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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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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대 일본을 다스렸다?

등록 2003-12-05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size="2" color="663300">서로 미워하면서 닮은 사이, 북한은 일제의 엉터리 ‘임나일본부설’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font>

필자는 북한의 민족주의(종전의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내지 1980년대 이후의 ‘조선민족 제일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인 발언을 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 민족주의가 폐단이 많아도 북한의 경우에는 초강경 민족주의의 출현이 불가피하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김일성 주도의 빨치산 그룹이 일제와 싸우는 과정에서 중국의 동지로부터 민족적 차별 대우와 ‘일제 간첩 색출’ 미명하의 유혈 박해를 당한데다 건국 이후에도 제국주의에 맞서면서 동시에 중국과 소련의 패권주의를 탈피하려고 진력을 다하지 않았던가? 위로부터 동원의 명분이 된 극단적 민족주의가 일제와 한국전쟁 때 ‘외적’으로부터 피해를 본 ‘인민’들에게 잘 와 닿지 않았던가?

처음부터 일본과 미국, 소련과 중국의 거대 제국주의적 내셔널리즘들과의 복잡한 협력·갈등의 관계에 휘말린 북한으로서 강력한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 형성은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적 배경을 이해했음에도 북한 민족주의의 ‘반제 투쟁적 성격’을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구석이 있다. 그 투쟁 방식이 그들의 저주와 증오의 대상이 된 제국주의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 ‘납치’했는가

지난번 김정일 위원장이 일본인 납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일본의 우파뿐 아니라 미국과 남한의 우파들까지도 황금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을 악마화하는 일본 우파들이 잊은 게 있다. 과연 한반도에서 ‘타자’들을 납치하는 방법을 ‘신성한 국사(國事)’에 동원하는 국가주의적 근대정치를 누가 먼저 폈는가? 납치와 다름없는 방법으로 조선인을 징용했던 일제가 아닌가? 결국 조선인들이 과거에 당한 국가 차원의 납치라는 것을, 극단적 민족주의의 화신인 북한이 제국주의로부터 배워 훨씬 적은 규모로, 특수한 경우에 한해서 ‘적대적 타자’로 인식되는 일본인에게 ‘베푼’ 것이다. 일제와의 투쟁 경력을 ‘윤리적 자본’으로 이용하는 북한 정권이 일제의 행동 방법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을, 일제를 옹호하는 일본 극우들로서는 오히려 이해해주는 편이 순리일 터이다.

어떤 집단이나 정권이든 간에 그 욕망의 구조가 가장 명백하게 나타나는 것은 역사관이다. 과거의 사실들을 재료 삼아(그 재료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못 알아볼 정도로 가공되는 경우가 많다) 현재와 미래를 규범화·범주화·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구조물을 만드는 것은 고금의 사학자들 밥벌이다. 이와 같은 ‘역사 만들기’의 교과서적인 사례는 ‘국가’라고 부르기조차 힘든 4세기의 일본(야마토 정권)이 가야(임나)를 정벌해서 562년까지 식민 통치했다는 일본 근대 사학의 허구인 ‘임나일본부설’이다. 조선인에게는 열등감을, 일본인에게는 끝없는 우월감과 식민통치 명분을 안겨준 임나일본부설.

중국 최초의 국가인 상은(商殷·기원전 약 1700~1027년)의 문화가 유럽인과 같은 어족(語族)에 속하는 월씨(月氏·tocharians)의 조상에 의해서 만들어졌다(즉, 중국인들은 국가 창조의 능력이 없고 백인들이 그들에게 국가를 만들어주었다)라고 본 과거 일부 서구 및 소련 학자의 고대 중국사관과 고대 인도 문화를 전적으로 아리안족(인도·유럽 어족의 백인)의 작품으로 본 영국의 제국주의적 인도사관과 함께 임나일본부설은 제국주의적 침략과 패권정치를 합리화하는 역사 서술의 표본을 보여준다.

