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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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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우선주의의 기괴한 진화 ‘돈로 독트린’ 쇼크

베네수엘라·원유에 대한 트럼프의 오래된 집착… 유엔 헌장과 인류 평화를 위협하다
등록 2026-01-09 15:42 수정 2026-01-12 14:57
2026년 1월3일 미군에 체포·납치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미국 뉴욕의 군공항에 도착한 뒤 마약단속국(DEA) 요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REUTERS 연합뉴스

2026년 1월3일 미군에 체포·납치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미국 뉴욕의 군공항에 도착한 뒤 마약단속국(DEA) 요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REUTERS 연합뉴스


잠자리에 든 주권국가의 대통령 숙소로 한밤중 외국 특수부대가 들이닥쳤다. 저항하는 경호인력은 모조리 사살됐다. 납치된 대통령 부부는 외국 군함으로 끌려갔다. 눈과 귀는 가려졌다. 물병 든 손엔 수갑이 채워졌다. 그 모습이 촬영돼 소셜미디어에 올려졌다. 납치된 대통령 부부는 외국으로 끌려가 구금됐다. 재판에 회부된 그들이 중무장한 병력에 이끌려 외국 법원에 출두했다. 비슷한 시각 법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선 ‘국제평화의 담지자’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초현실적이다.

“우리 연합국 국민은 우리 일생 중 두 번이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인류에게 가져온 전쟁의 재앙으로부터 다음 세대를 구하고 기본적 인권, 인간의 존엄 및 가치, 남녀 및 대소 각국의 평등권에 대한 신념을 재확인하며 (…) 관용을 실천하고 선량한 이웃으로서 상호간 평화롭게 같이 생활하고, 국제 평화와 안보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의 힘을 합하며,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음을 원칙의 수락과 방법의 도입을 통해 보장하고….”(유엔 헌장)

처음 그들은 민주주의를 앞세웠다. 부정선거와 인권탄압을 문제 삼았다. 그다음엔 마약밀매를 문제 삼았다. 그다음엔 불법이민자 유입을 문제 삼았다. 이제 그들은 ‘원유, 원유, 원유’만 입에 올린다. 굳은 맹세는 부질없다. 두 차례 세계대전에도 인류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 스티븐 밀러 미국 백악관 부비서실장 겸 국토안보보좌관은 천연스레 말했다. “국가의 주권과 독립을 보장한 국제조약은 외교적 격식 차리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힘과 무력, 권력이 지배하는 현실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 그게 태초부터 변함없는 철칙이다.”(2026년 1월5일 시엔엔(CNN) 방송 인터뷰)

패권이 무너진 자리에서 힘 빠진 제국이 무모한 역습을 시도하고 있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가운데)이 2024년 2월29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린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의 ‘반제국주의 선언’ 20돌 기념집회에서 참석자들에게 손을 뻗어 인사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가운데)이 2024년 2월29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린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의 ‘반제국주의 선언’ 20돌 기념집회에서 참석자들에게 손을 뻗어 인사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공산주의 국가가 있다. 예전엔 그저 ‘거대 정부’라고 불렀다. 이젠 마르크스주의, 파시스트, 공산주의라고 부르겠다. 거대 정부는 지나치게 부드러운 표현이지 않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23년 6월10일 공화당 노스캐롤라이나주 전당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재선 도전에 본격 시동을 건 시점이다. 1시간30분 남짓 이어진 장황한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베네수엘라’를 일곱 차례 언급했다. 그는 “내가 백악관을 막 떠났을 때만 해도 베네수엘라는 거의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장악해 원유를 전부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베네수엘라에서 원유를 수입하고 있다. 그 결과 독재자가 부자가 됐다”고 주장했다. ‘베네수엘라’와 ‘원유’는 트럼프 대통령의 오랜 집착이다.

마두로에게 망명지까지 지정한 미국

“역사상 가장 놀랍고, 효과적이며, 강력한 방식으로 미국의 막강한 군사적 힘과 능력을 여실히 보여줬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6년 1월3일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사저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부부를 ‘체포-납치-이송-구금’한 사건을 두고 한 말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작전명 ‘확고한 결의'를 위한 준비는 2025년 8월 중앙정보국(CIA) 공작팀이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로 잠입하면서 본격화했다.

공작팀의 임무는 하나였다. 마두로 대통령에 관한 모든 정보, 특히 그의 동선을 파악하는 것이다. 공작팀은 마두로 대통령의 주변 인물 접촉을 통한 ‘휴민트’(인간정보)와 스텔스 무인기와 정찰기 등을 통한 ‘시긴트’(신호정보)를 종합해, 마두로 대통령의 일상을 분 단위까지 세밀하게 파악했다. 댄 케인 미국 합동참모의장이 1월3일 회견에서 마두로 대통령이 “어디에 있었는지, 뭘 먹었는지, 어떤 반려동물을 키우는지도 소상히 알게 됐다”고 말한 것도 과장이 아니었다.

