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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뿌리는 너무나 깊다

등록 2003-09-07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size="2" color="663300">그 억압의 구도가 단순한 일제 잔재일까… 하원호 교수의 ‘박노자 비판’에 답함 </font>

최근 필자의 ‘한국사 다시 쓰기 작업’을 비평한 하원호 성균관대학 동아시아 학술원 교수(이하 존칭 생략)의 최신호 에 실린 논문 ‘역사는 배반하지 않는다: 박노자의 한국 근대 인식 비판’을 아주 잘 읽었다. 현재 한국의 파시즘에 대한 비판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도 그랬지만, 언젠간 대중적인 논쟁을 통해서 밝혀야 할 부분을 언급해준 것은 더욱더 반가웠다.

일제 유산이 계속 작동되는 근본 이유는…

필자에 대한 하원호의 비평을 요점별로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필자는 이승만·박정희 시절과 이후의 파쇼적 구조의 담론적인 기원을 구한말의 ‘개화사상’ 등에서 찾지만, 담론적 기원보다는 제도적 기원이 중요하고 “박정희의 ‘국민’ 기원은 일제 파쇼체제 아래서 만들어진 ‘국민’이다”. 2) 한국인의 세계관(정치인에 대한 혐오증 등) 형성에서 식민지 시대의 역할을 필자는 과소평가했다. 3) 필자는 초역사적인 텍스트 읽기에 치중한다. 4) 필자는 농민·노동자 투쟁의 동력에 무관심하고 민중적 민족주의의 가능성을 간과했다.

모두 중요한 요점들이지만 일단 2), 3), 4) 문제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하원호의 1) 지적만 다루어보겠다. 지금도 노동운동가들을 죄인 취급하고, 군대에 끌려간 젊은이들의 자살을 유발하고, 학생들에게 경쟁과 성공밖에 모르는 체제 순응적인 인간이 되기를 강요하는 한국의 파시즘은 미국의 한 한국학자 저서 제목대로 ‘일본 제국의 자식’(offspring of empire) 자체인가? 아니면 계보가 더 복잡한 것인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박정희)의 ‘미니 제국’이 그가 섬긴 ‘대일본 제국’을 빼닮았다는 걸 필자는 의심한 적이 없다. 미국·소련을 상대로 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성전’(聖戰)이 ‘반공 성전’으로, 사상 통제와 국민 교화를 위한 ‘애국반’이 ‘반상회’로, 역대 총독들의 ‘노자협조’(勞資協調) 구호가 ‘노사 총화단결’로, ‘농촌진흥운동’이 ‘새마을운동’의 원형이 됐다. 전 국민의 궐기와 총동원을 강요하고, 여성을 ‘현모양처’로, 청소년을 국가에 의한 세뇌와 훈육 대상으로 만드는 등의 통치술을 다카키가 혼자 발명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1970~80년대의 한국을 광기의 도가니로 만든 주범들이 ‘제국의 자식’이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몇 가지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일제를 섬기다가 이후 ‘반공 전사’로 돌변해 계속 군림했던 자들이 모두 은퇴하거나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된 지금 파쇼적인 제도들과 심성적 콤플렉스가 왜 이렇게까지 건재하고 있는가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계승한 ‘국보법’과 같은 가시적 요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론조사 결과 전체 시민 중 60~70%가, 한 대학교 학생의 과반수 이상이 병역 거부와 대체 복무제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자신과 다른 이념과 생활양식에 대한 이 적대성의 뿌리를 과연 일제의 말류들이 존속시켜놓은 잔재에서만 찾아야 할까?

물론 ‘국가’와 ‘군대’를 신성한 것으로 만든 우민화 제도들(학교, 보수 신문 등)이 중요한 원인이 되겠지만 그게 과연 유일한 원인일까 그 ‘잔재’와 함께 그 이전과 이후, 그리고 이외의 다른 파쇼화의 요인과 경로도 함께 생각해봐야 충분한 설명이 되리란 것이 작업을 시작한 필자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일제와는 달리 17~18세기부터 병역거부권을 일부 인정해온 미국을 종주국으로 섬긴 지 어언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군국 일본을 방불케 하는 풍토가 계속 존속되는 것은 간과할 수 없다. 그러면 지배층들이 일제의 유산을 계속 작동해야 하는 근본 구조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분단 체제를 말할 수 있겠지만 1990년 이전의 동·서독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가 허용된 것을 고려한다면 이 문제를 간단하게 볼 수만은 없다.

