적을 통해 인간 됨됨이와 관계의 잘잘못을 명백히 가릴 수 있다는 강박, 안전함을 보장받으려면 더 많은 통제와 배제가 필요하다는 불안, 무언가를 주고받는 행위가 반드시 권력과 부채감을 동반한다는 회의를 가진 이들, 은혜 갚는 까치가 약속하는 세계 너머를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최이슬기 번역가
*‘번역가의 책장’은 이번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을 써주신 최이슬기님과 애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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