2026년 1월3일 미군의 공습을 당한 베네수엘라 라과이라항구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 모습을 주민들이 내려다보고 있다. AP 연합뉴스

2026년 1월3일 미군의 공습을 당한 베네수엘라 라과이라항구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 모습을 주민들이 내려다보고 있다. AP 연합뉴스


미군 합동특수작전사령부(JSOC)가 켄터키주에 건설한 마두로 대통령의 숙소 모형에서 육군 최정예 델타포스 특공대가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훈련을 시작했다. 최대한 빠르게 숙소의 강철문을 파괴하고 진입해 마두로 대통령 부부를 끌어내는 훈련이 반복됐다. 미국의 군사적 위협 수위가 높아지자, 마두로 대통령은 6~8개 장소를 옮겨가며 생활했다. 늦은 밤에야 당일 숙소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행정부 당국자의 말을 따 “12월23일 마두로 대통령에게 베네수엘라를 떠나 튀르키예로 망명하라는 최후통첩이 전달됐다”고 전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분연히 거부했다.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월2일 오후 4시30분께 미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리브해 일대 20개 미군 기지와 해상에 배치된 함정에서 전투기, 폭격기, 정찰기, 특수전기, 전자전기, 수색구출용 헬기 등 150대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날 밤 10시46분께 트럼프 대통령의 ‘작전 개시 명령’이 떨어졌다. 이윽고 수도 카라카스를 포함한 베네수엘라 각지에서 섬광과 함께 굉음이 들려왔다. 레이더와 통신탑 등 방공망을 겨냥한 공습이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카라카스가 혼돈에 빠진 1월3일 새벽 2시1분께 델타포스 특공대가 탄 헬리콥터가 마두로 대통령 부부가 머물고 있는 숙소로 들이닥쳤다. 특공대는 건물 진입 5분 만에 마두로 대통령 부부의 신병을 확보했다. 마두로 대통령 부부가 카리브해에 정박한 미 해군 강습상륙함 이오지마로 끌려간 시각은 새벽 4시29분께다. 두 사람은 다시 쿠바 관타나모의 미 해군기지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대기 중이던 연방수사국(FBI) 보유 항공편으로 미국 뉴욕 맨해튼 북부 군공항에 도착한 마두로 대통령 부부는 곧바로 뉴욕 브루클린의 메트로폴리탄 구치소에 입감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6년 1월3일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사저에서 베네수엘라 군사작전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UPI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6년 1월3일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사저에서 베네수엘라 군사작전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UPI 연합뉴스


 

미국 대 ‘비미국’… 안보리에서 벌어진 설전

“모든 회원국은 국제관계에서 다른 국가의 영토 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에 반하는 무력 사용 및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위협을 삼가고, 국제연합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그 밖의 어떠한 방식으로도 무력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유엔 헌장 제2조 4항이다.

그런데 유엔 회원국인 미국이 같은 회원국이자 주권국가인 베네수엘라의 영토에서 무력을 사용해 마두로 대통령 부부를 납치했다. 명백한 유엔 헌장 위반이자 국제법 위반이다. 1월5일 ‘마약 테러’ 등의 혐의로 기소된 마두로 대통령 부부가 뉴욕 남부연방법원에 출두했다. 같은 시각 법원에서 불과 5㎞ 남짓 떨어진 유엔본부에선 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당사국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한 사무엘 몬카다 주유엔 베네수엘라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주권국가의 수반이 납치된 사건을 용인해선 안 된다. 인류에게 치명적인 메시지가 될 것이다. 법치는 선택사항일 뿐 국제질서의 진정한 중재자는 군사력이란 결론에 이를 수 있는 탓이다. 베네수엘라는 법적 정당성이 없는 불법 무력 공격의 표적이 됐다. 미국은 베네수엘라 영토를 공습했고 민간인과 군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리고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과 영부인 실리아 플로레스는 납치됐다.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공격한 건 천연자원(원유) 때문이란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 미국은 국가수반과 그 부인에게 부여된 국제법적 면책특권을 존중하라. 그들을 즉각 석방해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게 하라. 베네수엘라에 대한 무력 사용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비난해야 한다. 다른 나라의 영토와 자원을 무력을 동원해 빼앗을 수 없다는 원칙은 재확인돼야 한다. 안보리는 긴장을 완화하고, 민간인을 보호하고, 국제법을 준수하는 데 필요한 조처에 나서라.”

