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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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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꽃제비’를 아십니까

등록 2003-09-25 00:00 수정 2020-05-03 04:23

‘자본주의화의 슬픈 선물’ 거리의 아이들, 일중독 · 경쟁의식이 지배하는 사회가 따돌린 아이들

6·25 이후의 전쟁고아 문제, 지금 중국의 동북지역을 떠도는 ‘꽃제비’들…. 전쟁·기근으로 인해서 부모 없이 버려진 아이들이 생긴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이다. 그러나 오늘날 러시아에선 버려진 아이들의 문제는 이 상식의 상당 부분을 뒤엎는다. 러시아의 대도시에는 지저분한 외모의 아이들이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떼를 지어서 동냥을 구하기도 하고 지나가는 아이에게 돈을 빼앗기도 하고 경찰의 눈을 피해 늘 민첩하게 이동한다.

사회주의 시기에도 없었던 일

사회주의 시기는 물론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이러한 현상을 본 적이 없었던 필자는 최근 고향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할 때마다 충격을 받는다. 불량배나 경찰들의 폭력, 구걸 아동들을 전문적으로 착취하는 조폭들의 통제와 금전 갈취, 그리고 국제 불법 아동 성매매 조직들의 납치 등 위험에 노출된 그들의 수마저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러시아 내무부의 주장에 따르면 “약 100만~400만명”이 되고, 외국의 인권단체들은 약 300만~400만명이라고 추산한다. 국제노동기구(ILO) 모스크바 지부에 의하면 모스크바에 약 5만명의 길거리 아이들이 있다(http://www.cdi.org/russia/johnson/6317-3.cfm). 겨울 강추위 때는 이 어린 생명들이 하루에도 몇명씩 죽어가는 무서운 현실이다.

그러나 지금 러시아는 대전(大戰)을 치른 나라도 아니고 기근에 시달리는 최빈국도 아니다. 물론 체첸에서 전쟁을 하고 있지만 러시아 자체의 길거리 아이들 대다수는 체첸의 상황과 무관하다. 1990년대의 ‘자본화’ 과정에서 대다수 러시아 주민들의 소비 수준이 평균 30~40% 가까이 떨어졌다지만 아직까지는 만성적인 기근에 시달리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이들이 무엇 때문에 대량으로 길거리로 밀려나와 온갖 범죄와 폭력에 노출되는가?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부모 때문’이다. 지금 러시아 각급의 고아원·고아학교에 수용돼 있는 약 60만명의 아동들 중 95%가 부모들이 멀쩡하게 생존하는 ‘사회적 고아’들이고, 길거리 아이의 8~9할은 부모나 공인된 후견인을 갖고 있다. 문제는, 대다수의 경우 그들이 부모의 폭력 등 가혹행위·알코올 중독 때문에 집을 가출했거나 아예 부모에 의해서 아동 걸인을 관리하는 범죄조직에 팔려간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는 몇년 전 서구 신문에도 장식된 15살의 페탸 칼리닌(Petya Kalinin)의 자살 사건이다. 러시아 남부의 크라스노달(Krasnodar) 지역의 주민이었던 그 아이는 알코올 중독자 부모의 구타가 하도 심해 거의 1년 가까이 지역의 모든 관공서에 도움을 부탁했다. 관료들이 계속 “나 몰라라”로 일관하자 아이는 결국 목매달아 자살했다.

이 사건이 중앙 일간지까지 소개된 뒤에도 지역의 권력자들은 이 가족의 나머지 8명의 아이들이 맞고 굶는 사정에 하등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즉, 그들에게는 아동의 신변이나 생명은 무가치했다. 내무부의 통계로만 봐도 해마다 약 5만명의 아이들이 부모의 폭력이나 가혹성 때문에 가출의 길을 택하고 그 밖에는 집에서 쫓겨나거나 조폭들에게 팔려간 아이들이 주를 이룬다.

아동 학대·방기(放棄)가 전무한 사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년 만에 수백만명의 아이들이 버려지거나 도망치거나 팔려갔다는 것은 아동학대의 폭발적인 증가를 의미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러시아 수백만의 가정이 보금자리에서 아이를 도망치거나 자살하게 만드는 ‘사설 고문실’로 돌변했는가. 물론 이 비극이 발생한 배경에는 ‘개혁’이 가져다준 대중적 빈곤이 있다. 생계곤란 때문에 아이를 포기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리고 1990년대의 대중적 빈곤화가 알코올 중독률을 높여 아동학대 행위의 일차적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도 맞다.

‘적의 죽음’을 기뻐하는 ‘과잉 광기’

그러나 러시아의 최빈층이라 해도 아이를 사랑해주는 가정이 적지 않고, 중소기업 사장 집이라 해도 알코올 중독·가혹행위·극단적 무관심 등의 이유로 아이를 도망치게 만드는 경우가 꽤 있다. 즉, 권위주의적인 위로부터의 자본화 과정의 직접적인 경제적 영향뿐만 아니라 여러 간접적인 사회·문화적 영향들도 아울러 고려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혹성·공격성의 문제를 파헤친 신좌파의 유명한 이론가 마르쿠제(Herbert Marcuse·1898~1979)에 따르면 상당수 개인의 인격을 파괴할 정도의 ‘비정상적인’ 사회적 잔혹성을 배양하는 것은 다름 아닌 위기 시기의 ‘과잉 광기’이다. 즉, 체제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에는 제도권의 헤게모니 기제(학교, 언론 등)들이 부르주아의 ‘고전적 덕목’인 온건함(체제 순응), 근검절약(이윤 극대화), 애국주의(어용적 민족주의) 등의 주입을 핵심적 과제로 삼는다.

