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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로 독트린’의 살생부, 다음 차례는 누구인가?

콜롬비아, 멕시코, 쿠바, 니카라과 언제든 사정권… 그린란드 탐내며 나토 향해 노골적 으름장
등록 2026-01-09 15:43 수정 2026-01-13 06:29
2025년 3월6일 소형 선박이 살얼음을 깨고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 수도 누크로 향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2025년 3월6일 소형 선박이 살얼음을 깨고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 수도 누크로 향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납치 사건을 성공시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더는 거칠 게 없어 보인다. 벌써 ‘다음 표적’을 거론하며 한껏 호기를 부리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사정권으로 삼더니, 한 발짝 훌쩍 더 나아간다. 이번엔 동맹국이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창설 회원국인 덴마크다.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던 유럽연합(EU)은 아연 긴장한 모양새다.

남미 네 나라 향해 위협 되풀이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 직후 위기감이 최고조까지 치달은 건 베네수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콜롬비아다. 트럼프 대통령도 2026년 1월3일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을 겨냥해 “등 뒤를 조심하라”고 재차 경고했다. 2025년 9월 초 미국이 이른바 ‘마약운반 의심 선박’ 공습작전에 들어간 이후 트럼프 대통령과 페트로 대통령 간 ‘말의 전쟁’은 급격히 수위가 높아졌다. 미국 재무부는 2025년 10월 페트로 대통령을 ‘마약 카르텔 두목’으로 규정하고 그의 부인과 함께 제재 대상에 올렸다.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마두로 대통령과 페트로 대통령 사이엔 이 밖에도 공통점이 많다.

세계 1위인 베네수엘라에 견줄 순 없지만, 콜롬비아도 세계 30위권인 20억 배럴 이상의 원유 매장량을 자랑한다. 금·은·에메랄드·플래티넘·석탄 등 광물자원도 풍부하다. 마두로 대통령이 일찌감치 노동운동으로 잔뼈가 굵었다면, 페트로 대통령은 17살 나이에 무장 게릴라 조직에 가담한 ‘전사’ 출신이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선 ‘돈로 독트린’을 발동할 조건을 다 갖춘 셈이다. 페트로 대통령은 2025년 10월19일 시엔엔(CNN) 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나는 트럼프 대통령처럼 사업가가 아니다. 나는 사회주의자다. 연대와 공동선의 힘을 믿고 인류가 자원을 고르게 나눠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때도, 지금도, 트럼프 대통령은 “코카인 생산을 중단시키지 않으면 콜롬비아 영토 안에서 미국이 직접행동에 나설 것”이란 위협을 되풀이하고 있다.

미국과 국경을 맞댄 멕시코의 클리우디아 셰인바움 대통령도 엇비슷한 ‘말폭탄’에 직면해 있다. 마약 밀매와 불법이민자 유입을 양대 안보 위협으로 규정한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가 문제 해결 능력이 없다면, 미국이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위협해왔다. 장기집권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오랜 숙적인 쿠바와 니카라과에 대한 군사적 위협도 계속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베네수엘라 침공 이후 “쿠바 정권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미국이 따로 행동을 취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콜롬비아도 멕시코도 쿠바도 니카라과도 언제든 ‘베네수엘라’가 될 수 있다. 전쟁의 음험한 기운이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뒤덮고 있다.

2026년 1월7일 콜롬비아 서부 바예델카우카주 칼리에서 열린 반미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의 얼굴 사진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2026년 1월7일 콜롬비아 서부 바예델카우카주 칼리에서 열린 반미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의 얼굴 사진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유럽 7개국 “북극권 안보, 나토가 지켜야”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 초기부터 그린란드 합병 의지를 공식화했다. 베네수엘라 침공 직후엔 더욱 노골적으로 “필요하다면 군사적 수단도 배제하지 않겠다”고 위협 수위를 높였다. 베네수엘라 사태에 미온적으로 대응했던 유럽 쪽이 미국과 날을 세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독일·프랑스·영국 등 유럽 7개국 정상은 1월6일 공동성명을 내어 이렇게 강조했다. “북극권 안보는 유럽의 핵심 과제이자 대서양 양안과 국제 안보의 관건이다. 북극권 안보는 미국을 포함한 나토 동맹국이 집단적으로 지켜야 한다. 또 주권과 영토보전, 불가침이란 유엔 헌장의 원칙도 준수돼야 한다.”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엔 피투피크 미국 우주군 기지가 있다. 국외 미군기지 가운데 최북단에 자리한 곳으로, 미국 본토를 노린 미사일 공격을 탐지하는 핵심 기지다. 2025년 3월28일 그린란드를 방문한 제이디 밴스 미국 부통령이 피투피크 기지를 둘러봤다. 그는 현지에서 “그린란드와 북극 안보에 필요한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북극을 중국과 러시아에 넘길 셈이냐”라며 덴마크 정부를 겨냥해 격한 발언을 쏟아냈다. 반면 그린란드 자치정부를 향해선 “덴마크보다 미국의 안보우산 아래 있는 게 안전하다”고 강조했다.

그린란드는 216만㎢의 면적을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이지만, 81%가 빙하다. 5만6천여 명 인구 가운데 88%는 12세기에 정착한 원주민(이누이트)이다. 18세기 덴마크가 식민화했는데, 1953년 자치권이 부여됐다. 교육·복지·조세 등 국내 정책은 그린란드 자치정부가, 외교·국방·안보 등 대외정책은 덴마크 정부가 맡고 있다. 2008년 1월 법적 구속력이 없는 주민투표가 실시됐을 때 유권자의 75.5%가 자치권 확대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에 따라 덴마크 정부는 이듬해 관련법 개정을 통해 그린란드 자치정부가 운영 능력을 확보하는 대로 33개 항목에 이르는 국정과제를 넘겨주기로 했다. 2024년 기준 전체 수출액의 97.8%(약 51억6천만유로)를 차지할 정도로 그린란드 경제는 어업 의존도가 높다.

트럼프가 탐낼 조건 두루 갖춘 그린란드

북대서양과 북극해가 마주치는 그린란드는 전략적 요충지다. 미국 본토에서 약 3200㎞,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약 4400㎞ 떨어져 있다. 안보 측면뿐이 아니다. 기후위기 등으로 빙하가 급속히 녹으면서, 중국과 러시아 등이 앞다퉈 북극 항로 개척을 위해 몰려들고 있다. 덴마크-그린란드 지질조사국이 2023년 펴낸 보고서를 보면, 그린란드에는 유럽연합이 지정한 34개 핵심 광물자원 가운데 25개가 매장돼 있다. 특히 ‘첨단산업의 비타민’으로 불리는 희토류 매장량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관심을 가질 조건을 두루 갖춘 게다.

문제는 그린란드가 나토의 일원이란 점이다. 북대서양조약 제5조는 회원국 중 한 나라가 외부 공격을 받으면, 동맹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집단으로 대응하도록 명시했다. 이른바 ‘집단적 자위권’이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벌어진 ‘테러와의 전쟁’에 나토 회원국이 대거 동참한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이 그린란드를 합병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면 어떻게 될까? ‘외부’가 아닌 ‘내부’의 공격에도 ‘집단적 자위권’을 발동할 수 있을까? 냉전도 이겨낸 나토 체제를 ‘돈로 독트린’이 통째로 집어삼킬 기세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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