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 아르헨티나의 후덥지근한 여름, 후안과 여섯 살 아들 가스파르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날 짐을 챙긴다. 아르헨티나 북부를 향해 긴 자동차 여행을 떠나는 그들 주위에는 불안한 기운이 가득하다. 얼마 전 엄마 로사리오를 석연치 않은 사고로 잃고 아직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스파르는 아이답게 그 시간을 통과할 상황도 아니다. 아빠 후안은 친절하지 않고 가족 안엔 너무 많은 비밀이 있으며, 가스파르는 귀신을 보기 시작했고 ‘억압자들’은 도처에 도사린다.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소설 ‘우리 몫의 밤’은 불법 감금, 납치, 사라진 아이들에 대한 소문과 사나운 망자들이 유령처럼 떠도는 1980년대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의 음산한 풍광을 배경으로 시작해 독재 이전과 이후 수십년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그 곳엔 수세기 동안 어둠의 신을 섬기며 부와 권력을 축적해온 기사단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후안은 기사단이 어둠을 소환할 때 사용하는 영매 ‘메디움’이다. 아들이 자신의 운명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후안을 움직이는 단 하나의 목적이다. 설령 그러다 아들을 다치게 한다 해도 말이다. “너는 내 일부를 가졌어. 내 일부를 네게 남겨두었다. 저주받은 일부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더럽혀지지 않은 걸, 어둠이 아닌 걸 네게 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 우리 몫의 밤이야.” 독자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이야기에 홀려 숨 가쁘게 빨려 들어가다보면 ‘악마 숭배에 돌아버린 권력자들’이 자행하는 살육 의식만큼 폭력의 트라우마가 참혹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독재정권의 범죄는 기사단에게 매우 유용했다. 시체와 알리바이, 그리고 조종에 더없이 유용한 감정인 고통과 공포의 사슬을 공급해 주었다.” 19세기 초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해 “원주민을 학살하는 실력이 탁월했”던 기사단 가문은 약탈과 친교와 동맹을 넘나들며 쌓아 올린 올드머니로 20세기 말 초국적 자본주의를 통해 ‘국가 안의 국가’로 군림하며 영광을 누린다.
한편 이 소설에는 불경한 유머와 관능이 흐른다. 기사단은 ‘이중 사슬’이라 명명한 마법의 양성성을 믿으며 양성의 파트너를 권장한다. 기사단의 믿음 덕분에 우리는 병약하면서도 상처받은 짐승 같은, “마치 자연이 품은 위험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드러나는, 일몰의 순간이 드러내는 경이를 보는 듯”한 후안의 매력이(꼭 그래야만 했을까?)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그를 속절없이 원하도록 만들어(꼭 그래야만 했다) 섹스를 통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상황을 보며 낄낄 웃고 때론 숨죽이게 된다. 신비주의와 흑마술, 주술과 환상이 일상에 깊게 파고든 이들의 서사가 리얼리즘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악마와 손잡은 것처럼 보이는 권력의 속성에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생을 누리겠다는 기사단의 탐욕은 이해하기 어려워도, 국가와 제도가 적극적으로 가해의 주체가 된 상황에서 자식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이들이 민속 신앙과 무속에 기대고, 구천을 떠도는 망자들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이유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상으로부터 멀어져 잠시나마 낯선 세계로 떠나고 싶어 천 페이지가 넘는 아르헨티나 고딕호러 소설을 집어든 마음도 부질없이, 소설의 어둠은 종종 나의 현실을 소환했다.
손바닥에 ‘왕’(王) 자를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자가 무속에 의지하는 전직 군인과 양심과 본분을 저버린 흐리멍덩한 눈의 엘리트들과 손잡고 군부 쿠데타와 독재를 꿈꿨다는 기막힌 이야기. 영화 ‘파묘’의 무덤에서 나온 일본 귀신은 이들에 비하면 진정 ‘험한 것’ 축에도 들지 못하리라.
최이슬기 번역가
*번역이라는 집요하고 내밀한 읽기. 번역가와 함께 책을 읽어갑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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