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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는 과연 ‘성공’했는가

등록 2003-10-09 15:00 수정 2020-05-02 19:23

일본 근대화의 공을 쏘아올리기 위해 깔려 죽은 수많은 ‘난쟁이’들을 생각한다

필자가 처음 노르웨이에서 동아시아에 관한 수업 준비 참고서로 이용한 책은 한국에서 라는 제목의 번역본으로 알려진 미국 학자 존 K. 페어뱅크/ 에드윈 O. 라이사워/ 앨버트 M. 크레이그의 라는 저명한 저서였다. 역사적 정보가 잘 체계화돼 있는데다 쉽고 편한 어조로 쓰였기에 참고서로 이용하기 편했다. 그러나 그 저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들의 근본적인 견해에 강한 회의가 갔다.


박정희의 모방, 우리의 성공?

19세기 중반 이후의 동아시아 역사를 보는 그들의 시각을 정리하자면 “일본과 일본 모델을 따라간 남한은 성공했고, 중국과 북한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일본이 왜 성공했는지 그리고 중국이 왜 실패했는지를 역사적 결정론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중국의 철저한 중화의식과 복잡한 중앙집권제가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방해하여 결국 공산당 지배 체제라는 ‘제국의 재판(再版)’을 가져다준 반면, 유연하고 지방분권적인 일본의 도쿠가와 체제(1603~1868)는 메이지유신(1868)을 단행해 서방을 잘 모방할 신세력들에게 설자리를 마련해주었다는 이야기다. 즉, 일본 자본주의가 성공한 만큼 일본의 전근대사마저도 미국 학자의 찬사를 얻은 것이다. 물론 저자 중 한 사람(페어뱅크, 1907~91)은 미국의 대 중국 전략의 한 입안자이며, 또 한 사람(라이샤워, 1910~90)은 미국의 대일 외교의 원로인 만큼 미국의 전략적 이해에 따라 미국의 ‘주니어 파트너’인 일본을 자본주의적 성공사례로 치켜세우고 경쟁자가 될 중국을 ‘전근대적 제국’으로 따돌릴 것은 어느 정도 예견되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미국 지배층으로서의 편견이 강한 관변 학자라 해도 메이지 일본을 ‘성공’으로 칭찬해준 것은 너무 심한 편향이자 선입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민중 생활에 초점을 맞추어 당시의 책과 신문, 잡지를 통해서 본 메이지 시대의 일본을 도저히 성공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다.

물론 세계 체제 중심부의 입장에서 메이지 일본의 국제적 신분의 상향 이동을 긍정 일변도로 본 것은 페어뱅크와 라이사워만은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의 주류는 물론 상당수의 사회주의자마저도 일본의 발전과 문명화를 찬탄해 마지않았다. 예컨대 1911년에 일본을 방문했던 영국의 온건 사회주의자 시드니와 비어트리스 웨브(Sydney & Beatrice Webb)의 부부는 일본이야말로 미래 사회주의의 원형이라고까지 했다(제1차 세계대전으로 근대적 무기 산업을 갖춘 일본이 영국·미국의 이익을 위협하는 모습을 보이자 1910년대 후반부터는 일본 찬양 일변도의 태도가 약간 변화하였다). 중심부 이념가들이 메이지 개혁을 ‘아시아에서의 유일한 문명화의 승리’로 봤는가 하면 중심부에 편입하고자 하는 주변부 자본주의 지향적 사상가들도 메이지유신을 찬양하여 다른 비서구 지역의 발전모델로 삼았다.
구한말 때 정치적인 친일파는 물론 서재필이나 이승만과 같은 독립 지향적 친미파들도 한국에서의 ‘개혁’을 메이지 일본처럼 단행하기를 주장했다. 지금도 한국의 일부 보수적 사학자들은 19세기 후반에 ‘우리가 근대 개혁에 실패하고 일본이 성공한 이유’를 찾으려는 등 메이지 일본의 성공을 기정 사실로 보고 이를 의심치 않는다. 물론 꼭 우리를 ‘실패자’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일각의 경제 사학자들은 일제 지배하에 조선에 메이지식의 자본주의가 이식되고, 그 뒤 박정희가 의식적으로 ‘메이지 근대화’를 모방해 개발 독재를 통해서 공업화를 이룬 것을 ‘우리의 성공’으로 보기도 한다.

