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시인(904호 ‘연예인이 된 원시인의 깔때기’ 참조)이 상경했다. 정신줄 놓은 마감일, 얼떨결에 전화를 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소속사에 볼일이 있어 올라오는데 얼굴 보려고 전화했단다. 소속사에 소속된 건 맞니? 그냥 볼일만 보고 가면 안 되겠니? 얼굴은 영상통화로 보면 안 되겠니? 결국 토요일 오후 권시인과 조우했다. 권시인은 더 수척해 있었다. 녀석은 보자마자 배가 고프다고 했다. 수렵생활 안 하니? 이제 채집생활로 넘어갔니? 아들 녀석과 우리 부부는 육식동물인 녀석을 몰고 서울대입구역 부근의 한우암소직판장 ‘뚝심’으로 향했다. 와잎은 여러 부위가 함께 나오는 세트 메뉴와 소맥을 뚝심 있게 주문했다. ‘식탐이 살아 있네~’라고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육식동물뿐이었다. 나 같은 잡식은 설 자리가 없어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참숯에 우삼겹을 올리는 족족 권시인이 날름날름 집어먹었다. 너 무슨 육회 먹니? 괜히 녀석의 화를 돋우면 또 메서드 발연기를 펼칠지 몰라 잠자코 고기를 구웠다. 아들 녀석은 언제 뒤집어썼는지 파워레인저 엔진포스 가면을 쓰고 혼자 상황극을 찍고 있었다. 가면 좀 벗으면 안 되겠니? 갑자기 보면 파리인간 같아서 놀라겠다. 와잎은 이런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지런히 소맥을 말고 있었다. 세상사 뒤로한 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장인의 모습이 따로 없었다. 인간문화재라고 느끼며 고기 맛을 봤다. 맛이 살아 있네~. 살치살과 등심을 올려서 굽고 있는데 소맥을 원샷한 권시인이 말했다. “나,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잠이 안 와.” “메서드 발연기 한 거? 잊어버려~”라고 답했는데, 권시인은 그게 아니라고 했다. 중3 때의 팬티 사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중학교 때 권시인의 집은 부모님이 없어서 놀기 편했다. 목사님과 장로님이던 그의 부모님은 목회일로 늘 바쁘셨다. 심비홍과 난 권시인의 집에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어느 초여름날 심비홍이 권시인네 화장실에서 샤워 겸 물장난을 했는데 문고리에 걸어논 팬티가 젖었다. 젖은 팬티 입기가 찝찝했던 심비홍은 권시인에게 팬티를 빌려달라고 했다. 권시인은 장난기가 발동해 자신의 팬티는 다 빨아서 지금 입고 있는 것밖에 없다고 했다. 심비홍은 더러운 소리 하지 말고 다른 팬티를 내놓으라고 생짜를 부렸다. 권시인은 속옷을 넣어둔 데를 찾지 못하겠다, 엄마 팬티가 하나 있는데 거의 새것이라며 이거라도 입으라고 했다. 레이스가 달린 실크 소재의 빨간 팬티였다. 발가벗고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심비홍은 결국 그 팬티를 입으며 애들한테 절대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 다음날, 권시인은 학교에 오자마자 낄낄거리며 내게 그 사실을 말했다. 난 그 즉시 심비홍의 반에 가서 “심비홍~ 권○○네 엄마 팬티 입었대요~”라고 약 올리며 녀석의 바지를 벗겼다. 오 마이 갓! 심비홍은 아직도 빨간 팬티를 입고 있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심비홍은 나를 노려보며 바지를 올려 입고서는 내 뒤편의 권시인을 끌고 화장실로 갔다. 그날 권시인은 심비홍에게 밟혔다.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말했느냐는 거였다. 난 말렸지만, 때는 늦었다(근데 남의 엄마 팬티 입은 놈이 잘못 아닌가~쩝).
그 일이 자신의 트라우마가 됐다고 권시인은 등심을 씹으며 말했다. 와잎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 가나 저 인간이 말썽이구만.” 난 미안한 마음에 등심 1인분을 추가했다. 권시인은 소맥을 추가 주문했다. 트라우마치고는 그 모습이 너무 해맑았다. 916호에 계속. 문의 02-887-9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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