그러나 체제가 변혁기를 맞거나 위기에 빠질 때 대중들의 분노와 좌절의 에너지를 체제 순응적인 방향으로 집중시키려는 제도권의 세뇌기관들은 오히려 잔혹하고 광란적인 분위기를 조장한다. 히틀러의 선전기술은 너무나 잘 알려진 상징적인 ‘과잉 광기’의 사례지만 마르쿠제의 ‘선진적 풍요 사회의 공격성’(1968·http://www.wbenjamin.org/marcuse.html)이라는 글에서 지적되듯이, 베트남 빨치산의 주검들을 텔레비전에서 보여주고 미군의 대량살인을 찬양했던 1960년대 미국의 제도권 언론들은 파시즘과 별다른 차별성을 보이지 않았다. ‘적의 죽음’을 기뻐하는 상징적인 ‘과잉 광기’의 사회에서 제도권과의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많은 개인들이 심성적 파멸의 길로 가지만 대중들의 에너지가 체제의 편에 동원되는 효과를 지닌다.

1990년대 러시아의 경우에는, 극소수를 위한 자본화가 낳은 대중적인 분노·좌절·공포는 얼마든지 반(反)체제적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그리하여 러시아 정권은 ‘러시아 국민과 국가의 공적(公敵)’으로 분류되는 체첸 독립군에 대한 탄압을 ‘광기의 향응’으로 만들었다.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연방군이 오늘도 몇명의 비도(匪徒)를 섬멸했다”는 소식을 알리고 화면에서 까무스레한 피부색의 주검들이 나타난다. 그럼으로써 ‘우리’와 ‘그들’의 혈투 모습과 증오심이 조장된다.

인기영화 가 의미하는 것은…

최근 러시아의 상업적 대중문화도 국수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냄새가 짙은 ‘타자’의 살해를 ‘오락 상품’으로 생산한다. 예컨대 2000년 최고 인기영화 (http://brat2.film.ru/)의 주제는, 체첸 전쟁의 베테랑이자 ‘의리 있는 킬러’ 다닐라가 러시아에서 소수민족들을 죽임으로써 ‘애국적 의분’을 풀고 미국까지 가서 ‘조국의 적’들을 기관총으로 싹쓸이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할리우드의 ‘애국적 액션물’의 아류로밖에 안 보이지만 주인공의 기괴한 잔혹성은 열등감과 ‘타자’(체첸인, 외국인 등)에 대한 복수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 감정이 러시아의 대중 심성과 맞아떨어짐으로써 의 영향력이 대단하다. 텔레비전에서 체첸인들의 주검을 즐기며 특무부대(스페츠나즈) 요원을 ‘사나이의 이상형’으로 간주하는 러시아의 20~30대 소시민들이 과연 아이에 대한 포용과 이해를 덕목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포용, 관용, 비폭력, 다원주의와 같은 단어들을 요즘의 관용 매체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또한 대부분의 매체에서는 자본주의적 성공의 찬양, 성공한 자의 ‘낙원 같은’ 생활의 찬미가 이루어진다. 백만장자에 대한 영화와 사치품들의 광고들은 ‘성공’의 기회가 그나마 주어진 고학력 중산층에게는 ‘일 중독’과 타산적 태도·경쟁의식 등을 고취하고, 경제적 능력이 없는 기성세대에게는 좌절을 심화시킨다. 젊은층의 ‘일 중독’도, 기성세대의 세상에 대한 싫증도 결국 아이들에 대한 무관심이나 가혹행위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 한마디로, 제도권이 폭력의 이미지를 계속 유포시키고 무제한 경쟁, 약육강식의 담론을 보편화시킨다면 가장 심한 피해를 볼 계층은 바로 무력한 아이를 포함한 사회의 ‘타자’, 약자들이다.

스킨헤드의 ‘갱’들이 방어 능력이 없는 외국인 학생들을 재미로 때려잡고 적지 않은 부모들이 자신의 좌절·분노·공포를 여러 형태의 아동학대로 푸는 것은 ‘자본주의를 건설하는’ 러시아의 뒷모습이다. 이 ‘병든 사회’가 포용·관용·비폭력의 가치로 돌아가려면 무엇보다 자본주의의 겉모습 속에 내재돼 있는 반(反)인륜성에 대한 대중들의 깊은 자각이 필요할 것이다.

[참고 자료]

1. 러시아 비정부기구(NGO)들이 유엔 인권 고등 판무관에게 제출한 러시아 아동인권 보고서(영문), 2000년도, http://www.openweb.ru/p_z/Ku/rus_agch250800e.htm
2. 러시아에서의 아동인권 보고서(러시아어), 2001년도, http://www.openweb.ru/p_z/Ku/main.htm
3. 의 분석기사, http://www.ce-review.org/01/5/kinoeye5_horton.html
4. 마르쿠제의 간략한 전기, http://www.uta.edu/huma/illuminations/kell12.htm

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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