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size="2" color="663300">나치와 북한의 단순비교는 ‘학술’ 아닌 ‘사술’… 현실 사회주의에 악마성 씌우려는 의도 </font>
독일인 의사로 북한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하다 북한 체제 비판으로 추방당한 뒤 최근 남한과 미국을 무대로 “북한 체제 전복” “북한 주민 해방”을 부르짖으며 이색적인 행동으로 자주 스캔들을 일으키는 폴러첸(Norbert Vollertsen)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 그는 북한 체제를 ‘나치 정권’과 비교하고 그 체제에 ‘전체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곤 한다. 북한에 대한 어떠한 포용책도 히틀러에 대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의 영국·프랑스 등의 일관성 없는 유화정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 동독의 멸망이 대량 피난으로 시작되었듯, 북한 체제 붕괴도 중국으로의 대량 피난으로 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폴러첸은 나치 정권·옛 동독·북한은 동질적인 ‘전체주의’이며, 자신은 ‘전체주의에 맞서는 자유의 투사’로 여기는 듯하다.
사회과학 저서를 한번이라도 본다면…
북한을 포함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을 송두리째 나치와 동일하게 보는 것이 폴러첸뿐인가 냉전의 발발(1946~47년)부터 오늘날까지 소련식의 체제를 ‘나치식 전체주의’로 규정하고 ‘미국식 자유주의 사회’와 대조하는 것이 구미 보수언론들의 기본 논조다. 사회과학을 독자적으로 학습한 적이 없는 폴러첸이나 ‘악의 축’ 망발로 누명을 쓴 부시 현 대통령도 이 논조를 충실히 따를 뿐이다.
보수 신문이나 방송만으로 ‘상식’을 배우고 독서할 줄 모르는 부시와 같은 ‘지도층’으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최근의 사회과학 저서를 한번이라도 본다면-소수의 극우·우파 편향적 학자들을 제외한- 대다수 전문 학자들이 현실 사회주의의 억압성과 경직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과 나치를 동일시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는 용어의 사용 자체를 자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세계의 어떤 독재의 잔혹성을 강조할 때-특히 나치 독일의 파트너이던 일제 말기 총동원 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 개발 독재(1980년대 말 이전 남한·대만 정권)를 이야기할 때- ‘파시스트적’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그리고 ‘매우 억압적인 사회’라는 의미에서 ‘전체주의적’이라는 수식어도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사회학적 범주로서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요즘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보수언론들이 반세기 넘게 이용해온 ‘전체주의’ ‘나치와 소련 사회주의 동질론’등의 담론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학술적인 입장에서 어떤 결함을 내포하고 있는지가 밝혀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기 때문이다.
냉전 초기인 1940년대 말~50년대 초, 당시 미국 사회과학 학계에선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나타났다. 미국 학계에 새로운 역동성을 가져온 독일계의 자유주의적 망명 지식인들은 그들의 고향 독일이 왜 파시즘과 전쟁을 맞이하는가에 대해 뼈저리게 고민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소련과 중국이라는 생소한 ‘미지의 세계’들이 미국의 주적이 됐기에 관(官) 주도의 ‘지역 연구’가 붐을 이루었다. 안보기관과 각종 재벌기금의 전례 없는 지원과 미 중앙정보국(CIA)과 국무성의 끈질긴 ‘지도’ 아래 1946년 콜롬비아대학의 러시아연구소, 1947년 하버드 대학의 러시아연구센터 등이 각각 설립됐다.
학생 시절부터 안보기관의 연구비를 받고 소련이나 중국을 인류의 숙적으로 알고 있던 ‘지역 연구기관’ 출신의 관 학자들에게는 공산주의의 본질적 악질성을 증명하는 이론이 필요했는데, ‘최고의 자유 지성’으로 인정받던 독일 계통의 망명 학자들로 인해 그 이론을 제공할 수 있었다. 비극적인 것은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지성인들의 고뇌가 생각지 않은 방향으로 이용당한 것이다.
공산주의의 악마화에 ‘황금의 기회’를 준 것은 독일계 유대인 여성 철학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75)가 발표한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이었다. 그 후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이론적 권위를 얻을 수 있었다. 정통 자유주의자 아렌트는, 자신을 망명객으로 만든 독일 파시즘을 ‘전체주의’의 모범으로 파악했다. 소련을 ‘전체주의 국가’의 명단에 넣었던 그녀는 1968년 을 재판(再版)할 때 “소련은 더 이상 전체주의 국가로 불리면 안 된다”고 명시하는 등 애써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볼셰비즘과 파시즘은 정반대였다”
그는 전체주의 사회의 특징으로 핵화(核化)돼 무기력해져 천편일률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기 꺾인 개인’ 등을 삼았는데, 이는 1950년대 초 소련 사회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웃 공동체가 아직 해체되지 않고 향촌 사회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완벽하지 않았던 당시의 소련과, 전통 공동체의 관계가 그대로 잔존하는 오늘의 북한에 ‘개인의 완전한 고립’과 같은 테제를 적용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녀에게 이 책은 주로 독일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가졌음에도 미국의 수많은 관학자들은 이 을 발판 삼아 현실 사회주의에 악마의 얼굴을 씌우기 시작했다.
