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바보상자’를 산 것은 실수였다

등록 2004-01-08 15:00 수정 2020-05-02 19:23

진정한 인간적 가치보다 ‘적대적 타자 만들기’를 교육하는 텔레비전 중독의 결과들

필자는 한국에서 살 때 직장에서 가끔 텔레비전을 보기는 했지만 집에는 ‘바보상자’를 아예 두지 않았다. 차라리 독서를 하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낫다는 믿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 국내 텔레비전의 수준을 아쉽게 여기는 면도 있었다. 뉴스에서 유죄 판결도 나지 않은 경찰에 검거된 시민을 범인인 양 포승에 묶여 고개를 숙인 채로 보여주는 것이나 향락과 허영심을 부추기는 프로그램들과 광고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사극에서 왕과 왕비들은 많이- 그리고 왜곡되게- 등장해도 수많은 일반 백성은 아역 이상 되지 않는 모습 등을 보면서 텔레비전 살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방송의 식민지 백성’으로

그러나 노르웨이에 와서는 언어도 익혀야 하고 사회에 대한 정보원도 필요하기에 텔레비전을 샀다. 더군다나 필자가 사는 오슬로 지역에서 노르웨이 방송뿐만 아니라 스웨덴과 영국, 그리고 일부 미국 채널까지 시청할 수 있기에 말이다. 그리고 아직 두살이 채 안 된 필자의 아이가 나중에 노르웨이어를 익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 방송 채널을 어느 정도 알게 된 이 시점에서 기대보다 우려가 앞선다. 언어 습득에 도움이 될는지 모르지만 아이가 노르웨이 ‘바보상자’의 이미지들을 보면서 과연 어떤 영향을 받을지 의문이 가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북구 방송의 폐단은 구체적인 모습은 달라도 그 태심함은 어쩌면 한국 이상일 것이다.

텔레비전에 대한 대중적 중독의 전체적 모습은 한국, 노르웨이, 미국이 크게 다르지 않다. 성인의 하루 평균 텔레비전 시청량은 노르웨이에서 약 3시간30분, 미국에서 4시간, 한국에서 2시간30분(일요일에는 3시간40분)이다. 그 이유는 한국이 서방보다 노동시간과 필연적 사회자본 축적(회식 등등)에의 투자시간이 더 길고, 노르웨이 사람들이 미국인보다 독서시간이 더 길다는 등의 지역적인 특성들도 나타나지만, 크게 봐서는 방송 자본에 의한 ‘여가의 식민화’ 현상이 똑같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방송의 ‘식민지 백성’으로 자라는 것은 어릴 때부터다. 미국의 경우 평균적으로 한살 된 유아는 이미 일주일에 약 6시간 동안 은색 화면에 붙어 있다(이 나이에 텔레비전을 시청하면 시력 감퇴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서구에서 10대가 되면 텔레비전 앞에서 보내는 시간은 일주일에 거의 20시간으로 늘어난다. 초등학생들은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텔레비전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텔레비전 시청은 ‘없으면 절대로 안 될’ 식사나 잠과 같은 일과의 일부분으로 자리잡고 인기 프로그램을 모르는 아이는 친구 사이에서 왕따당하기 십상이다.

텔레비전의 영상이 아이들 언어의 근간이 되는 상황에서 텔레비전의 이미지들을 모르는 것은 언어 불통, 즉 ‘절대적 타자되기’를 의미한다. 북한을 지원하는 노르웨이 적십자사의 현지 파견원의 입장에서 ‘주체사상’을 하루 3~4시간 동안 학습하지 않으면 안 될 북한의 학생들이 불쌍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보인다면, ‘바보상자’를 보지 않으면 그 결과로 평생의 상처를 받을 수 있는 노르웨이 아이들은 과연 자유인으로 자라고 있는가?

여기쯤 되면 아마도 텔레비전 시청이 아이의 인성 계발에 그렇게까지 장애가 될 일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공영방송에서 광고가 금지되고, 미국과 달리 유아를 위한 특수 프로그램의 비율이 그대로 유지되거나 늘어나는 노르웨이 텔레비전은, 전국민의 우민화를 목적으로 하는 이탈리아나 러시아의 텔레비전과 비교하자면 꽤나 건전해 보인다. 이탈리아는 미디어 재벌 베를루스코니가 총리가 된 상황에서 섹스와 스포츠 위주의 민영 텔레비전이 지배하고, 러시아는 라는 제목의 체첸 독립군 토벌에 관한 선전적 국책 영화가 청년층의 인기작품으로 떠오르고 있는 현실이다.

