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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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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인 ‘서구신화’를 깨자

등록 2003-07-23 15:00 수정 2020-05-02 19:23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이데올로기,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

1978년에 에드워드 사이드의 명저 이 나온 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은 일반인들의 귀에 익은 사회과학 용어들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일본 식민주의자들이 이야기했던 한국사의 타율성과 정체성, 미국의 보수적 학자들이 즐겨 들먹이는 ‘한국인들의 타고난 복종의 습관’이나 ‘태생적인 권위주의’, 그리고 우리들이 중국이나 베트남을 ‘더럽고 부패하고 위험한 곳’으로 보는 시각 역시 다 똑같이 세계적 규모의 서구 중심주의적 ‘동양 타자화·배제’(오리엔탈리즘) 담론의 파편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분명 일종의 지적인 해방이다.

유럽의 역사를 눈뜨고 제대로 보라

그러나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서구 중심주의라는 전지구적으로 울려퍼지는 제국주의의 행진곡이 ‘동양 비하론’과 함께 동질적 공간으로서의 ‘서양’의 개념화- 인류학·문학론에서 이야기하는 ‘옥시덴탈리즘’- 라는 화음을 기본으로 한다는 것이다. 동양의 퇴보성, 퇴영성, 태생적 전제주의 그리고 서양의 진보성, 시민적 성숙, 태생적 자유주의적 성향을 서구의 주민들이 진리로 인식해야 서구의 제국주의적 세계 지배가 ‘역사적 논리’로 비치기 때문이다. ‘옥시덴탈리즘’이라는 개념은 물론 경우에 따라 비서구인들의 ‘선망의 대상’으로서의 서구뿐만 아니라 그 정반대인 ‘악마화된 서구- 예컨대 일제 말기의 어용 선전에서 나왔던 ‘미영 귀신’식의 흑색선전- 라는 ‘서양’의 개념화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일단 논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은, ‘서양’을 부정적으로 개념화하는 ‘네거티브 옥시덴탈리즘’이 아니고 요즘 한국을 휩쓸고 있는 ‘포지티브 옥시덴탈리즘’, 즉 ‘서양’을 흠모·맹종의 대상으로 만든 ‘서구 신화’다. 서구 제국주의의 세계적 헤게모니는 ‘옥시덴탈리즘’의 담론이 복속된 비(非)서구 지역의 인구들에게도 서구인 못지않게 체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서양적 자유분방이나 서양적 평등주의, 서양적 가치나 시민정신을 이야기한다.

물론 민중들의 오랜 투쟁의 성과로 유럽의 국가에서 근로 계층이 상대적으로 나은 조건으로 노동을 팔고, 상대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유럽의 학교나 제도권 언론들이 인간성과 상식을 가시적으로, 강압적으로 파괴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즉, 많은 한계에도 유럽 사회가- 시민으로 인정된 자에 한해서- 비교적 통합적·참여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도, 상대적인 진보적 역동성을 보유한다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상대적인 역동성을 과대평가하고 목적론적으로 역사에 투영시켜 유럽의 역사 전체를 ‘자유와 진보로 향한 행렬’로 인정한다는 것에 있다. 문제의 발단은 ‘유럽/서양’으로 개념화된 허구적인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지적인 집착이라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이 150년 전에 만든 ‘서양’이란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알게 모르게 인종론적 사고를 배경으로 삼는 우리들은 백인들이 사는 유라시아 서쪽의 모든 지역들을 ‘서양’으로 개념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200년 전 라트비아인들의 90%이상을 농노로 부리고 그들에 대한 거의 생사여탈권을 가졌던 172개의 독일 계통 문중의 라트비아 귀족들은 자신들과 라트비아 계통의 농노들을 같은 서양인이나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언제나 팔 수도, 때릴 수도, 마음대로 부릴 수도 있는 라트비아 계통의 농노들은 ‘말하는 가축’일 뿐이었다.

서구 중심부 국가들 계통의 지배층이 비서구인 못지않게 가혹하게 차별·착취하는 것은 바로 유럽 역사의 특징이다. 주변부 민중뿐인가? 전쟁 승부에 의해서 국가 사이의 서열이 매겨지는 유럽에서는 패전국을 ‘타자화’하고 비하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1870년 7월19일~1871년 5월10일의 프랑스-독일간 전쟁 이전에는 ‘선진적’ 프랑스 문화에 깊은 조예가 독일 지배층의 필수 요건이었지만, 전쟁 뒤에는 새로 기승을 부리게 된 인종주의적 사고에 영향을 받기도 한 독일의 지배층은 프랑스를 비롯한 ‘라틴 인종’에 대한 경멸로 가득 차게 됐다. 서구의 지배를 받는 비서구 지역의 지식인들은 동질적인 선망의 대상인 ‘서양’의 그림을 그리지만, 실질적 유럽은 계급·국가적 위계질서가 철저하고 민족·인종주의 담론에 의해서 넘기 어려운 수많은 경계선들이 그어진 극히 다층적인 공간이다.

