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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 삶는 시간

[책장 찢어먹는 여자]허수경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등록 2012-05-15 21:43 수정 2020-05-03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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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려 집을 향하여 걷다가 마음을 바꾸어 슈퍼마켓이 있는 길 건너편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평소 같으면 토요일에 일주일치 장을 봐다가 냉장고 안에 재워놓고 한 주일을 야금야금 파먹곤 했어요. 오늘은 수요일, 그런데 갑자기 장을 보러 갈 마음이 생겼어요. 배추 한 통과 파 한 단 그리고 돼지고기 600그램을 사서 가방에 집어넣었습니다. 마늘과 오이와 풋고추와 상추도 샀어요. 지갑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아직 돈이 남아 있어 맥주도 두 병 샀습니다.”

허수경 선생님의 (문학동네 펴냄)을 읽었습니다. ‘베트남 요리책-이문재 시인에게’를 읽으며 군침을 삼켰습니다. 선생님은 곧장 “배추를 뚝뚝 분질러 소금에 이겨서 부엌 한쪽에 밀어두고는 마늘과 양파를 넣고 돼지고기를 삶기 시작”했습니다. 돼지고기가 맛있게 익기를 기다리며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가을 마늘을 한아름 사다가 겨울에 먹을 것까지 다듬던 일, 젓갈을 달이던 날 온 집안에 젓갈 냄새가 진동했던 일 등을 이문재 시인에게 조곤조곤 전하셨지요. 오감 중 후각이 가장 오래 기억된다지요. 선생님의 편지를 엿보며 저도 어린 날 집안 곳곳에 퍼졌던 음식 냄새 기억에 잠시 아련해졌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음식 냄새라면 진하게 끓이던 멸치 육수가 생각나요. 그 애잔하게 비린 냄새. 엄마와 떨어져 살게 되자 저도 종종 커다란 냄비에다 멸치와 다시마, 냉장고에 남은 자투리 채소들을 모아다 육수를 내곤 해요. 냄새를 맡고 있자면 그 국물에 엄마가 말아주시던 국수며, 국수를 먹던 어느 주말이며 기억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드디어 돼지고기가 다 삶아졌습니다. 구수한 냄새가 나는 듯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의 어머니도 돼지고기를 기가 막히게 삶아주십니다. 그분의 음식을 먹어보기 전, 저도 돼지 냄새를 잡겠다며 요리책을 뒤져 된장이며 커피며 월계수잎이며 갖은 방법을 써본 적이 있었어요. 그러나 40여 년 세월의 비결에 비기지 못합니다. 그 사람의 어머니는 그냥 커다란 냄비에 물을 넉넉히 끓이고 여기에 파, 양파, 사과, 고기를 넣고 소주를 붓습니다. 소금을 약간 넣고 간을 합니다. 그렇게 1시간 정도 폭 삶아냅니다. 옆에 서서 얼마큼 넣어요? 언제 넣어요? 자꾸 따져물었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는 투로 그냥 숭덩숭덩, 적당히 하면 된답니다. 숭덩숭덩, 적당히라니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입니다.

선생님은 건져낸 고기를 베포에 싸서 도마에 눌러두십니다. 물기와 기름기를 빼기 위해서라고요. 고기를 삶아 따뜻할 때 먹을 줄만 알았던 저는 한 번도 이렇게 해본 적이 없는데, 한번 따라서 해볼까봐요.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고기를 잡고 ‘앗 뜨거’를 연발하며 호들갑스럽게 종종거리곤 했는데, 올여름에는 왠지 단정하게 음식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도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돼지고기 한 근을 사가야겠습니다. 잘 삶아 차갑게 식혀 시원한 맥주와 먹으면 한 주의 긴장과 피로도 녹아나겠지요.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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