북한 사학자 김석형의 충격적 논문

이 제국주의적 야망에 찬 허구에 북한의 민족주의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자료를 검토해보면 ‘임나일본부’와 같은 명칭이 과연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고(4~6세기에 일본이란 말조차 없었으니 후대의 명칭임이 명백하다), (日本書紀·720년 완성)라는 후대의 사료가 왜 임나일본부를 통치기관으로 만들어서 내세웠는지를 당대의 문맥으로 설명하는 것은 일제 허구에의 학술적 대응의 최적 방법이었을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의 주된 근거인 를 검토해보면 이 책이 사실들을 그 당시 일본 통치 집단의 욕망대로 심하게 가공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민족주의적 사학은 완전히 상반된 방향으로 갔다. 고대 일본이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통치했다는 것이 일제의 어용학설이었다면 고대 조선인들이 일본 열도의 상당 부분을 통치했음은 북한의 어용학설이 됐다.

북한의 저명한 사학자 김석형(金錫亨·1915∼96)이 1963년 에 ‘삼한 삼국의 일본 열도 내 분국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실을 당시만 해도 북한 학계의 성과를 예의주시했던 일본 사학계는 일대 충격을 받았다. ‘임나일본부설’을 철석같이 믿은 보수쪽이든, 반박할 근거는 찾지 못해도 이 학설이 일제에 의해서 크게 이용됐다는 점 때문에 상당한 의문을 가진 진보쪽이든, 모두 ‘임나’가 바로 한반도의 가야 지역임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석형의 주장은 ‘임나’라는 것은 가야계 이민자들이 오늘의 히로시마 동부와 오카야마 지역에서 건국한 한반도 계통의 ‘분국’(分國)이었으며, 에서 ‘임나’와 각축했던 것으로 묘사되는 신라나 백제, 고구려도 역시 해당 국가들의 일본 열도 내 ‘분국’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임나일본부’도 저절로 야마토 정권이 오카야마쪽에서 세운 통치기관쯤으로 탈바꿈된다. 한반도에서의 ‘임나’가 사라지고, 고대 일본의 상당 부분이 과거의 ‘우리’(삼국의 이주민)가 통치하는 옛 식민지로 판명되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고대 한반도 남부 식민통치설’이 조선 민족주의의 ‘고대 일본 열도 남부 식민통치설’로 변형됐다. 일제의 관학자보다 김석형이 진일보한 부분이 있다면, 등의 초기 한국 자료를 무시·부정하지 않고 의 초기 기록들을- 매우 ‘창조적인’ 방법이지만-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초기의 충격이 가라앉은 뒤, 일본 학자들과 ‘형제 국가’ 중국·소련의 학자들까지도 그의 학설을 반박하기 시작했다. 를 비롯한 한반도의 사료에서도 ‘임나’라는 말이 나오기에 “임나가 한반도에 없었다”고 주장하기 어려운데다, 김석형이 일본의 문헌·고고학적 자료를 너무나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 불 보듯 훤하기 때문이다. 이후 김석형의 ‘분국설’은 본국 북한에서 교과서가 내세우는 정설이 됐다.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는 코드가 같다?

물론 “우리가 고대 일본 열도를 다스렸다”고 믿는 북한의 집권층은 일본 침략을 꿈꾸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일제 못지않게 ‘우리의 힘’ ‘우리의 군사력’ ‘우리의 용감무쌍한 상무 정신’을 신성시하고 그 이데올로기를 동원의 대상인 민초에다 성공적으로 주입시킨다. 상황과 목적이 다르지만, 북한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의 ‘전국 군사화·요새화’를 과거와 현재 속에서 실천하고 있다.

민족주의적 근대가 꼭 제국주의의 폭력적인 근대성의 궤도를 따라야 하는가 적어도 한반도의 경우 국가적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근본적인 ‘코드의 차이’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제국주의적 세계 질서에의 편승을 주된 목적으로 삼은 구한말·일제의 ‘자강론’이나 ‘실력양성론’, 남한의 어용 국가주의는 물론 대외적으로 세계 체제와 대결해온 북한의 ‘혁명적인 민족주의’는 모두 ‘제국주의 가치의 내면화’를 본질적인 특징으로 한다. 물론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를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응하여 한반도 주민들의 생존권을 지키는 것은 남북 양 민중의 일차적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필요한 것은 남북의 통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민중 입장에서의 분석과 비판이다. 우리 마음속의 제국주의, 우리가 내면화한 군사주의와 폭력주의를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야사 관련 사이트]
1. http://www.gayasa.net/ (포털 사이트)
2. http://todori.inje.ac.kr/~kaya (인제대 가야서 연구소)
3. http://www.hongik.ac.kr/%7Ekayakim/ (홍익대 김태식 교수-가야 연구자)

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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