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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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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투르크메니스탄!

등록 2003-08-21 00:00 수정 2020-05-03 04:23

전통왕조 능가하는 대통령 소유의 가산(家産)국가를 미국이 못 본 체하는 이유는…

1970~80년대에 한국의 정치·사회 학계에서는 사회의 문제점을 분석하기 위해 베버(Max Weber)의 이론들을 연구하는 이들이 많았다. 베버는 전통사회의 여러 지배 형태 중에서 고대 이집트나 중국 등의 ‘동방 문명’에 해당하는 것이 ‘가산제(家産制) 국가’(patrimonial-prebendal state)라고 생각했다. ‘가산제’란 국가가 한 왕이나 왕조의 사유물이 되어 국가가 아닌 왕조와의 추종 관계를 맺고 봉사하는 유사 관료제를 의미한다.

‘가산제 국가’를 누가 양산했는가

1970년대의 한국의 일부 사회·정치 학자들이 조선왕조를 하나의 ‘가산제 국가’로 해석하면서, 전제주의를 방불케 하는 유신 체제를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1980년대 이후에 똑같은 분석틀이 북한의 ‘왕조국가’의 해부에 동원됐다.

오늘날 사회과학의 입장에서는 베버의 분석방법을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개인의 자유와 재산이 보장돼 있지 않은 ‘동방의 가산제 국가’와 사유제도가 발달한 유럽의 ‘봉건제’를 대조시키려는 베버의 숨은 서구 중심주의적 의도가 있었다. 더군다나 중국왕조나 조선왕조의 경우에 방대한 법 체계도, 통치자 개인의 의향을 초월하는 유교적인 공적 규범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즉, 비(非)서구 지역의 ‘정체성’과 자본주의 발전의 ‘실패’를 ‘가산제의 본래적 한계’로 설명하려 했던 베버의 오리엔탈리즘적 모델은 더 이상 ‘학술’로서 대접받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베버의 ‘가산제’ 모델을 제한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베버가 묘사한 개인 자유와 재산권 박탈의 경직된 통제사회가 바로,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서 식민화된 세계 체제의 주변부에서 실제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네덜란드의 무력에 의해서 식민화되고 주변화된 인도네시아 농민들에게는 1870년까지 재배물의 선택권마저 없었다. 거기에다가 국가 직영의 차 농장에서 해마다 일정 기간 동안 무료로 노동 봉사(부역)를 치러야 했으며, 촌장이 발행하는 여행증서 없이는 이웃마을에 갈 권리마저 없었다.

베버는 ‘자유로운 서구’와 ‘노예적인 동방’의 가산제 국가를 대조시키지만, 실제로는 바로 그 ‘자유로운 서구’가 세계 체제의 주변부에서 ‘가산제 국가’ 형태의 인권 부재의 통제사회들을 양산한 것이다. 베버가 이야기했던 ‘가산제 국가’와 19세기 네덜란드 식민 통치하의 인도네시아의 유일한 차이는, 인도네시아를 특정 왕조가 아니고 네덜란드 국가와 네덜란드 무역회사(NHM)가 개인재산처럼 소유했다는 것이다. 식민주의자들이 그들에 의해서 주변화된 지역에서 개인들의 재산권과 인신 자유를 부정하는 사례는 철도 건설에 조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철도 부설 지역에 있는 농지를 무보상으로 몰수했던 일제의 한반도에서의 행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왜 ‘가산제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서 장황하게 늘어놓는가? 2001년 7월9일치 는 북한을 ‘세계 최악의 국가’로 지정했다. 국가가 의료나 교육 서비스라도 제공해주는 북한이 그런 제공조차 전무한 콩고와 같은 나라보다도 더 ‘나쁜’ 이유는 무얼까? 북한에 대한 집중적인 ‘악마화’ 작전을 펴고 있는 미국 매체들이 서술하는 북한 사회는 베버가 묘사했던 ‘동방의 가산제 국가’와 대단히 흡사하다. 그들의 북한 관련의 묘사법을 보면 베버식의 19세기 유럽 오리엔탈리즘을 그대로 모방한 듯하다.

물론 북한 사회가 일제·소련의 통치술을 계승한 만큼 높은 수위의 억압 사회를 유지하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북한의 통치집단은 근대적 개인 인권의 의식이 미비하고 일제·소련식 국가주의의 기념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체제와의 거리를 유지해야 할 만큼 봉쇄를 당한 북한은 국가의 공적 기능의 활성화를 통해서 공민적 통합을 최대화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해왔다.

북한, 최악의 국가?

또한 1990년대의 동구 몰락 이전의 북한 의료나 교육은 아시아에서 상당 수준에 올라 있었다. 반대로 세계 체제에 편입돼 중심부의 무력에 기대는 주변부 종속국가의 경우 오히려 통치집단의 사리사욕이 거의 국가의 공적 기능을 마비시킬 정도로 비대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근대적 관료제와 시민사회가 이미 상당 수준으로 발전된 1980년대의 한국과 달리 견제 장치들이 거의 발동되지 못하는 주변부의 자원수출국들이야말로 현대적 ‘가산제 국가’의 표본을 보여준다.

미국 언론들이 북한을 “자유가 가장 없는 사회”로 지목했지만 북한 정도의 최소한의 복지제도를 갖추지 못한 미국의 종속국가들은 북한과 흡사하거나 어쩌면 더 심한 수준의 사상·교육·종교 통제를 실시할 수 있다. 그 예로, 소련의 몰락 이후 독립을 맞이한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를 보자.

