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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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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1할2푼5리

등록 2012-05-30 15:15 수정 2020-05-03 04:26

삼미슈퍼스타즈는 전설이다. 30년의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다. 원년인 1982년 후기에 승률 1할2푼5리(5승35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박철순이 이끌던 OB 베어스에 그해 시즌 내내 깨졌다. 16전 전패. 주로 꼴찌였던 삼미슈퍼스타즈는 1985년 6월21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마지막 경기에서도 승리를 거머쥐지 못했다. 그 뒤로도 오래도록 ‘꼴찌의 대명사’ ‘패배자들의 벗’이다.
넥센 히어로즈는 삼미슈퍼스타즈를 잇는 또 다른 ‘꼴찌의 대명사’였다. 7-6-7-8, 2008년 창단 이래 지난 4년간 히어로즈의 성적표다. 가을 야구는 언감생심이었다. 그 히어로즈가 요즘 발바닥에 땀이 났다. 5월23일 LG 트윈스를 꺾고 창단 첫 8연승을 올리며 시즌 단독 선두에 올랐다. 선두 자리는 2009년 4월16일 이후 1133일 만이란다. 그땐 순위가 별 의미 없는 시즌 초 10경기 성적이라, 40경기 가까이 치른 지금이 사실 창단 이래 첫 선두인 셈이다. 승부의 세계에 1위와 꼴찌는 늘 있는 법. 그래도 ‘꼴찌들의 대반란’은 언제나 새롭다. 트윈스에서 방출돼 신고선수로 입단한 2루수 서건창, 역시 신고선수 출신인 포수 허도환, ‘땜빵투수’ 김영민…, 그리고 ‘핵잠수함’ 김병현. 김병현은 5월18일 한국 프로야구 1군 무대 첫 등판에 이어 5월25일 한화 류현진과의 맞대결에서도 위력적인 투구로 한 회 1개꼴로 삼진을 잡아내 ‘닥터 K’의 부활을 기대하게 했다. 김병현은 한국인 최초로 미국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우승의 기쁨을 누렸으나 2007년 이후 소속팀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해왔다. 지난 1월20일 히어로즈 입단식 때 김병현이 한 말이 귓가를 맴돈다. “그냥 마운드에 올라 기분 좋게 공을 던지고 싶은 생각뿐이다.”
‘패배자들의 무덤’이던 히어로즈의 선전, ‘잊혀진 존재’였던 김병현의 재기는 ‘무한경쟁·승자독식 사회’에서 늘 패배하며 살아가는 장삼이사들에겐 눈물겨운 위안이다. 김시진 히어로즈 감독의 말이 허튼소리로 들리지 않는 까닭이다. “다른 팀 같으면 기다려주지 않았을 선수들이 우리 팀에선 기회를 얻었다. 못한다고 빼면 자신감이 없어 더 못했을 텐데 우리는 믿고 기용했다. 실패를 두려워 말라. 실패를 하며 실력이 는다.” ‘패자부활’을 용인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 대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질타를 연상케 한다. 안 원장은 “미국 실리콘밸리가 성공의 요람이라는데, 사실은 100개의 벤처가 나타나면 하나만 살고 99개는 죽는 실패의 요람”이라며 “실패한 사람에게도 기회를 줘야 젊은 20대들이 도전정신을 갖게 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패자부활은 장려돼야 한다. 하지만 패자부활이든 뭐든 성공 강박에 사로잡힐 이유 또한 없다. 소설가 박민규가 소설 에서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를 삼미슈퍼스타즈가 야구팬들에게 남겨준 아름다운 삶의 태도라 칭송하지 않았던가. 박민규는 그 책 ‘작가의 말’에 이렇게 적어놨다. “1할2푼5리의 승률로, 나는 살아왔다. 아닌 게 아니라, 삼미슈퍼스타즈의 야구라고도, 나는 말할 수 있다. 함정에 빠져 비교만 않는다면, 꽤나 잘 살아온 인생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뭐 어때, 늘 언제나 맴맴맴. 관건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 뛰지 않는 것. 속지 않는 것. 찬찬히 들여다보고, 행동하는 것. 피곤하게 살기는, 놈들도 마찬가지다. 속지 않고 즐겁게 사는 일만이, 우리의 관건이다.”

이제훈 편집장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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