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거 아니에요?”
지난 10월27일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난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은 그 전날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한 것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20~40대 유권자들이 야권의 박원순 후보에게 몰표를 주고, 강남 3구와 용산을 제외한 나머지 21개 구에서 여당이 패배한 배경에는 ‘양극화’와 ‘청년실업’으로 상징되는 고용위기에 대한 유권자들의 분노가 깔려 있다는 분석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명박 대통령도 청와대 참모들과 만난 자리에서 “10·26 재보선 결과에 담긴 국민의 뜻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특히 젊은 세대들의 뜻을 깊이 새기겠다”고 밝혔다.
“사사건건 대기업 눈치 봐”
하지만 대·중소기업 간 양극화 해소를 위해 출범한 동반성장위원회의 현실은 이런 대통령의 ‘반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재벌 대기업들이 애초 약속과는 달리 비협조와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고, 청와대와 정부도 대기업 눈치보기로 일관한다는 지적이 많다. 동반성장위가 출범 1돌이 되는 연말을 넘기지 못하고 결국 좌초할지 모른다는 우려마저 제기된다. 당연히 정운찬 위원장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과 이익공유제 도입에 반대하며 똑같은 얘기를 계속 되풀이하는 상황이 지루하게 이어져 관련 실무위원회가 수개월째 공전하고 있다. 의도적인 지연 작전으로 볼 수밖에 없다.” 지난 10월20일 실무위원회가 끝난 뒤 한 공익대표는 분통을 터뜨렸다. 또 다른 공익대표는 “회의를 주재하는 실무위원장이 사사건건 대기업의 눈치를 보면서 편파적 진행을 한다”며 혀를 찼다.
동반성장위는 지난 9월 말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세탁비누, 장류 등 16개를 1차 선정했다. 이어 두부, 발광다이오드(LED) 조명, 데스크톱 등 나머지 29개 쟁점 품목을 대상으로 2차 선정 작업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발표 시점이 애초 약속했던 10월 말에서 11월4일로 늦춰지는 등 난항을 겪고 있다. 대기업이 좀처럼 양보를 안 하자 중소기업계에서는 협의 중단 가능성까지 내비칠 정도로 뿔이 났다. 이해당사자들인 대·중소기업 간 자발적 합의라는 전무후무한 방식이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기득권을 쥔 대기업이 좀처럼 양보하지 않는 우리 현실에서 실효성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동반성장위는 올 상반기 동반성장지수를 확정했다. 이를 토대로 연말에는 56개 대기업의 ‘동반성장 및 공정거래 협약 실적’ 평가를 한다. 현재 진행 중인 중소기업들의 동반성장 체감도 평가와 함께 내년 초에 그 결과를 함께 발표할 계획이다. 하지만 현행 동반성장지수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과도한 납품단가 인하 등 기존 거래 관행을 혁신하기 위한 평가 항목이 빠져 있다. 동반성장위는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 상승분의 납품단가 반영, 기술개발비 100% 보상, 거래 기간 중 납품단가 인하 지양 등 평가 항목을 신설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두 번째는 대기업이 동반성장 기금을 출연하는 항목이다. 기금은 중소기업의 사업화연계기술개발사업(R&BD) 투자 비용, 인력 개발, 해외 동반 진출 지원, 2~3차 협력사의 회사채 발행 보증을 위해 사용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정 위원장이 각별히 관심을 쏟는 ‘이익공유제’ 도입이다. 중소기업의 협력으로 대기업의 판매 수입이나 이익이 예상보다 많이 났을 경우 그중 일부를 중소기업의 기여도에 따라 나눠줘 동반성장을 추구하는 제도다. 1920년대 할리우드 영화산업 태동기에 처음 등장한 이래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네덜란드 등 여러 선진국에서 제조업, 정보기술(IT) 서비스, 건설, 유통, 광고, 인터넷 판매, 가맹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이익공유제, 재계 결사반대
정 위원장은 이 세 가지 방안을 골자로 한 동반성장지수 개선안을 마련해, 2012년 대기업의 동반성장 실적 평가 때부터 적용할 계획이다. 하지만 대기업·중소기업·공익대표로 구성된 실무위원회가 여섯 차례나 회의를 열었음에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재벌 대기업의 반대 때문이다. 우선 인건비 상승분의 납품단가 반영, 기술개발비 100% 보상에 난색이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에서 부품을 납품받으며 기술개발 비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오랜 관행이다. 이는 중소기업의 기술개발 유인을 없애 경쟁력 향상을 가로막는 결정적 요인으로 지적돼왔다. 휴대전화 부품을 생산하는 한 중소기업 대표는 “투자비 조달을 위해 은행 대출을 받고, 오랜 시간을 들여 어렵사리 기술개발을 해서 운 좋게 대기업 납품에 성공해도 기술개발비를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면 대출금 상환도 못하고 추가 기술개발도 불가능하다”며 “대기업들이 중소기업과의 장기 공급계약을 기피하는 현실 속에서, 거래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기술을 개발한 다른 중소기업으로 거래처를 바꾸면 속수무책으로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이는 중소기업의 기술개발에 들어간 정부지원금이 사실상 대기업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지적도 많다.
중소기업의 인건비는 대기업의 50%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저임금은 ‘우수인력 중소기업 기피→중소기업 기술개발 여력 약화→경쟁력 약화’의 악순환을 초래한다.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려면 대·중소기업 간 인건비 격차를 좁히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꼽힌다.
