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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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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타족’과 ‘주타족’

등록 2001-02-27 00:00 수정 2020-05-02 04:21

현대 문화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일상성이다. 오늘날 문화트렌드는 각종 문명이기의 일상적 사용에서 바로 감지될 수 있으며, 각 개인의 하루 일과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세대간 문화적 차이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최근의 ‘문화 다양성’ 논쟁에서 흔히 간과되는 것이 바로 ‘문화의 일상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구체적 사례를 들고자 한다.

벤처기업과 전통적 출퇴근제의 파괴

우선 ‘야타족’과 ‘주타족’이라는 생소한 말들부터 설명해야겠다. 혹 어떤 독자는 야타족이라는 말에서 우리나라 일부 지역에서 유행하는 멋진 외제차를 타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떠올릴는지 모르겠으나,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야(夜)타족’이란 말로는- 유난히 ‘봄을 타듯이’- ‘밤을 몹시 타는 사람들’을 지칭하고 그들의 사회 문화 행태를 반영하고자 한다. 반대로 ‘주(晝)타족’이란 말로는 일과의 기준을 낮에 두고 낮의 의미에 중점을 두는 ‘낮을 타는 사람’들을 지칭하고자 한다. 즉 야타족은 ‘밤 문화’에 삶의 기준을 두는 사람을, 주타족은 ‘낮 문화’에 삶의 기준을 두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러한 구분이 사회 문화적으로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디지털 문명의 확산에 따라 최근 몇년 동안, ‘심야’에 일상적 활동을 하는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심야 극장, 심야 콘서트, 심야 데이트, 심야 회식, 심야 쇼핑 등은 그래도 덜 일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심야 출근, 심야 노동, 심야 회의쯤 되면 그것이 얼마나 일상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때는 특종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일하는 방식이 이제는 상당히 폭넓은 층에서 일상화되고 있다.

특히 디지털 세대는 밤의 일에 더욱 친숙한 것 같다. IT 벤처 기업들이 생겨나면서 아침 출근, 저녁 퇴근이라는 전통적 출퇴근 시간제도 파괴되었다. 일부 기업체에서는 자유출퇴근 시간제를 채택하고 있기도 하다. 전세계를 동시간대에 연결해주는 인터넷도 이른바 ‘고정 시간대 파괴 문화’에 일조하고 있다. 적지않은 가정에서 이미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간의 일과가 동일하지 않거나 완전히 뒤바뀐 것을 매일같이 체험하고 있다. 경제 경영에서 세계화도 이런 경향에 한몫 하고 있다. 국제 시차에 맞춰 일할 필요성이 늘어남에 따라(예를 들어, 뉴욕 증시 개장 시간은 한국 시간으로 밤 11시다) 야간 작업은 중요한 일과가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야타족의 생활 습관을 ‘자연의 시계에 거역하는 것’이라고 경종을 울리고 싶을지 모른다. 또한 건강에 안 좋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해가 뜨면 활동하고 해가 지면 휴식과 잠자리에 드는 것이 지난 20세기까지 수천년 동안 다수의 사람들이 해오던 생활 패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인류는 태양빛말고 ‘인공빛’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인류가 자연에 거역(?)하는 것은 이미 태곳적부터 있었는지 모른다. 역설적으로 외부적 자연 조건에 거역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가? 그리고 맹수 등 수많은 야행성 동물의 건강과 정력이 얼마나 좋은지 아는가? 세상을 자기의 입장에서만 단순화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 삶 곳곳에 있는 복잡성의 요구를 간과한다.

세상은 어떠한 이론과 어떠한 이념적 주장보다 항상 좀더 복잡하다. 야타족이 있고 주타족이 있는 것도 그러한 세상을 반영한다. 그것뿐이랴, 양쪽을 넘나드는 ‘주야타족’도 있을 수 있고, 양수걸이라도 밤에 더 중점을 두는 사람은 ‘야주타족’을 자칭하고 싶을지 모른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삶의 여러 분야에서 폭넓은 다양성과 대면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일상적 요구이다.

남을 배려하는 ‘기술’의 습득

이런 상황에서는 다양성을 거부하거나 무시할 것이 아니라 각양각색의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어울려서 잘살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하고 실행해야 한다. 우선 일상생활 속 상대방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상대를 존중한다는 관념적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기술적이다. 우리는 추상적 덕목을 강조하는 교육관습 때문에 생활의 지혜가 상당수 기술적인 차원이라는 것을 도외시했는지도 모른다. 매너는 상당수 기술이다. 21세기 첨단 과학과 문화적 다양성의 시대에 서로 남을 배려하는 ‘기술’의 습득은 더욱 중요시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관용은 종교적 정치적 영역을 넘어서, 사회 문화적 영역에서 더욱 필요하게 될 것이다. 핵가족 안에서도 야타족과 주타족이 공존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관용의 일상적 실행을 요구한다. 문화적 차이와 그것이 일상화된 상이한 생활 패턴들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능력은 ‘문화의 세기’를 사는 기본 자질이 될 것이다.

김용석/ 전 로마그레고리안대 교수·철학 uchronia@netsg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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