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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승부와 서피동파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 아시아푸드점 ‘생어거스틴’
등록 2012-05-10 17:01 수정 2020-05-03 04:26

복수의 날(908호 ‘소팔공주와 함께 동춘서커스를!’ 참조)을 위해 태권이는 일주일 동안 술도 끊고 조기 귀가했다(고 했다). 숨 쉬기도 귀찮아하던 인간이 계단을 오르는 등 운동도 했다(고 했다). 그런 태권이의 얘길 듣고 와잎이 말했다. “얼씨구~, 그 정성으로 사시를 봤으면 대법관이 됐겠다.” 사시에 떨어진 녀석을 디스하는 말이었지만,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복수의 이빨을 갈았다.

드디어 결전의 날, 토요일 오후 서울 신촌 ‘라나이’에 남편과 함께 도착한 소팔이는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피부도 좋아지고 얼굴에 살이 올라 사각턱이 가려져 성형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욕인가, 칭찬인가?) 소팔이는 용됐다. 줄여서 용팔이? 태권이는 복수의 뻐드렁니를 숨긴 채 반갑게 인사했다. 소팔이보다 더 여성스럽게 생긴 소팔이 남편은 태권이를 ‘형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니 형님이 니 마누라 잡으러 온 거 아니?) 자신의 근황을 얘기하며 몇 차례 생맥이 돌았다. 채소를 토핑으로 얹은 피자는 도우의 고소함에 상큼함이 더해졌다. 태권이는 슬슬 복수의 칼을 꺼냈다. 소팔이가 자신을 쏙 빼닮은 아들의 휴대전화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주자 태권이는 사진을 보며 “엄마 잘못 만나 태어나자마자 고생이구만~”이라고 일갈했다. 잠자코 있던 소팔이 남편만 제일 크게 웃었다. (너도 할 말이 많았구나?) 소팔이는 태권이를 향해 눈을 흘겼다. 싸한 분위기, 와잎이 말했다. “자자~ 놀면 뭐해. 한잔해야지~.” 오늘도 또 시작이구만~. 좀 놀면 안 되겠니?

소팔이를 쳐다보며 술을 마시던 태권이는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부부대항 술내기 하자. 진 팀이 술값 내기.” 와잎은 태권이의 귀여운 도발에 박수로 화답했다. 소팔이는 “꼭 그래야겠느냐?”고 재차 물었다. 소팔이 남편은 천진하게 재밌어했다. 사실 태권이의 계산은 소팔이 커플 하나만 잡겠다는 심산이었다. 첫 잔은 남편끼리, 두 번째 잔은 아내끼리. 커플 중에 하나가 잔을 다 못 마시면 배우자가 대신 마셔야 하는 룰로 내기가 시작됐다. 1등은 정해져 있었고, 문제는 누가 꼴등을 하느냐였다. 3잔씩 연거푸 잔이 비워졌고, 주문받는 알바생은 기인열전을 보는 표정이었다. (우리가 원래 좀 이래요~.) 각자 4잔씩 마셨어도 승부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우린 소주를 시켰다. 안주는 피자 한 판 추가. 소주 2병을 비웠을 때, 찌찌엘이 남편 태권이에게 잔을 밀었다. 이윽고 소팔이 남편도 소팔이에게 잔을 넘겼다. 우리 부부만 멀쩡했다. 부창부수. 소팔이와 태권이의 진검승부는 곧 진상승부로 끝났다. 소주 4병을 다 마시고 화장실에 가던 소팔이는 피자가게 한복판에 파전을 부쳤다. 서피동파(서양 피자 먹은 동양인이 부치는 파전)구만~. 태권이는 입 안 가득 되새김질을 했다. 와잎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가지가지 아주 생쇼를 하는구만~.” 배우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그들이 떠나고 남은 건 계산서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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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에 이기고도 계산을 한 내가 영혼의 허기를 느끼며 멍 때리고 있자 와잎이 말했다. “뭐 먹으러 갈래? 가로수길에 타이음식점 ‘생어거스틴’이라고 있거든. 내일 내 생일 오늘 미리 하지 뭐~, 호호.” 생어거스틴? 생어거지구만~. 우린 택시를 탔다. 그곳엔 또 다른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912호에 계속. 문의 02-548-1680 xreporter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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