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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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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봉지로 밑 닦게 시키자

부글부글
등록 2012-03-28 11:07 수정 2020-05-03 04:26
농심·삼양식품·오뚜기·한국야쿠르트 등 4개 라면업체가 일제히 라면가격을 담합해 올린 것으로 밝혀진 지난 3월22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이 라면을 고르고 있다.<한겨레> 신소영

농심·삼양식품·오뚜기·한국야쿠르트 등 4개 라면업체가 일제히 라면가격을 담합해 올린 것으로 밝혀진 지난 3월22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이 라면을 고르고 있다.<한겨레> 신소영

부글부글. 쓸 때마다 느끼지만, 칼럼 제목 좋아요. 그주에 독자의 분노를 부글부글 끓게 만드는 사람을 ‘조져보자’는 우아한 취지를 갖고 있어요. 취재 안 하고 써도 별로 티 안 나는 몇 안 되는 칼럼 중 하나예요. 독편위원들 ‘날로 먹냐’고 오해 마세요. 사실 힘들어요. 한살 한살 나이 먹는 섬 아저씨에게 특히 어려워요. 성격 착해서 힘드냐고요? 에이~.

‘신문의 꽃’이라는 1면의 민간인 사찰 기사를 보고도 무덤덤한 건 저만 그런 거 아니죠? 애초 민간인 사찰 수사를 지휘한 서울중앙지검 지휘부가 청와대 수사를 막았대요. 이런 한 달 동안 아침마다 화장실 갈 때마다 피의자신문조서로 밑 닦게 시킬 사법고시 합격생들을 보았나, 글쎄! 괜히 혼자 목소리 높이며 자가발전해봐요. 분노는 끓지 않고 냉소만 번져요. 원래 그래왔던 분들인데. 미국 대법관 올리버 웬들 홈스가 “법은 천재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의 영역”이라고 말한 게 벌써 수십 년 전인데. 사법고시에 합격할 지능과 범죄에 대한 분노와 인간에 대한 연민은 별개인데. 검찰 브리핑을 들으면 뭔가 취재되는 것 같지만, 검찰이 브리핑하지 않는 사건은 정보공개 청구 외에 언론도 검찰을 취재할 방법이 딱히 없는 검-언 취재 시스템도 그대로인데. 분노 패스.

3면은 온통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의 여론 조작 소식이에요. 아, 근데 분노 말고 피식 웃음 나와요. 기자가 되기 전 분당 이전의 민주노동당에 당비를 낸 적 있어요. 그때도 ‘그분’들 그랬어요. ‘그분’이 누구냐고요? 북핵을 자위권이라 하시고, 북한에 민노당 정보를 준 해당행위자를 처벌하자고 했더니 국가보안법 찬성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하던 분들이지요. 그분들 원래 민주주의 같은 거 잘 몰라요.

4면 보며 혼잣말했어요. 이럴 줄 알았어요. 조배숙 민주통합당 의원이 경선에서 떨어지고 무소속 출마한데요. 임께서도 여성 가산점 혜택 보고선, 경쟁자가 그 가산점 덕에 경선에서 승리하자 불복한데요. 그런데도 분노보다 측은지심 생겨요. 이렇게라도 기사에 나오고 싶으신 거잖아요. 유부남인 섬 아저씨 요새 투명인간 취급받아요. (그전엔?) 남의 일 같잖아요.

양육수당과 육아휴직이 말뿐인 현실, 가슴 아파…오지 않아요. 섬 아저씨 무자식 상팔자예요. 6면 기획 기사를 보아도 분노 같은 거 없어요. 역시 무자식이 상팔자란 자부심만 끓어요.

아아, 그래서 결국 이 소시민 가슴을 치는 건 건너건너 17면 라면값 짬짜미 기사예요. 머리 좋으신 경제학과 출신도 검사와 다를 바 없어요. 담합 같은 심각한 기업비리는 공정위든 시민이든 검찰에 고발할 권리가 있어야 하는데, 공정위만 전속고발권 있어요. 공정위가 고발 안 하면 끝이에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거 제 생각에 철학이랑, 사회학 책 속에만 있어요. 한국, 대체로 전근대사회예요.

‘세상만사 다 그렇지’라는 생각의 빈도가 하루하루 늘어요. 분노는 줄고 냉소는 자라요. 그러니까 이 칼럼 날로 먹는 게 아니라니까요. 섬 아저씨 눈을 감고 지금까지 밥값 5천원 아끼려고 해장국 사먹는 대신 집에서 주섬주섬 라면 끓이던 기억 떠올리자, 겨우, 간신히, 한 줌의 분노가 올라와요. 이런 아침마다 화장실에서 라면 봉지로 밑 닦게 시킬 녀석들, 이라고 자가발전도 한번 해봐요. 오늘 섬 아저씨 가슴에 그나마 성냥불 크기의 불 지른 건 농심 신춘호 회장님(사진).

이제 복수할 차례. 농심 주식 몇 주 사세요. 내년 주총 날짜 확인하세요. 찾아가세요. 라면수프, 물에 불린 라면을 적절히 드레스 코드로 사용하세요. 더 조언하면 총회꾼 선동(업무방해)에 해당하니 패스(아아, 섬 아저씨는 협심증이라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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