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임신에 놀라 엉겁결에 지은 태명, 곤란이. 이 이름은 우리 부부에게 ‘곤란이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니 이제 ‘곤란해도 괜찮다’는 자세로 살아가라는 주문을 불어넣어주는 좋은 이름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밝은 얼굴로 태명을 물어온 사람들은 ‘곤란이’라는 이름을 듣고 얼굴을 찌푸리곤 했다. “왜 애 이름을 그렇게 짓냐” “애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여러 타박을 들어야 했다. 친정 엄마는 “결혼 5년 만에 가진 아인데 곤란하긴커녕 너무도 적절한 타이밍”이라며 태명을 ‘적절이’로 바꾸라고 했다. 평소 사주팔자에 관심이 많은 친구는 “인생은 이름 따라간다”며 태명을 바꾸라고 호통쳤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이미 ‘곤란이’에 정이 들어버렸다. 하여, 온갖 타박에도 ’곤란이’란 이름을 사수하고 있었는데…!
산후조리원 신생아실에 아기를 보러 갔을 때 묘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곤란이 옆으로 쪼르륵 누워 있는 아기들은 행복이, 기쁨이, 밤톨이 등 긍정적이고 귀여운 이름을 갖고 있었다. ‘곤란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누워 있는 아기가 안쓰럽기까지 했다. 급기야 산후조리원 직원이 ’골난이’라고 잘못 쓴 것을 화이트로 지우고 ’곤란이’라고 써 뭔가 추레해 보였다.
결정적인 사건은 며칠 뒤 일어났다. 산후조리원의 한 직원이 심각한 얼굴로 “아기 이름을 바꿔주시면 안 돼요? 부르기가 너무 좀… 그렇네요”라고 말하기에 “아… 네”라고 대답하고는 넘겼다. 그런데 수유를 위해 신생아실 문을 열다가 듣고 말았다. 한 직원이 울고 있는 우리 아기에게 하는 말, “곤란아, 너 이러면 정말 곤란해!”. 헉, 이건 아니다. 남편을 붙잡고 아기 이름을 바꿔야겠다고, 태어나자마자 사람들에게 곤란하단 소리를 듣게 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곤란이에게 붙여주고 싶은 이름이 있었다. ‘미르’였다. 미르는 순우리말로 ’용’이라는 뜻이어서 용띠해에 태어난 아기에게 잘 어울렸다. 러시아어로는 평화란 뜻이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어림없었다. 시댁의 돌림자인 ’교’(敎)자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시아버님께 슬쩍 “돌림자를 안 쓰면 안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럼 너네 안 본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일단 며칠 동안만이라도 ‘미르’라고 부르자고 결정했다. 다음날 이름표에 또 화이트칠을 하고 ’미르’로 바꿔 썼다. 며칠 동안 산후조리원 직원들은 곤란아, 했다가 아니 미르야, 했다.
이제는 출생신고를 위한 이름을 지어야 했다. 남편네 성씨와 돌림자를 넣고 나니 정할 것은 마지막 한 글자뿐이었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내가 낳았는데 이름에 나의 흔적은 없는가? 고민 끝에 찾았다. ‘빈’(彬)자였다. 한자에 내 성씨인 ‘수풀 림’(林)자가 섞여 있으니 조금 위안이 됐다. 그리하여 곤란이, 아니 미르는 다시 교빈이가 되었다.
내 배에서 미끄덩 하고 나온 생명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어찌나 어렵던지. 꽃이라 불러줘야 비로소 꽃이 된다는데 아이에게 적절한 이름을 지어준 것인지 모르겠다. 교빈아, 그래도 엄마·아빠에게 넌 정말 적절한 때에 태어나준 귀엽고 귀한 ‘곤란이’란다!
임지선 기자
*이 글은 육아 사이트 ‘베이비트리’를 통해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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