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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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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국가의 양심, 물타둘리

등록 2003-08-07 00:00 수정 2020-05-03 04:23

네덜란드 식민지 착취 체제의 내부 고발자가 된 에두아르드 데커의 삶과 문학

근대사를 공부할수록 동시에 두 가지의 상반되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한편으로는, 국가가 한 나라의 주민들에게 일체의 대안적 의식들을 어릴 때부터 마비시키는 근대만큼 대중들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철학가·정신분석가 에릭 프롬의 표현)가 심한 시대는 역사상 없었을 것이다.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경우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대개 군사주의적 광기의 형태를 띠곤 했다. 100년 전의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나 영국의 주류 사회주의자들은 1848년 혁명의 시절부터 급진적 수사를 이어받고 5월1일의 노동절이면 ‘제국주의 타도’를 외쳐댔지만,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국주의의 깃발 밑에서 서로를 죽이려고 광적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주류사회에서 왕따가 된 괴짜

그런데 요즘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것이 살인적 열광보다는 “나만 배부르면 된다”는 식의 냉소주의적 형태를 띤다. 세계 인구의 15% 정도밖에 안 되는 미국·서유럽·일본이 세계 자원의 약 85%를 독식한다는 사실 등이 이미 노르웨이 중·고등 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면 자원 약탈을 바탕으로 삼는 세계 체제를 바꾸려는 노르웨이 젊은이들이 다수일까? 천만에. 우리가 약탈자라 해도 우리의 소비 수준에는 손을 대면 절대로 안 된다는 집착은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대다수 서방인들의 집단의식이다. 세계를 바꾸기 위해서 몸부림칠 자유와 나의 도덕적 이상을 실천할 자유로부터 집단 도피하고 있는 것이다. 약탈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집단적 여유와 소속감에 안주하는 것이 개인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집단주의가 극성을 부리는 근대임에도 ‘다름’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급진적 운동이 주목을 끈다. 개인마다 자신 나름의 우주를 이루는 만큼 한 개인이 천편일률적인 ‘국민’이나 체제의 부속물이 아니라 약탈적 체제와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해방의 의미를 지닌다. 저항의 정신을 살려 후손들에게 인간이 홀로 서는 도리를 가르쳐준 사람들 중에서 우리는 한용운, 나혜석, 체 게바라, 프란츠 파농 등을 익히 안다. 그러나 이들 외에도 독립적 개인으로서의 길을 끝까지 간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역사를 제도권 위주로만 배운 우리에게는 그들의 이름이 낯설다. 예컨대, 책 한권으로 19세기 네덜란드의 정책 전체를 뒤흔든 물타둘리(Multatuli; 1820~1887)의 이름을 아는가?

물타둘리는 “많이 고생했다”는 뜻의 필명이다. 이 필명으로 유럽 전역에서 문명(文名)을 얻은 에두아르드 데커(Eduard Douwes Dekker)는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즐길 것을 두루 즐기고 규율적이면서도 편한 생활을 보내는 선량한 소시민을 모범으로 내세우는 유럽의 가장 부르주아적 국가인 네덜란드 대다수 국민과는 달리 데커는 본인이 의식적으로 고생의 삶을 선택하였다.

네덜란드인이라면 뱃살이 약간 찌고 깔끔한 양복 차림의 계산적이며 자만심에 찬 부르주아를 상상하는 것이 19세기 중반 유럽의 상식이었다(양복을 차려입을 만한 돈이 없는 빈민층은 아직 ‘국민’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데커만큼이나 그런 상식을 뒤엎는 괴짜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강물에 빠진 개를 위해서 주저 없이 강에 뛰어내리고 극장에서 배우를 험담하는 지체 높은 부르주아 손님의 뺨을 갈기고 ‘무식쟁이의 기도문’이라는 도발적인 시(1860년 발표)에서 “이 더러운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면 나는 그 하나님을 섬길 마음이 없다”라고 상투적인 유산층의 신앙을 조롱한 자유사상가…. 돈이나 체면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일상적 행동만으로도 데커는 벌써 네덜란드의 주류 사회에서 외톨박이가 되었다.

그러나 데커가 저지른 ‘범죄’는 이와 같은 ‘장난’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는 (1860년)라는 책을 통해서 돈독한 신앙심과 빈틈없는 법질서, 합리적 사업정신을 자랑하는 네덜란드가 치부한 것이 결코 근검절약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다.

19세기 네덜란드 문학의 걸작,

네덜란드 사회의 깨끗함과 조용함, 예절과 매너 뒤에는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착취를 당하는 식민지 인도네시아 민중의 피와 눈물이 있었던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의 자본축적 과정의 약탈성을 괴짜 데커가 과감하게 누설한 것이다. 그것 자체도 주류들로서는 이미 괘씸죄에 해당되었지만 데커가 다름 아닌 식민지 관료 출신으로서 식민지 현실을 너무나 세부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한 것은 더욱더 충격적이고 ‘배신’이었다. 데커는 어떻게 해서 네덜란드 식민지 착취 체제의 내부 고발자가 된 것일까.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그는 선장이었던 부친의 배를 타고 1839년에 처음으로 인도네시아로 온다. 그 뒤 1856년까지 그는 자바나 셀레베스 등의 인도네시아 군도의 여러 섬에서 사무원의 말단직부터 몇 행정 구역의 ‘부(副)통감’이라는 상당한 위치까지 오르고, 식민지 관료답지 않게 현지의 여러 언어까지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고, 현지 여성과 연애도 해본다.

