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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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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보수적 개혁가’였다

등록 2003-11-20 15:00 수정 2020-05-02 19:23

박정희식 교육과 민중적 지식인들에 의해 덧칠된 동학…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시 보자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역사에서 해석자의 개인적 희망의 투영은 큰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 주민들을 학살·노예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극우 정치인 부시는 콜럼버스를 ‘문명의 영웅’으로 해석하고, 인디언 피가 섞인 베네수엘라의 좌파적 대통령 차베스는 콜럼버스를 ‘제노사이드’(종족 학살)의 원흉으로 본다. 신라 출신의 유교 우월주의자 김부식이 주축이 돼서 찬술한 (1145)에는 발해 역사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고 백제에 의한 일본에의 선진 문물 전수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다. 결국 신라의 경쟁자들은 따돌림을 당하고, 동아시아 불교계의 국제적인 스타였던 원효는 간헐적으로만 언급되고 열전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왜 박정희는 동학에 동질성을 느꼈는가

사실의 왜곡이 별로 없어도 그 사실의 취사선택만으로도 역사를 만든 사람이 무엇을 선언하고 싶었는지 느낄 수 있다. 현재 우리 입장에서 고구려나 발해를 ‘중국의 소수민족 국가’로 여기려는 중국, 김일성 가문의 혁명활동을 한국 근현대사의 핵심으로 삼으려는 북한, 식민화를 근대화의 은혜로 보려는 일본 우파 등의 모습은 못마땅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과거 해석은 과연 이해와 이념적 지향성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예컨대 여태까지 국사 교과서에 ‘반봉건적·반침략적, 근대 지향적 민족운동’으로 규정된 동학 농민운동을 다른 눈으로 볼 수는 없을까

동학과 ‘민족·국민·근대’ 등의 상징들을 남한에서 처음으로 연결시킨 집권자는 다름 아닌 박정희였다. 그의 계산은 단순했다. 일본의 황국사관을 내면화한 박정희에게 전통적 유교와 조선왕조는 ‘문약(文弱), 무능, 붕당 정치’의 권화이었으며, ‘무능한 문신(文臣)’들을 뒤엎으려는 정치적 세력들은 ‘선’(善)이었다. 자신의 쿠데타와 비슷한 방식을 택하고 일본과 손잡은 갑신정변의 주도 세력들에게 가장 호감이 갔지만, 본인과 5·16 군사혁명의 동지 대다수가 농민 출신이라는 점에서 동학과도 동질성을 느낄 수 있었다.

남로당 동지를 판 박정희로서 진정한 영웅 전봉준(1854~95)의 후광을 입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조국 근대화’를 집권 군벌과 재벌, 외국 자본의 프로젝트가 아닌 ‘국민의 희망’으로 호도할 필요가 있었는데, 국민의 근대화 지향을 부각하기 위해서 ‘근대’란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던 동학 농민들의 운동을 ‘민중의 근대화 지향’으로 그렸다. 1920~30년대의 극소수의 지식인만 썼던 ‘동학혁명’이라는 용어는 바로 박정희 집권기에 보편화됐다. 동학의 ‘국민 생활 근대화 의지’를 기리는 황토재(동학군이 1894년에 관군을 격파한 곳), 우금치(동학군이 1894년에 관군·일군에게 패배를 당한 곳)의 기념탑들도 차례로 세워졌다.

어용학자들은 동학의 근대성을 찾는 데 열을 올렸고 반체제적 성향의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은 동학의 반침략·반봉건적 면을 열성적으로 강조했다. 1960~80년대의 민중 지식인에게는 동학이 박정희식의 외자 의존적·폭력적 근대화에 저항하는 ‘민중정신’을 뜻했다. ‘민중의 시문학’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신동엽(1930-1969)의 유명한 서사시 ‘금강’에서 전봉준은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동학은
현실개조의 종교요.
자기혁명, 국가혁명, 인류혁명,
이게 바로 동학의
삼단계 혁명 아니오? (…)
이대로 더 둬보오.
십년도 못 가서
강산은, 일본 아니면
청국 아니면 어딘가의
밥이 될 게요.”

불타올랐던 동학의 ‘종교적 열성’

동시대의 문서에 의해서 복원되는 가난한 선비 전봉준은 개화의 세례를 받지 못해 ‘개조’ ‘종교’‘인류혁명’과 같은 일본 메이지 계통의 신조어(유럽 개념의 번역어)를 알 리 만무했다. 그리고 대원군의 밀지에 따라 청국군과 협력하여 일본군을 축출하려고 1894년 9월 2차 봉기를 일으킨 전봉준에게는, 전통적인 ‘문명중심’인 중국과 ‘왜이’(倭夷·일본 오랑캐)가 동질적인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중을 지향하는 지식인들의 붓에 의해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국태공’(대원군), 고종에 대한 충성심을 내세웠던 전통적인 양심적 지식인 전봉준은 ‘인류혁명가’로 변모되었다.

