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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폐지하면 좋지 아니한가

소피 루이스의 ‘가족을 폐지하라’…‘강요된 제도’로서 가족 파헤치고 보지 못한 세계 상상
등록 2025-05-15 18:20 수정 2025-05-18 16:57
영숙, 영수, 영철, 옥순, 순자 등 1950∼1960년대 유행했던 한국인의 이름을 이미지에 따라 부여받은 출연자들이 ‘이성애짝짓기’를 하는 연애예능 프로그램 ‘나는 솔로’의 한 장면. 에스비에스 플러스 제공

영숙, 영수, 영철, 옥순, 순자 등 1950∼1960년대 유행했던 한국인의 이름을 이미지에 따라 부여받은 출연자들이 ‘이성애짝짓기’를 하는 연애예능 프로그램 ‘나는 솔로’의 한 장면. 에스비에스 플러스 제공


나는 동료 한국인에 대한 인류학적 관심을 빙자해 ‘나는 솔로’를 시청한다. 영숙, 영수, 영철, 옥순, 순자…. 1950년대 유행했던 한국인의 이름을 달고—그들이 고른 것이 아니라 이미지에 따라 부여받은 이름이다— 며칠 동안 합숙하며 이성애 짝짓기를 위해 기상천외한 드라마를 연출하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나는 솔로’에서 원하는 상대를 묻는 말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대답이 있다. “온전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사람 면전에서 해맑은 얼굴로 저런 말을 하게 하는 정상성의 무시무시함이란. 가족은 모두에게 우연히 주어졌다는 것을 다들 알 만한데도, 나 하나만이라도 운이 나쁜 사람은 걸러야겠다는 몸부림일 것이다.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에는 결혼한 사람들이 선택한 가족의 어려움이 드러난다. 아이들은 고통받는다. 양육자도 고통받는다. 탈출구 없는 고통의 연쇄 앞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이런 사람들은 아이 낳지 마라.’ 양육자의 행동이 변하면 해결되는 문제일까? “그들에게 아기를 삶에서 가장 중요한 20여 년 동안 (아기 자신의 동의도 없이) 맡겨놓고, 아기가 자신의 육체적 생존, 법적인 존재 상태, 경제적 정체성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들고, 또 그들이 자기 인생을 노동에 바치는 이유가 되게끔 강제하는 시스템” 자체가 문제 아닌가? ‘가족을 폐지하라’(성원 옮김, 서해문집 펴냄)의 저자 소피 루이스의 진단이다.

소피 루이스는 ‘가족을 폐지하라’는 구호가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어떻게 자극하는지 이야기한다. 가족 폐지가 사람들을 헤어지게 하리라는 불안, 가족 구조 속에서 형성된 나의 자아를 침해할 것 같은 두려움, 그리고 원가족을 사랑해서 혹은 사랑할 수 없어서 자신이 선택할 가족에 대한 가능성을 놓을 수 없는 마음을 말한다. 가족은 부르주아 경제의 축소판으로서 공공의 역할이 사유화돼 실현되고 대부분 실패하는 문제적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이 지구에서 가장 많은 강간과 가장 많은 살인이 일어나는 장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족이 돌봄과 사랑의 안식처가 되리라는 기대 희망을 놓지 않는다. 저자는 “흑인, 아시아인, 선주민, 퀴어적인 노동계급 가족”의 가족폐지론을 따라가며, 가족폐지론의 다양한 역사와 가능성을 보여준다. 가족을 확장하여 혈연과 무관한, 퀴어적인, 대안을 꿈꾸는 것을 넘어서 가족이 있던 자리에 아무것도 놓지 말자고 제안한다. “가족 이후에 찾아올 아무것도 없음의 풍요”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자는 것이다.

소피 루이스는 가족을 해체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언어적 실천을 제안한다. 우리는 상호 돌봄과 의존, 유대감과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혈연관계의 언어를 빌려오거나 그런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가족같이’, 혹은 ‘혈육처럼’ 여긴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혈연관계의 중심성을 대체할 “동지적 관계”나 “공모자” 같은개념으로 “근족”(Kith)을 제안한다. 근족은 혈통이나 정체성보다는 존재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표현하는 모호함을 간직한 단어다.

번역할 때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남자는 반말, 여자는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하던 언어적 관습이 바뀐 것만으로도, 관계의 공기가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한 바 있다. 한국의 가족관계는 번역가의 큰 골칫거리다. 아주버님, 도련님, 형님, 제수씨, 동서, 올케…. 이것들을 다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호부호형을 허락받지 못했던 홍길동처럼, 우리에게는 ‘너, 당신’을 허락받지 못하는 관계가 많다. 배윤민정의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 닙니다’(푸른숲 펴냄)는 이러한 한국 가족의 호칭을 바꿔보자는 별 것 아닐수도 있는 요청이 얼마나 ‘평범한 사람 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급진적인 투쟁이 되었는지를 기록했다. 한국에서 ‘동갑내기’를 유난히 반가워하고 나이에 집착하는 것도 어쩌면 평등한 관계가 주는 기쁨 때문 아닐까. 언어 깊숙이 얼마나 위계가 깃들어 있는지를 실감하며, 언어를 바꾸는 것의 잠재력에 대해 생각해본다. ‘너라고 부를게’라는 노래 가사에는 로맨스를 넘어선 힘이 있다.

 

최이슬기 번역가

 

*번역이라는 집요하고 내밀한 읽기. 번역가와 함께 책을 읽어갑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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