이 일에 가장 앞장선 자는, 미국중앙정보국과 국방분석연구부(IDA)의 지원으로 운영되던 대표적인 ‘지역연구’ 기관인 콜롬비아대학교 부속 공산권문제연구소 소장이던 브레진스키(Zbigniew Brezezinski, 1928년생,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 보좌관이 됨)였다. 그의 (1965)에 따르면 소련 정권은 나치와 동질적이고, 무차별적 공포정치, 언론 완전 장악, 무력 수단, 국가의 철저한 경제 통제 등의 특징을 안고 있었다. 스탈린과 그 후계자들, 북한과 같은 ‘약소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의 실리주의적 대외정책, 스탈린 죽음(1953년) 이후 대사회적 억압은 지속돼도 ‘무차별적 공포정치’가 거의 종언을 고한 점 그리고 정부의 무기·경제·통신수단에의 관여 내지 부분적 통제가 대다수 근대국가들의 특징이라는 점 등은 철저히 무시됐다.
브레진스키류의 관 학자들에 의해 왜곡돼버린 아렌트의 ‘전체주의 이론’은 극우들에게 전가의 보도처럼 됐지만, 1960년대 말 좌파는 물론 실사구시적 접근법을 고수하려는 수많은 자유주의적 학자들은 노골적인 편향과 현실에 대한 무지로 점철한 ‘전체주의 담론’의 허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파시즘 연구자인 캘리포니아대학의 사우어(Wolfgang Sauer) 교수는, 자본주의의 선진화 과정에서 신분을 상실한 소시민적 낙오자를 중심으로 한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이라는 극우운동이 후진 지역의 선진화를 목적으로 하는 ‘좌파적 극단적 개발주의’인 볼셰비즘과 정반대 위치에 섰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학계에서 주류가 된 이 주장을 이론화한 학자는 폴란드 출신으로 현실 사회주의를 체험한 영국 리즈대학교의 바우먼(Zygmunt Bauman) 교수였다. 그에 따르면 선진 지역의 ‘천민 극우 근대주의자’인 파시스트들이 식민지에서 대량학살 경험을 유럽에 이식시켜 홀로코스트 등을 저질렀고, 후발 근대화 지역의 볼셰비키 등의 ‘좌파적 근대주의자’들은 대중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전통적 기제들(조국사랑, 지도자의 가부장적 이미지 조작, 간부층과 노동자층의 대가족적 관계 강조 등)을 이용해 상당히 공고한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독재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상당수 학자들의 북한 사회 이해 역시 ‘전통주의적 기제들과 일부의 일제 시대의 통제 메커니즘을 이용하고 근대 주권국가 건설·방위를 강조하는 개발주의’ 학설을 중심으로 한다. 물론 북한 사회가 일제 말기의 총동원 사회로부터 이어받은 일부분의 파시스트 연한 요소(육탄정신 찬양, 천황제를 이은 듯한 수령제의 종교화 등)를 내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전체주의 담론’에 대항하는 길은
그럼에도 소수 우파 학자를 제외한 대다수는 역사적 형성 과정과 정통성 부여 방식, 대외정책 방향이 이질적인 나치 독일과 북한을 전면적으로 단순비교하는 것을 학술로 보지 않는다. 문제는 구미 지역의 주요 보수언론들이 극우의 구시대적 견해를 십분 활용하면서 ‘전체주의’와 같은 수사적 어휘를 마치 학술용어인 듯 구사하는 데 있다. 결국 40~50년 전 미국중앙정보국 지원으로 만들어져 언론자본에 의해서 계속 재생산되는 전체주의의 담론이 지금 폴러첸의 모험주의적 대북 행동과 부시의 세계적 횡포를 받쳐주고 있는 것이다.
전체주의 담론에 대항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접근은 무엇인가 북한 사회의 구성요소들을 구체적으로 해석, 규명해 북한 사회의 성격에 대한 객관적 정론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북한 사회를 이끄는 ‘극단적인 좌파적 근대주의’의 기원이 규명되는 동시에, 북한식 ‘합의 독재’와 ‘위로부터의 근대화’의 어두운 면도 과감하게 밝혀져야만 한다. 전체주의 담론을 붙잡는 극우들이 북한 인권 문제를 비방의 도구로 이용하지만, 남북의 민중 모두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한 20세기 근대주의에 대한 남북의 경계를 초월하는 해부·해체 작업이야말로 ‘민중을 위한 21세기’를 열어갈 수 있게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1. Zygmunt Bauman, <stalin and the peasant revolution: a case study in dialectics of master slave>, Leeds Occasional Papers in Sociology, Vol. 19, 1985.
2. Zygmunt Bauman, <modernity and ambivalence>, Cambridge: Polity Press, 1991.
3. Peter Beilharz, “Modernity and Communism: Zygmunt Bauman and the Other Totalitarianism”, <thesis eleven>, No. 70, August 2002, 88-99.
4. Bruce Cumings, <parallax visions: making sense of american-east asian relations>, Duke University Press, 2002.
5. Carl Friedrich and Zbigniew Brezezinski, <totalitarian dictatorship and autocracy>, 1954.
6. Wolfgang Sauer, “National Socialism: Totalitarianism or Fascism” -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Vol. 73, No. 2, December 1967, 404-424.
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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