동학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보면, 박정희·전두환 시대 교과서의 ‘애국·애족·근대적 동학혁명’과 1960~80년대 민중적 지식인들이 그린 ‘민중적 혁명가로서의 동학’이 혼재돼 있다. 이 모든 거대 담론의 색안경을 벗어난다면 과연 동학 봉기의 동시대적 모습은 어떤 것일까 다양한 의미들을 지닌 수많은 모습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동학을 정치 일변도(순국영령, 민중혁명가 등의 정치 위주의 평가)로 보는 우리들이 쉽게 망각하는 동학의 불타는 종교적 열성이다. 모든 인간들이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은, “性相近也 習相遠也”(타고날 때 모든 사람들이 가깝지만 살면서 익힌 습관으로 멀어진다)라는 명언을 에 남긴 원시 유가나 “일체 중생들이 다 불성(佛性)을 함유한다”고 보는 대승불교도 마찬가지였지만, 19세기 말 조선에서 이 두 가르침은 수직적인 사회 위계질서에 편입되고 만 상태였다. “한울님의 마음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깨우친 가난한 시골 선비 최제우(1824∼64)와 그 제자들은, 유학자도 스님도 실천하지 못한 그들 종교의 원리원칙을 몸으로 실천했다.

유학자 사이에서 문벌·적서(嫡庶)에 의해 철저한 서열이 정해졌고, 스님들의 사유(私有)를 허가해주는 조선 말의 사찰에서도 땅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평등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학에 입교하기만 하면 신분이나 나이 구분 없이 서로 ‘접장’(接長·현대식으로 형이나 선배)이라고 부르며 예의로써 대접하는 것은 한반도로서는 그야말로 커다란 종교적 진보였다. 그러나 ‘평등’이라면 사회·정치적 평등을 생각하는 우리 현대인의 상상과 달리, 동학의 평등은 종교적 원칙 내지 종교집단 내의 관계를 의미했다. 최제우는 “유교의 운이 다 끝났다”고 주장하면서도 사회 전반에서는 수직적 관계를 원칙으로 하는 삼강오륜의 중요성을 부각했다. 민초까지 유교화된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봉건제도 깨뜨리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또 하나는, 민중봉기가 다 그렇듯 1894년 동학봉기도 쌓일 대로 쌓인 민초들의 원(怨)이 풀어지는 장이었다. 살인하지 말라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탐관오리나 이서배(吏胥輩·하급 관료)들이 처단되고, 양반들이 모욕당하고, 노비문서들이 소각됐다. 황현(1855~1910)이 그의 동학 관련 저술인 에서 동학을 “사족을 모욕하고 고급 관료를 조롱하고 하급 관료를 포박하는(辱士族 嘲罵官長 縛束吏校) 무리”라고 부른 것은 당시의 분위기를 전한다.

그러나 봉건제도를 제대로 깨뜨리려는 움직임은 크게 보이지 않았다. 동학은 양반 지주의 땅을 빼앗아 균등하게 나누려 하지 않았으며(유력한 접주 중에는 중소 지주들도 꽤 있었다), 기존의 행정제도를 마비하지 않았으며(유명한 집강소들은 수령들과 아전을 감시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조선왕조에 도전하지도 않았다(새 왕조를 건설하려는 세력은 김개남 등 일부 소수파였다). 그 당시의 ‘주류’인 관료·유생이나 집권 개화파로서는 동학이 ‘역적’이었지만, 현재의 척도에서 그들은 부정부패 척결을 중심으로 한 개혁안을 내세운 보수적인 개혁가들이었다.

변혁세력의 역사적 근거 찾기 차원에서 동학을 ‘민중혁명가’로 그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있을 수 있는 자기확립의 방법이다. 그러나 민중적으로 미화되지 않아도 평등의 전도사 최제우·최시형, 반부패 항일 의거 지도자 전봉준 같은 영웅들은 우리에게 충분히 많은 영감을 준다. 양반의 갓을 빼앗아 쓰고 다니고, 아이들까지도 ‘접장’으로 존대했던 동학 농민들이 서구적 ‘근대’를 지향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심성과 행동을 충분히 배울 수 있지 않는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 편집위원

[ 참고 자료 ]

1. 충남대 박찬승 교수의 홈페이지(동학 관련 논문 모음 있음): http://cuvic.chungnam.ac.kr/~phistory/
2. 박찬승 교수의 동학봉기 지도부 분석: http://cuvic.chungnam.ac.kr/~phistory/articles/donghak/1leader.htm
3. 박찬승 교수의 동학봉기 종합 서술: http://cuvic.chungnam.ac.kr/~phistory/articles/donghak/1894p.htm
4. 신동엽의 ‘금강’의 전문: http://my.dreamwiz.com/rahany/sdy-po-4.htm
5. 박명규 교수의 논문, : http://www.chendos.net/c3/34.htm
6. 박준성의 논문, : http://kilsp.jinbo.net/colloquium/col5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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