자본주의 ‘기술적 근대성’의 잔혹성

우리는 대개 ‘파시즘’을 역사 속의 특수한 시기(독일·일본의 1930∼40년대 등)에 해당하는 ‘비정상적’ 국가·사회 형태로 인식하지만, 지그문드 바우만(Zygmunt Bauman)의 명저 (<modernity and the holocaust>, 1989)는 ‘기술적 근대성·합리성’ 안에 파시즘의 씨앗이 내재돼 있다고 주장한다. ‘기술적 합리성’(technical rationality)이란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목적이 ‘근대적’이니 도덕성이 무조건 인정된다- 필요한 근대 기술적 수단을 ‘합리적으로’ 동원하고 그 과정의 잔혹성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미국의 상업·농업 진흥을 위해 한 인디언 종족을 기관총으로 몰살하고, 신군부의 집권과 관료적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을 위해 광주를 탱크로 짓밟는 것이 ‘기술적 합리성’이다. 스웨덴에서조차 1936~76년에 약 6만명의 우생학적 ‘열등분자’(정신박약아, 부랑자 등)들에게 강제적으로 불임수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보면, 파시즘의 근본을 이루는 ‘기술적 합리성’이 ‘정상적’ 자본주의 사회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물론 ‘타자’(부랑자, 급진적 사회운동가, 제3세계 출신의 외국인 등)를 다룰 때를 제외하고는, 세계 중심부 국가들은 심한 위기에 빠지지 않는 이상,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식을 챙긴다. 그러나 잉여가치 수취와 자본 증식을 위해서 직접 생산자의 생활권마저 짓밟아야 하는 세계 주변부의 경우에는 ‘기술적 합리성’의 잔혹성이 노출돼 있다. 지주·자본가는 불만 분자를 늘 ‘역적’이나 ‘망국을 초래하는 노동귀족’으로 몰아 탄압한다.
하원호는 “100년 전과 오늘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면서 반(反)민중적 개화파와 오늘의 지배층의 단순 비교가 비역사적이라고 역설한다. 물론 사회가 못 알아볼 만큼 달라졌지만, 세계 체제 속의 한국의 위치가 비록 준(準)중심부로 상승했다 해도 주변성을 탈피하지 못한 차원에서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100년 전 ‘개화’ 지주가 일본으로의 쌀·콩 수출로 치부하려 소작인을 살인적으로 착취했듯, 오늘의 수출업체 사장이 ‘강남 귀족’의 위치를 성취·유지하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교수가 귀족으로 군림하려면 시간강사가 월 몇십만원으로 살아야 하고, 체인점의 주식이 올라가려면 아르바이트 학생이 시간당 2천원을 받아야 한다.
근대 자본주의적 사고의 ‘기술적 합리성’을 재빨리 체득한 100년 전의 ‘개화’ 주역들은 한국의 상황에서는 재산가 위주의 반(反)민중적 ‘근대화’가 초강경의 국가 폭력 행사 없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했다. 구한말의 박영효, 유길준, 윤치호, 서재필의 정치적 입장과 세계관이 각자 달랐지만 일본식의 강력한 경찰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점과 모든 ‘역적’(동학·의병)들을 모두 소탕해야 한다는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봤다. 경부 대신(경찰청 총장) 서리 이근택(1865~1919)이 서너명 이상이 모여서 속닥거리면 엄벌하겠다는 계엄령을 내린 것은 식민화 훨씬 이전인 1901년 6월22일의 일이다.

식민화 이전에도 개화파는 ‘징병제’주장

조선인들이 징병제 군대에 끌려간 1940년대보다 훨씬 이른 1890~1900년대에 서재필이나 유길준은 “징병제가 곧 국민을 만든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역사에 가정법이 없겠지만 만일 대한제국이 고종의 전제왕권 국가로 남아 있었다면 그 지배자들이 스스로 일본식 경찰·군사 국가제도를 도입해 대중의 군사주의적 훈육을 시도하지는 않았겠는가?
식민화 이전이든 이후든 한국의 지배층이 전체주의를 선호해온 것은 어디까지 그 지배층이 처한 사회·경제적 사정, 일본과 서구를 신성시(神聖視)하는 그들의 역사적인 욕망 구조와 개화기 이후부터 굳어진 대민(對民)관과 관련 있을 것이다. 사병의 인격을 왜곡시키는 현 징병제 군대가 ‘일제 제도의 영향으로’ 그대로 있는 것이기보다는, 군사주의적 훈육을 100년 전부터 중요시해온 지배층이 일제 군대 풍속의 존속을 허락하기에 여러 세뇌기구를 통해서 군국주의의 심성적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리를 해보자면 100년 전의 ‘개화’를 출발점으로, 그리고 일제 시기를 본격적인 성장기로 하는 한국의 현재 파시스트적 억압의 구도는 단순한 ‘잔재’라기보다는, 한국의 지배층이 그들의 필요성에 의해서 선택한 근대성의 한 형태다. 그 형태를 바꾸기 위한 일환으로 진보 사학자들이 ‘개화’의 주역들의 보수 재산가로서의 진면목, 그 사상의 계급적 성격, ‘기술적 합리성’의 파괴성, 그리고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내재적 문제점들을 대중에게 이야기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우리 고통의 뿌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100년 전 한국 자본주의의 ‘선구자’들이 오늘날의 지배층과 마찬가지로 억압과 배제를 선호했다는 점은 오늘 자본주의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사실이다.

참고 자료:
1. 영국의 리드스 대학교의 사회학과 명예교수 바우만의 웹사이트:
http://www.leeds.ac.uk/sociology/people/bauman.htm
2. 포스트모던 문제에 대한 바우만의 최근 온라인 인터뷰:
http://www.eurozine.com/article/2002-11-08-bauman-en.html
3. 인도네시아의 ‘주변부 자본주의’와 ‘억압적 극우 국가’의 이론적 분석들에 대한 최근의 한 편론:
http://mail.tku.edu.tw/113922/DL/Hadiz2002.htm
4. 김성수의 재벌을 주된 사례로 해서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근원을 밝히는 커터 에케르트 교수의 명저 (<offspring of empire>, 1991)의 내용 정리:
http://www.areastudies.org/documents/asia006.html


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 편집위원
</offspring></mod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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