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 진짜 예뻐. 중요한 게 여기에 살짝 털이 들어가 있어야 해. 괜찮다. 얼만데? 21만원. 야, 그건 너무 비싸다. 할인했어. 할인해서 15만원. 할인했어? 그럼 됐어, 괜찮네. 가을에 입으면 진짜 잘 어울릴 거 같아. 난 별로던데. 디자인이 낙엽 같잖아. 나한테 딴 거는 70만원짜리 있고, 50만원짜리도 있어. 50만원짜리? 못 봤는데, 어떤 건데? 저번에 서울랜드 갈 때 입었던 거 있잖아. 아, 그거? 그렇게 안 보이던데? 그게 재질이 문제야. 만져보면 달라. 원래 10만원 넘어가면 대충 비슷해 보이지. 요즘 나온 야상 괜찮던데, 길이가 여기쯤까지 내려오고. 근데, 입던 거 그거 ○○한테 팔았어. 나중에 걔가 입은 거 보면, 어 그거 원래 누구 거 아니었냐, 이러면 재밌겠다. 이거 새로 사고 싶은데, 안에 누빔이 들어 있어. 좋네.
설 합본호 ‘부글부글’은 귀엽게 가려고 했습니다. 컷 제목도 ‘보글보글’로 바꾸고 내용은 ‘떡국이 보글보글’, 뭐 이런 식. 아니면 이러고 있는 나를 보고 ‘편집장이 부글부글’, 뭐 이런 식. 정초부터 장탄식을 늘어놓는 비분강개는 저리 가라, 우리도 즐겁게 살아보자, 뭐 이 정도를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오늘 버스에서 만난 4인조는 귀여운 보글보글인지, 살짝 짜증나는 부글부글인지 헷갈립니다. 알아서들 판단하세요.
버스 뒷좌석에 앉았습니다. 신문을 펴들었는데 다음 정거장에서 ‘패딩 교복’을 입은 얼라 4명이 탑니다. 2명은 노스페이스, 1명은 리복, 나머지 하나는 그럴듯해 보이는데 상표가 보이지 않는 패딩. 떼로 몰려오더니 제가 앉은 뒷좌석에 앉기 시작합니다. 얼라들 사이에 끼어 있기 뭐해(쫄아서 그런 거 아닙니다) “내 자리에 앉으라”며 자리를 비켜줬더니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돌아오네요. 요즘 애들 생각보다 괜찮아요. 학교 폭력은 언론에만 넘쳐나는 걸까요. 남자애들입니다. 중3, 혹은 고1 정도. 예뻐, 가을에 입으면 좋을 거 같아, 누빔이 들어 있어. 요즘 사내애들도 이런 말을 합니다. 누빔이라니오. 이건 사극 대사 아닌가요. 제가 최근에 저 또래 아이들한테서 들어본 가장 고상한 말이었지만, 알아보니 패딩계에서는 일상어라네요.
버스가 떠나가라 쉬지 않고 떠들어대기 시작합니다. 짜증납니다만 저 나이 때는 다 그러니까요. 사실 저는 지금도 그래요. 어, 이건 뭐야. 망치잖아. 여기 왜 있지? ‘얼라1’이 버스 창틀에 달려 있는 비상용 탈출 망치를 마치 원시인류가 흉기로 집어든 뼈다귀처럼 뽑아듭니다. 버스 처음 탄 건가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가 배경음악으로 깔려야 할 듯한 장면이죠. 이미 신문기사는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간간이 들려오는 ‘씨×’(이건 ‘×발’로 써야 하나요? 어디가 욕인가요?) 때문은 아닙니다. 그 정도는 저도 노멀하게 씁니다. 망치를 뽑아든 뒤에 시작된, 제가 버스에서 내리기까지 장장 15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진, 그 뒤로도 계속됐을 ‘패딩·코트·야상 패션’ 전반에 대한 얼라 1·2·3·4의 대화가 신기해서였습니다. 거의 미지와의 조우. 기사로 읽어서는 느낄 수 없는 걔네들만의 세계가 따로,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패딩은 죄악이 아니었던 거죠. 패딩이 사람을 패거나, 돈을 뺏거나, 친구를 죽이지는 않는다는 거죠. 패딩 떼거리가 시끄럽기는 해도, 정말 시끄럽기는 해도 오리털로 사람을 때릴 수는 없다는 얘기죠.
뭔 소리냐고요. 설에 패딩 입은 조카들이 세배하러 오면 낮술만 마시지 말고 3명 짝을 지워 놀게 하고 구경해보세요. 무슨 말인지 알게 되실 겁니다. 근데, 버스에서 내릴 때 보니 얼라1은 비상용 망치를 계속 뽑아들고 있네요. 저거 어디다 쓰려고 하나요. 151번 버스 기사 아저씨는 망치 하나 새로 채워넣으셔야 했을까요? 욕이 생활인 아이들을 보니 올해부터는 ‘젠장’ 따위 말은 하지 말아야겠네요. 이런, 이임지인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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