점점 심화되는 영상의 폭력화

그렇다고 해서 노르웨이 방송에 교육자의 역할을 맡겨도 될까? 영화산업이 취약해 자국 제조 영화들의 시장점유율이 10%도 안 되는 노르웨이에서는, 텔레비전의 대다수 유아 시청용 만화는 미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만든 ‘국제적 주류 작품’들이다. ‘악당 징벌’ ‘목숨 건 사투’ ‘사활 건 경쟁’은 이들 만화의 주된 주제에 속한다. 미국의 평범한 액션영화 정도면 노르웨이 채널만 해도 일주일에 몇번씩이나 구경할 수 있다. 화면에서의 폭력이, ‘현실’과 ‘연출’을 뚜렷하게 구분할 줄 모르는 4~5살의 아이들에게 과연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필자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자면 영화상의 전쟁에서 ‘죽은’ 군인이 하도 불쌍해서 눈물을 흘린 일이 기억나고, 텔레비전에서 하도 자주 구경해온 ‘소련군과 파시스트 독일군의 전쟁’을 모방해서 폭력적인 전쟁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친구들도 기억난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의롭고 멋있는’ 폭력의 모방만이 문제인가? ‘악당 징벌’을 주된 테마로 하는 만화나, 처럼 제국주의적 살육인 제2세계 전쟁을 극도로 낭만화 또는 미화하는 교묘한 선전 영화를 보고 자란 아이라면, 전쟁이 의로울 수 있다는 제국주의의 신화를 믿을 확률이 크다. 즉, 미 제국이 이라크 다음 타깃을 찾아 또 새로운 제3세계 주민들을 대량으로 살육할 때, 그들에 대한 폭격을 마치 재미있는 온라인 게임처럼 보여주는 뉴스를 시청할 필자의 아이로부터 “아빠, 저것 봐. 아군이 악당들을 잘 때려 부숴버리잖아!”와 같은 소리를 들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의사협회(AMA)가 1976년에 “영상 폭력이 아이들의 건강에 해롭다”는 내용의 결의를 채택했어도, 미국의 여론조사 응답자 중 73%가 “텔레비전 폭력이 청소년 범죄를 부추긴다”는 반응을 보여도, 영상의 폭력화는 해마다 점점 심화되기만 한다. 전문가들의 의견과 민심에 대한 이와 같은 국가·자본의 무시는 미국이 전 세계에 확산시키겠다고 큰소리치는 ‘민주주의’의 내용인가.
그런데 18살이 될 때까지 서방세계의 평균 청소년이 봐야 할 약 1만6천건의 화면 속에서의 살인 장면만 문제가 아니다. 긴장감과 역동성으로 인해 소년·소녀·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높은 스포츠 프로그램이 주는 영향은 무엇인가? 경합하는 양쪽이 하나의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승패보다 전체의 흥 돋우기에 더 열중했던 전통시대의 씨름과 같은 마을놀이와 달리, 오늘의 산업화·프로화된 스포츠는 말 그대로 ‘경쟁’ ‘승자 독식’(winner-takes-all) 구조의 상징적 표본이다. 근대적 스포츠에서 경쟁자는 그야말로 밟고 올라가야 할 대상물, 즉 ‘적대적 타자일 뿐이지 인간적인 연대를 느낄 존재는 아니다.

스포츠 프로그램이 가르치는 것

신자유주의자들이 찬양하는 ‘합리적 시장의 모델’을 꼭 닮은 이 스포츠 프로그램에 열중하면서 자란 아이는 포용·양보·지족(知足)·연대 등의 진정한 인간적 가치를 잘 배울 수 있을까 더군다나 스포츠 프로그램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은 국가 대 국가 항전 식의 국제 경합이 아닌가 ‘우리’와 ‘남’의 전력전을 보고 자란 아이는 나중에 국가에 대한 자신의 소속감이 자연발생적 정서가 아니라 지배층의 헤게모니 전략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칼이 수술의 도구로도 범죄의 흉기로도 동시에 이용될 수 있는 것은 사물의 이치이며, 문명 이기들을 인류 야만화의 흉기로 사용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비행기라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은 반대편에서는 폭격기의 모습으로 제3세계 피침 지역 주민들의 악몽이 되고, 우주 인공위성은 펜타곤의 세계 통제와 침략의 주된 도구 중 하나가 되었다.
텔레비전도 마찬가지다. 만약 서방의 주요 방송채널들이 하룻동안이라도 서구·미국·일본·한국 등의 남성 관광객의 성적인 만족을 위해 12살 나이에 빈민 부모의 품을 강제로 떠나 인신매매와 성폭행을 당하는 타이 소녀들의 눈물이나, 월드컵 등의 ‘우리’의 축제에 사용되는 축구공을 만드는 인도·파키스탄 어린이들의 손 등 이 세계의 진짜 모습을 대중매체들이 제대로 보여주었다면 자본주의라는 세계적 흡혈 체제의 지지 기반이 과연 오래갔을까?
그러나 오늘의 텔레비전은 자본 논리에 따라 자본 제국의 선량한 ‘황국신민’을 만드는 것이지, 체제로부터 독립할 줄 아는 개인을 만들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바보상자’를 산 것이 실수였다는 생각은 자꾸 든다.

[참고 사이트]
1. 아이들의 텔레비전 시청의 해로움을 설명하는 사이트: http://www.tvturnoff.org
2. 미국의 가족과 미디어 연구소: http://www.mediafamily.org/
3. 미국의 국립 소아과의학 아카데미의 영상 폭력에 대한 선언서: http://www.aap.org/advocacy/releases/jstmtevc.htm
4. 아이들에게 미치는 미디어의 영향 종합 분석: http://www.aap.org/family/mediaimpact.htm
5.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분석: http://www.mediawatch.com/

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 편집위원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