인구 480만명의 투르크메니스탄은 세계 4위의 자연가스 매장량을 지닌 에너지의 새로운 메카다. 미국도 앞으로 투르크메니스탄의 가스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하는데 현재로서 투르크메니스탄의 가스를 구매하는 주고객들은 우크라이나와 이란, 앞으로 25년 동안 5천억달러어치의 가스를 사려고 하는 러시아다. 투르크메니스탄처럼 비교적 작은 인구와 거의 무제한적 가스자원을 갖고 있다면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이 현지 주민들을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중산층으로 상상할 만도 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이다. 수도 아스카바트에는 웅장한 건축물들이 즐비하지만, 투르크메니스탄의 대다수 피지배민들은 10~30달러 정도의 평균 월급을 받고 겨우 생계 유지를 한다. 가스의 수출 증가로 국내 총생산의 수치상 성장률이 최근 연례 15~16% 정도를 유지함에도 불구하고, 젊은층의 실업률은 실제로 30~40%에 이른다. ‘에너지 천국’에서 가난과 일터 부족의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가스 등의 수출로 벌어들인 돈의 상당 부분이 국고 대신에 그 국고를 능가할 정도로 큰 최고 통치자와 그 측근들의 해외 계좌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국내 외환 보유고보다 몇배나 많은 약 500억달러로 추정되는 자원수출 대금을 극소수의 통치집단이 해외로 은닉하였다는 것은 망명 중인 전직 투르크메니스탄 외무부 장관의 주장이다(http://www.erkin.net/analytics/nakanune.html). 외환 보유고가 18억달러에 불과한 나라에서는 이는 말 그대로 천문학적인 숫자다.

북한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국민들에게 기본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지만, 수치상 계속 부유해지는(?) 투르크메니스탄의 통치집단은 오히려 구소련 시절부터 있는 사회 서비스를 계속 삭감하고 있다. 예컨대 지난해에 5년이었던 대학교육의 기한이 돌연히 2년으로 단축됐다. 2년만 공부하고 그 뒤에 2년 동안 현장 실습만 한 외과의사에게 웬만큼 상식이 있는 환자가 몸을 맡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치료를 받으러 외국에 나가려면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특별 출국 비자를 신청해야 하는 투르크메니스탄 주민들에겐 선택이란 없다.

투르크메니스탄은 형식상 ‘공화국’으로 돼 있지만 최고 통치자인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Saparmurat Niyazov·그의 공식 명칭은 ‘투르크멘바시’, 즉 ‘모든 투르크메니스탄 사람의 아버지)라는 구소련의 공산 관료가 종신제 대통령으로 돼 있다. 외빈 앞에서도 ‘임금님’인 니야조프에게 큰절을 올리고 무릎을 꿇는 투르크메니스탄 각료들의 태도는 전통왕조를 능가할 정도다. 도금 40m의 동상과 신문이나 방송에서 ‘하늘이 내려주신 예언자’로 칭송되는 니야조프는, 유일 정당인 ‘투르크메니스탄 민주당’의 원수로서 꼭두각시 국회의원들을 직접 임명하며 대중매체의 내용을 지도한다.

그곳은 ‘공화국’이 아니다

마약거래 조직들이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 체제에 상납금을 바치는 이상 청소년들의 40%에 달하는 마약중독률에 아랑곳하지 않지만, 일반인의 경우에는 다른 마을로의 여행조차도 통제된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민주 인사들에 대한 학살과 고문도 체제를 향한 불만의 폭발을 억제하기가 힘들다. 독재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지난해 대통령 암살 미수 등의 사건으로 표현됐지만, 러시아나 미국이 가스거래를 위해 무기를 공급해주고 독일 은행이 니야조프의 자금을 계속 은닉해주는 한 니야조프의 왕국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투르크메니스탄과 같은 주변부의 종속된 기형적인 ‘가산제 국가’들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미국 언론들이 주로 북한과 같은 반미적 성격의 국가를 ‘인권 비판’의 타깃으로 삼는 유일한 이유는 다가올지 모를 대북 침략에 대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다. 미국의 이런 여론몰이에 열심히 들러리 노릇을 하고 있는 국내의 극우매체들은 이 사실을 과연 이해하고 있을까? 그들의 오늘날의 친미 부역 행위가 미래의 후손들에 의해서 어떻게 평가될지 심사숙고하기를 바란다.

참고 자료:

1. 캐나다 구엘프 대학교의 바케르 교수의 19세기 인도네시아에서의 “유사 가산제 국가”의 분석: http://www.uoguelph.ca/~vincent/hbakker/patrimonialism.htm

2. 우파 편향적 영국의 북한 전문가 애이단 포스터 카터의 칼럼, “북한, 최악의 국가”:

http://www.atimes.com/koreas/CG14Dg03.html

3. 투르크메니스탄과 러시아의 가스거래에 대한 분석:

http://www.eurasianet.org/departments/insight/articles/eav041503.shtml

4. 1999년의 투르크메니스탄 인권 상황 관련 보고(러시아어):

http://www.memo.ru/hr/politpr/cntrasia/turkm2/index.htm

5. 니야조프의 개인 독재를 조롱하는 러시아 신문 지 기사(러시아어, 2000년 1월21일):

http://www.memo.ru/hr/politpr/asia/turkmenistan/nijazow.htm

6. 러시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전직 외무부 장관 아브드 쿨리예프와의 장문의 인터뷰 (러시아어):

http://www.memo.ru/hr/politpr/asia/turkmenistan/kuliev1.htm

http://www.memo.ru/hr/politpr/asia/turkmenistan/kuliev2.htm

7. 투르크메니스탄의 사회 상황에 대한 2002년 보고서(러시아어):

http://www.memo.ru/hr/politpr/asia/turkmenistan/tu021202-1.htm

8. 투르크메니스탄 재외 활동가들의 반(反)니야조프 운동의 웹사이트:

http://www.erkin.net/english.html

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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