‘자유’란 그곳에 존재하는가

‘노예 정신의 동양’과 대조를 이루는 ‘자유 정신의 서양’이라는 담론의 구조는 비서구 지역 지식인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체화한 서구 지배층의 자만(自慢)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자유’란 무엇인가? 실존주의적 시각에서 본 존재론적 의미의 자유는 ‘나의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선택권’을 뜻한다. 그러나 대다수 서구인들은 그들의 생활방식에 대한 개인적 선택을 행하지 않는다. 제도권 교육을 받고 취직하고 생산·소비의 순환에 빨려드는 자본주의적 생활방식 이외에 다른 삶의 방법들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그들이 무슨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지구의 자원을 고갈시키고 인류를 집단 자살로 이끌고 있는 오늘의 소비주의 사회가 그들에게 역사의 목적이자 지상낙원으로 보일 뿐이다. 현실을 절대시하는 인식론적인 차원에서는 서구·소비중심주의적 서구인과 북한 사회를 ‘조선 역사의 당연한 목적’으로 보는 북한의 ‘순진한 시민’은 어쩌면 너무나 비슷하다. 오히려 자신을 모르고 북한인을 ‘자유 없는 불쌍한 노예’로 보는 서구인이 당하는 세뇌가 한층 더 교묘하고 철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철학적 의미의 ‘자유’는 오늘의 ‘서양’이라는 문화 공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상당수 한국인들은 ‘서구인들이 정치적으로 자유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정치적 자유, 근대 국가에서 정치적 자유란 국가 관료기구의 움직임들에 대한 결정권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언론들은 세계 상황이나 행정부의 국내적 조치들에 대한 충분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진보’를 자임하는 주요 정당들의 지도부까지 지배층에 의해 포섭당한 상황에서 서구의 평범한 소시민은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영향력은커녕, 소시민의 대표자인 국회 의원들도 국가 행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쉬운 예로 노르웨이의 한 신문이 여야 국회의원들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그 중 단 한 사람도 노르웨이가 미국의 아프간 침략에 몇명의 직업군인과 어떤 군사설비로 기여했는지를 몰랐다. 물론 공식적으로 알려진 162명의 특무부대 요원 이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노르웨이 정예부대 요원들이 미국의 특무부대와 함께 침략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르웨이 국방부와 미국 국방부의 유착의 전모를 밝히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설문조사에 응한 국회의원들은 공개된 정보조차 알지 못했다. “노르웨이 군인들이 아프간인을 몇명 죽였는지 아는가”라는 공산당 신문기자의 질문에 “그게 정치에 무슨 상관이 있느냐? 사망자 수를 알 필요가 있느냐?”라고 반문한 노르웨이 국회 국방위원회의 노동당 소속의 한 의원의 말(“우리가 누굴 죽이는지 우리도 모른다”- 2003년 6월7일:www.klassekampen.no/nyheter /115200 /115221)에서 느껴지듯 ‘소시민의 대표자’들은 유권자들의 문제가 아닌 한 국가의 행동을 견제하거나 감시할 의지가 없다.

‘이상적인 서양’의 그림을 지우자

국가가 비서구 지역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에 대해서 영향을 미치기는커녕 알려고 하지도 않는 서구의 소시민에게 남은 것은 인신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들이다. 그런데 국가가 이 기본권을 지켜주는 묵시적인 조건은 역시 국가와 자본에 대해 본격적으로 반발할 권리를 반납하는 것이다. 반세계화 시위 때 가시적인 반발을 하는 시위자들을 고무탄과 물대포로 무장한 경찰이 어떻게 다루는지 우리는 이미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그러한 시위자들이 꾸준히 생기기에 그나마 신자유주의 지향의 지배층이 아직까지 복지국가의 기본틀에 함부로 손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 계통의 국회 의원들마저 전쟁 히스테리에 휩쓸려 전쟁을 지지한 1914년 7월의 유럽보다 오늘의 유럽은 전체를 위한 개체의 희생을 훨씬 덜 강요한다. 그러나 ‘남을 속박하는 자가 자유인이 될 수 없다’는 명언대로 제3세계에 대한 서구의 착취가 중단되지 않는 한, 서구인들의 ‘자유’를 논하기 힘들다. 유럽의 진보적 투쟁의 역사를 유심히 연구할 필요는 있지만, ‘옥시덴트’를 이상적인 지향점으로 설정해 서구 지배층이 만든 함정에 빠질 필요는 없다. 서구 중심의 세계는 우리가 지나가게 된 하나의 단계이지 인류 역사의 종점도 아니고 목적도 아니다. 우리가 ‘이상적인 서양’이라는 그림을 말끔히 지워버릴 때 비로소 진정한 세계 평등의 길을 향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사이트:

1. ‘시민’으로서의 유럽 노동계급과 여성운동의 지배체제의 포섭의 역사- 임마뉴엘 월레스타인 논문: fbc.binghamton.edu/iwepthomp.htm

2. 싱가포르 소설에서의 ‘옥시덴탈리즘’: http://www.scholars.nus.edu.sg/landow/post/singapore/literature/tan/occident.html

3. . Ed. James G. Carrier. Oxford: Clarendon Press, 1995 라는 ‘옥시덴탈리즘’ 연구서에 대한 서평


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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