정 위원장은 이익공유제의 취지에 대해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 대기업이 가격경쟁력을 높이려고 부품회사들의 납품단가를 후려치는 관행을 법이나 제도로 무조건 막는 것은 쉽지 않다”며 “대신 납품단가 후려치기로 대기업의 이익이 많이 났을 경우 그 일부를 중소기업의 기술개발과 우수인력 확보를 위해 나눠주자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재계는 결사반대다. 재벌 대기업을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지난 10월20일 실무위원회에 이익공유제 대신 공생발전공유제 도입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8·15 경축사에서 제안한 ‘공생발전’을 이름으로 차용했지만, 내용적으로는 기존에 시행 중인 성과공유제와 거의 같다. 전경련은 이전부터 이익공유제 도입 대신 성과공유제를 시행하자고 주장해왔다.
전문가들은 성과공유제와 이익공유제는 내용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동반성장위 실무위원회의 한 공익대표는 “이익공유제는 중소기업의 지원으로 대기업의 성과(이익이나 판매수입)가 많이 나면 그중 일부를 중소기업과 나누는 것인 반면, 성과공유제는 대기업의 지원으로 중소기업의 성과(원가절감 등)가 많이 나면 그중 일부를 대기업과 나누는 것으로 성격이 서로 다르다”고 강조했다. 이익공유제가 대기업의 이익을 나누는 것인 반면, 성과공유제는 중소기업의 이익을 나누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우리나라처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양극화가 심한 상황에서 어느 방안이 더 바람직한지는 자명하다. 국내 대기업들의 성과공유제 시행 사례로는 90여 건이 보고됐다. 하지만 포스코와 일부 공기업들을 제외하고는 실제 중소기업 지원 효과가 거의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 위원장,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대기업의 이익을 협력사와 공유하려면 협력사들의 기여도를 정확히 평가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반대 이유를 말한다. 하지만 대기업들이 협력업체에 대한 기여도 평가를 이미 시행 중인 점을 고려하면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대기업은 매년 협력업체들을 상대로 엄격한 심사평가를 하고, 점수가 낮은 기업에 대해서는 물량 배정을 축소한다. 심한 경우에는 아예 거래 대상에서 빼버린다. 또 일부 대기업들은 이미 이익공유제를 시행하고 있다. STX조선해양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동반성장위 관계자는 “상위 평가등급을 판정받은 협력사에 대해서는 실적 결산 뒤 영업이익률이 STX보다 낮은 경우 단가 조정, 물량 증대 등으로 영업이익률을 높여준다”고 설명했다. 실무위원회의 한 공익대표는 “국내에도 다양한 이익공유제 시행 사례가 있기 때문에, 실행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억지”라며 “방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없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대기업이 이익공유제를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이익공유제의 파급효과를 겁내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 대기업 임원은 “이익공유제를 도입하면 현재 대기업들이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는 사내 하청업체 노동자들부터 이익 배분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며 “(이를) 어떻게 감당하겠느냐”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도 소극적인 자세다. 사사건건 동반성장위의 발목을 잡던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이 대규모 정전 사태 등의 책임을 지고 지난 10월27일 교체됐지만, 청와대와 부처 중에서 동반성장위를 적극적으로 거드는 곳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동반성장은 기업들이 자율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미온적 태도를 고수하는 것이다. 정운찬 위원장은 작심한 듯이 대통령과 정부를 싸잡아 비판했다. “장·차관들은 대통령의 의중을 읽고 행동하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가끔 동반성장을 말하지만 결연한 의지를 보인 적이 없다. 그러니 청와대나 부처에 있는 사람들이 자꾸 (동반성장위원회에서 하는 일에) 딴지를 거는 것이다.” 정 위원장은 대통령이 내건 공생발전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공생발전 같은 (이상한) 말을 만들어낼 것이 아니라, 동반성장을 제대로 해야 한다.”
정 위원장은 실무위원회 대표들에게 대기업·정부와의 담판을 통해 합의점이 도출될 수 있도록 마지막 노력을 기울여줄 것을 주문했다. 더 이상 지연 작전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또한 성과를 낼 전망이 끝내 보이지 않으면 더 이상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뜻을 측근들에게 내비쳤다고 한다. 정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냈고, 그 누구보다 동반성장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그런 인연으로 초대 동반성장위원장을 맡았다. 그런 정 위원장이 위원장직을 내던진다면, 사실상 이명박 정부의 동반성장 정책에 사망선고가 내려지는 셈이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 대기업에도 큰 부담이다. 그동안 숱하게 나온 대기업의 동방성장 노력 다짐이 공수표에 불과했다는 비판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11월4일 중대 고비 될 듯
재계 안에서는 동반성장위가 이익공유제의 이름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양보를 하면 내용은 수용하는 타협안이 제기된다. 정 위원장도 이 방안에 대한 검토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지난 10월 중순 실무위원회를 앞두고 열린 30대 그룹 임원회의에서는 이익공유제 절대 불가의 초강경 분위기가 연출됐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대기업의 한 임원은 “일부 대기업에서는 실무위의 대기업 대표들에게 자리를 걸고 이익공유제를 무조건 막아야 한다고 주문했을 정도”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결국 일부 재벌 대기업의 타협안은 진정성 없는 일종의 애드벌룬 성격일 가능성도 있다.
정 위원장은 대기업의 반대와 정부의 눈치 보기로 인한 장기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어떤 승부수를 던질 것인가? 오는 11월4일 제2차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과 그 직후에 예상되는 실무위원회 개최 시점이 중대 고비가 될 전망이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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