그러나 유럽의 ‘모범 문명국’의 ‘모범 식민지’에서 그가 본 것은 소위 ‘강제재배 체제’아래서 강제 노동수용소의 죄수처럼 당국의 지시대로 특정 작물만 파종했다가 수확이 좋지 않을 때는 아무런 구휼도 없이 그저 대량으로 굶어죽어야만 하는 원주민들과 ‘공식적’ 착취에다가 개인의 치부를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온갖 부정부패 가렴주구를 다 저지르고도 처벌되지 않는 네덜란드의 탐관오리들, 네덜란드 당국과의 유착 덕분에 살인을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 토착지주들이었다.

네덜란드의 국고와 상인들의 주머니들을 해마다 살찌우는 인도네시아의 커피와 사탕에서는 말 그대로 피비린내가 났다! 처음에는 순진하게도 지역 관료들의 비리를 인도네시아 총독에게 고발했다가 결국 생트집 잡혀 정직·직위해제 처분을 몇번씩 당해본 데커는 이 체제 안에서의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다. 결국 그는 퇴직을 자청하고 유럽으로 돌아와 벨기에 수도 브뤼셀의 한 호텔에서 인도네시아에서의 식민지배 체제라는 살인기구를 폭로·단죄하는 소설의 집필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현재 네덜란드 19세기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였다.

그렇다면 사회참여적 고발 문학의 작품이 어떻게 해서 최고의 걸작으로서 명예를 누리게 됐을까 작품의 구성은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을 예견한다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복잡하고 파격적이다. 이 소설의 화자(話者)는 한명이 아닌 몇 사람이다. 먼저 드루크스토펠(Droogstoppel·먼지처럼 메마른 이)이라는 욕심쟁이 커피장수가 무대에 올라 가난해진 옛날 동창 살만(Sjaalman·스카프를 옷 대신 쓸 정도로 가난한 이)으로부터 한편의 원고를 얻는다. 드루크스토펠는 원고의 주제가 더 나은 커피재배법이라고 믿지만, 실제로 살만의 원고는 다름 아닌 막스 하벨라르(Max Havelaar)라는 이상주의적 젊은 식민지 관료의 인도네시아 상황의 관람기이다.

반세계화 운동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다

그 원고를 정리하는 스테른(Stern·별처럼 밝은 이)이라는 또 하나의 이상주의자의 목소리가 무대를 장악하다가 맨 끝에는 궁극적 화자인 저자 데커 자신이 나타나 드루크스토펠에게 ”커피 속에 빠져서 죽어라!“고 소리친다. 물론 네덜란드 문학에서 최초의 다성적(多聲的) 작품인 이 소설이 지적한 것은 드루크스토펠이라는 패러디적 욕심쟁이가 아니라 데커의 표현대로 ‘해적국가’인 네덜란드와 유럽 중심의 세계적 착취 체제다.

대성공을 거둔 이 소설이 ‘강제재배 체제’의 철폐에 불을 지폈다는 의미에서 현실적으로도 효과를 발휘했다. 데커 자신은 끝까지 가난뱅이로 죽었지만 오늘날 네덜란드에서는 물타둘리 기념관과 물타둘리 협회, 하벨라르 커피 상표 등을 찾을 수 있다. 역설적으로 네덜란드를 ‘해적국가’로 본 데커의 책이 19세기 네덜란드 문학의 정전(正典)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반란이 제도화된 것인가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 죽은 데커를 제도권이 인정했지만, 진정한 개인주의자였던 산 데커의 정신은 지금도 반세계화 운동가 등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100년 전의 반란자 데커가 오늘의 반란자들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다.

참고 자료:

1. 영역본의 구매 정보:

http://www.amazon.com/exec/obidos/tg/detail/-/0140445161/104-4262223-7077539v=glance

2. 의 영역:

http://home.zonnet.nl/multatuli-museum/translations/ignorant.html

3. 물타둘리 기념관 사이트:

http://www.multatuli-museum.nl/

4. 데커의 연보:

http://www.multatuli-museum.nl/en/multatuli/biography.html

5. 데커의 저서 목록:

http://www.multatuli-museum.nl/en/multatuli/bibliography.html

6. 의 디지털 원본 (네덜란드어):

http://cf.hum.uva.nl/dsp/ljc/multatuli/

7. 토에르라는 인도네시아 작가의 데커 관련 기사 (영문):

http://www.stelling.nl/konfront/4e1999/6903.html

8. 제3세계와 제1세계의 ‘공정한 거래’를 감독하고 ‘공정한 조건’으로 수입한 제3세계 상품에 ‘하벨라르’ 상표를 부여하는 “막스 하벨라르” 재단 (네덜란드):

http://www.maxhavelaar.nl/

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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