그 제단에 바쳐진 젊은 여공들

물론 메이지 개혁과 1910~20년대의 중·화학 공업 발전을 계기로 일본이 세계 체제의 주변부를 탈피해 준중심부에 진입한 것은 사실이다.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를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인류의 성공으로 본다면 메이지유신도 박정희의 개발 독재도 성공이다. 그러나 우리가 왜 꼭 유럽의 근대적 국민국가를 ‘절대자의 뜻’ ‘이성의 구현’으로 본 보수주의적 철학가 헤겔(1770~1831)처럼 ‘오늘의 현실’만 ‘이상’과 ‘역사의 목적’으로 여겨야 하는가? 지중해 지역의 고대 노예제나 유럽의 중세 농노제가 역사의 궁극적 목적이 아닌 상당수의 다른 지역들이 거치지 않은 한계 많은 사회·경제 형태였듯이, 현재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도 산업사회가 취할 수 있는 수많은 형태 중 하나일 뿐 가장 지속 가능하거나 바람직한 것이 전혀 아니다. 현재의 자원고갈과 환경파괴의 속도로 봐서는 근본적인 체질 변화 없이 60~70년도 못 갈지 모를 이 체제에의 편입을 우리는 ‘성공’이라고 감탄하고 있는가.
고대 그리스의 노예제를 평가할 때 우리는 사원의 균형미나 플라톤(기원전 427~347)과 같은 철학가들의 고상한 논리보다 그 사원을 건축하고 플라톤의 시중을 든 노예들의 신세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가. 아무리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이상시한다 해도 살인의 장면을 즐긴 우중(愚衆) 앞에서 노예인 검투사들이 서로를 죽여야 했던 콜로세움의 완공을 ‘야만의 기억’이 아닌 ‘건축사상의 성공’으로 봐야 할 것인가? 그러면 현재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읽어봐야 되지 않는가? 그렇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메이지 시대의 일본은, 부국강병을 단기간에 이루려는 극소수 지배자의 야심을 위해 대다수 행복추구권·건강·생명이 바쳐진 커다란 제단(祭壇)일 수 있다.
연평균 5%의 성장률을 보인 메이지 시대의 일본산업 경제. 이 ‘작은 공’을 쏘아올린 도쿄와 오사카의 ‘난쟁이’들은 누구였는가. 메이지 시대 일본 외화벌이의 약 60%를 담당한 당시 경제적 효자인 면직물 노동자의 80~90%를 차지한 이들은 25살 미만의 여공이었다. 모집원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빈농의 딸들은 한달에 이틀만 쉬며 매일 14~17시간씩 노동을 해야 했다. 여럿이 같이 자는 콩나물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서 특별 허가 없이는 외출을 불허하는 등 사실상의 감금 조치들이 이루어졌다. 노동기간은 필기 계약서도 없이 모집자와의 구두 약속으로 정해지고, 임금은 공장 주인이 엿장수 마음대로 매겼다.
여공의 평균 임금은 1900년도에 월 18엔이었는데, 남성 노동자의 평균 임금보다 2배 이상 낮았다. 그러나 남성 노동자처럼 한달에 40~50엔을 받는다 해도 3~4명 가족의 생계를 이끌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만성적인 피로, 영양부족, 열악한 주거 여건이 겹쳐져 결핵과 같은 질환이 노동자 사이에서 크게 나돌아 한 공장에서 수백명의 여공이 함께 결핵에 걸리는 경우도 많았다. 35살이나 40살을 넘긴 19세기 말 일본의 노동자는 대개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지옥을 탈피하고 싶었다. 최초의 노동조합이 1890년대 말에 생겼지만 사용자와 경찰의 끈질긴 탄압으로 활동하기 어려웠다. 절망에 빠진 노동자들은 1907년 아시오(足尾) 동산(銅山)에서처럼 폭동을 일으켜 기계를 파괴했고, 국가는 군대 출동, 계엄령, 지도자 연행으로 대응했다. 그러한 노동자들의 환경은 한국의 1970년대 노동자들의 그것과 놀라울 만치 일치되지 않는가? 이처럼 삶 같지 않은 삶을 산 메이지 시대 일본 서민 사이에는 이민 열기가 대단했다. 1908년에 브라질 이민이 허용되자 6년간 거의 19만명이 줄줄이 빠져나간 것이다.

식민지 조선과 중국으로 이식되어…

메이지 국가와 자본이 용량 축적에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수많은 메이지 노동자들을 기다렸던 것은 성공이 아닌 영양부족·질환·생명단축이었다. 1920~30년 식민지 조선에, 1960년대 일종의 ‘신식민지’ 남한에, 그리고 1980년대 말~1990년대 중국에 이식된 메이지형 노동착취 방법(고강도 무휴노동과 생계 곤란 수준의 임금, 자율적 노조의 금지·탄압, 기숙사 생활과 행동 단속, 관리자의 일상적 폭력, 월급 체불 관행 등)은 몇 세대의 동아시아 피지배민들의 삶을 일그러뜨렸다.
물론 동아시아의 엘리트들이 이와 같은 억압 위주의 근대 형태를 선택한 데에는 현실적인 이유와 배경(세계체제 중심부의 압박, 피지배민들의 정치조직 결여의 이용 가능성 등)도 궁극적인 생활 수준의 제고라는 일부의 긍정적인 효과도 없지 않다. 그러나 과연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배태된 감옥형 자본주의에 ‘성공’이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가? 그 당시 역사의 주인공인 구체적인 인간들의 고통과 죽음을 무시하고 국가나 민족의 ‘영광’을 생각할 수 있는가? ‘근대화’라는 공에 깔려 죽고만 수많은 억울한 ‘난쟁이’들부터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

참고자료
1. 일본 과로사 문제와 메이지 때부터 강요되기 시작한 고강도 노동을 연결시키는 카토 데쓰로 교수의 논문:
http://members.jcom.home.ne.jp/katori/WORKAHOLISM.html
2. 근대 일본의 결핵의 역사-메이지 노동자들의 결핵 감염 문제에 대한 연구:
http://www.lang.nagoya-u.ac.jp/~mfukuda/english.html
3. 한국외대 조규철 교수의 메이지 시대 여공에 대한 자료:
http://www.japanstudy.org/html/lecture/rekisi/10_072.htm
4. ‘메이지 시대 일본 여성사’ 수업자료:
http://eee.uci.edu/faculty/losh/resources/in-class/RW6.html
5. 일본인들의 브라질 이민, 그리고 재브라질 일본인들의 역이민에 대한 논문:
http://www.iadb.org/mif/v2/files/makotoutsumi.doc
6. 일본 등지의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상호관계에 대한 논문:
http://ecoethics.net/hsev/200003txt.htm
7. 일본 근현대사 연구의 포털 사이트(일본어):
http://www.geocities.co.jp/WallStreet-Bull/6515/index.html


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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