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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보다 아름다운

[만리재에서]
등록 2011-10-12 14:42 수정 2020-05-03 04:26

“월가를 점거하라”는 시위로 미국이 들썩이던 지난 10월5일(현지시각)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의 심장이 멈췄다. 잡스라는 디지털시대 영웅의 죽음은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애플 마니아뿐만 아니라 지구촌이 안타까움과 추모로 들썩였다. 잡스가 지구촌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불러일으킨 혁명적 변화를 고려한다면, 이런 반응은 과하지 않다. “이 세상은 경이로움을 지닌 한 인간을 잃었다”는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의 헌사를 떠올리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죽음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지만, 산 사람의 삶은 계속돼야 한다. 잡스가 남긴 것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다르게 생각하라”는 모토를 쉼없이 현실에 구현해온 잡스는 혁신의 구루이자 자존과 자애의 힘을 실증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잡스는 자신의 구상에 반기를 들거나 그 구상을 구현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이들을 가차없이 내쫓은 비타협의 ‘폭군’이기도 했다. 10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재산을 갖고도 기부를 멀리 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래서 우리는 잡스의 삶에서 연대와 나눔 따위 ‘더불어 살기’의 미덕을 발견할 수 없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삶을 지배해온 자본주의의 엔진은 단연코 경쟁이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은, 지구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경쟁만으론 유지될 수 없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인 크로포트킨이 갈파했듯이 상호부조 또한 경쟁과 쌍벽을 이루는 ‘자연법칙’이다. 상호부조 없는 경쟁은 무한 폭주하며 생명을 짓밟는다. 오죽하면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자본주의적 시장 메커니즘을 ‘악마의 맷돌’이라 했겠는가.
잡스가 유능한 강자였다면, 이제 만인의 공적이 되어버린 월스트리트의 금융투기꾼들은 ‘무능하고 탐욕스런 강자’다. 그들은 파생상품으로 지구 경제를 위기에 빠뜨려 미국 연방정부의 천문학적 구제금융 덕에 구사일생하고도 돈방석에 앉아 성과급을 즐긴다. “월세와 끼니 걱정 없는 아침을!” “금융권의 탐욕과 부패를 심판하라.” “우리 99%와 그들 1%의 싸움이다.” “평등, 민주주의, 혁명!” 뉴욕 월스트리트에 메아리 친 시위대의 절규를, 금융투기꾼들은 베란다에 여유롭게 기대 샴페인을 마시며 모멸한다.
월스트리트의 금융투기꾼들을 혐오하면서도 잡스는 ‘경배’하는 우리들 마음의 심연을 들여다보자. 우리, 유능하지도 강하지도 못하면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세상을 바라는가. 월스트리트의 시위대는 ‘1% 체제’를 문제 삼는다. 닭장 속 여우처럼 무제한 자유를 누리는 탐욕스런 한 줌 사익추구자들에게 정부와 사회가 납치돼 ‘공공 기능’이 질식사 직전으로 내몰린 현실을 겨냥한 외침이다. 세상은 치명적으로 나빠지고 있다. 지구촌 시민들이 “함께 점거하자”(Occupy Together)는 미국 젊은이들의 시위에 적극 호응하고 나선 이유다.
한국에서는 부산 영도조선소의 85호 크레인에서 김진숙이 280일 넘게 바닷바람을 맨몸으로 견디며 절규한다. 요구사항은 단 하나다. “함께 살자!” 계절이 세 번 바뀌고 희망버스가 5차례나 오가도 정부와 자본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의 수많은 김진숙들이 제 풀에 지쳐 포기하기 바라는 것일까. 절망이 희망을 잡아먹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그러나 희망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삶을 포기할 수 없으니 희망도 버릴 수 없다. 생각해본 적 있는가. 인류가 세계대전의 참화를 딛고 정초한 세계인권선언의 진짜 이름이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보편적 인권선언)인 까닭을. 그 선언이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제1조)로 시작하는 이유를. 역사 이래로 많은 이들이 혈통과 국적, 직업 따위를 이유로 사람의 평등을 부정해왔다. 지금도 ‘능력이 천차만별인데 어떻게 평등하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러나 단언할 수 있다. 사람은 평등하다고. 사람은 굶으면 죽고, 차별당하면 상처받는다. 그러므로 고통의 이름으로 사람은 평등하다. 우리, 자문하자. 내가, 가족이, 연인이, 친구가 굶주리고 차별당해도 태연할 수 있는지. 역지사지(易地思之)는 만인의 윤리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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