마이클 왈츠 주유엔 미국대사는 전혀 다른 주장으로 맞섰다.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니콜라스 마두로는 정당성을 갖춘 국가수반이 아니다. 그는 2024년 부정선거로 집권했다. 둘째, 2026년 1월3일 군사작전은 미국과 지역 안보를 위협하는 마약밀매와 다국적 범죄조직 소탕을 위해 필요했다. 미국 검찰이 기소한 범죄자를 체포하기 위해 정당한 법 집행을 했을 뿐이다. 셋째, 미국은 베네수엘라 정부와 베네수엘라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점령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서반구를 다시 ‘미국 뒷마당’ 삼으려는 야욕

마두로 대통령이 ‘국가수반’임을 부정한 건 “주권국가의 수반은 타국의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국제관습법이 부여한 포괄적 면책특권을 인정하지 않기 위한 포석이다. ‘정당한 법 집행’이란 주장은 유엔 헌장 위반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꼼수다. ‘전쟁도, 점령도 없다’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과 러시아뿐이 아니다. 미국의 동맹국과 이웃 나라 대사들도 날 선 비판을 쏟아냈다.

“마두로 대통령 부부 체포로 귀결된 군사작전은 평화적 분쟁 해결과 무력 불사용 원칙에 정면으로 반한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국제법과 유엔 헌장을 저버리면, 국제질서의 근간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제이 다르마디카리 주유엔 프랑스 차석대사)

“이번 사태는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 국제법과 유엔 헌장은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산드라 옌센 란디 덴마크 차석대사)

“트럼프 행정부의 행태는 과거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개입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미국은 국제평화와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레오노르 살라바타 토레스 주유엔 콜롬비아대사)

2025년 12월5일 백악관 누리집에 공개된 트럼프 행정부 집권 2기의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는 “서반구에서 미국의 압도적 우위를 복원하기 위해 오랜 기간 방치됐던 먼로 독트린을 다시 집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겸하고 있는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미국과 미국 우선주의에 집중하려면, 당연히 미국이 속한 서반구(남·북아메리카)를 출발점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군사작전이 감행된 2026년 1월3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식료품 상점 앞에 주민들이 길게 줄 서 있다. AFP 연합뉴스

미국의 군사작전이 감행된 2026년 1월3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식료품 상점 앞에 주민들이 길게 줄 서 있다. AFP 연합뉴스


 

실제 캐나다 합병과 파나마운하 ‘접수'를 선포하고 출범한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서반구 각국 내정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쿠데타 혐의로 기소된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석방하라고 브라질 정부를 압박했다. 온두라스에선 아예 입맛에 맞는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원해 당선시켰다. 마약 단속에 미온적이라며 멕시코와 콜롬비아를 군사적으로 위협했다. 장기 집권 체제가 유지되는 쿠바와 니카라과를 겨냥해선 ‘정권교체'를 거론했다. 서반구를 다시 ‘미국의 뒷마당’으로 삼은 모양새다.

히틀러 “우리도 미국과 똑같은 독트린 가져”

“먼로 독트린은 조약도 법률도 아니다. 1823년 미국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독립을 승인하며, 유럽을 향해 서반구에서 추가 식민지를 만들지 말라고 경고한 성명일 뿐이다. 애초 먼로 독트린은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신생독립국이 ‘신세계 공동체'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후 미국 대통령들은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군사적 점령과 친미 쿠데타를 시도할 때마다 마치 법원이 발부한 영장인 양 먼로 독트린을 들이밀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 낡은 외교적 구호를 외교정책의 철학으로 다시 꺼내는 건 이해할 만하다.”

그레그 그랜딘 미국 예일대학 사학과 교수는 2025년 12월15일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국가안보전략 보고서가 ‘먼로 독트린의 트럼프식 변주’로 표현한 ‘돈로(도널드+먼로) 독트린’이 주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자유무역과 다자주의, 법치를 통한 갈등 해결을 세 기둥으로 삼아 국제질서를 세웠다. 트럼프 행정부는 보호무역과 일방주의, 법치에 대한 철저한 무시로 일관하고 있다. 옛 질서는 무너졌다. 국가안보전략 보고서는 “안보와 번영의 조건으로 미국이 서반구에서 압도적 국가가 돼야 한다. 언제 어디서든 미국의 국익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돈로 독트린의 실체는 미국의 국익을 위해 라틴아메리카를 외부로부터 봉쇄·고립시키는 것이다. 미국 우선주의의 기괴한 진화다. 그랜딘 교수는 이렇게 짚었다.

“세계질서가 각축하는 ‘영향권의 경쟁’으로 바뀌었다. 각 지역 패권국은 자국의 텃밭을 관리해야 한다. 러시아에는 옛 소련 국가들이 그렇고, 중국에는 대만과 남중국해 일대가 그렇다. 미국에는 라틴아메리카가 있다. (…) 1931년 만주를 침공했을 때, 일제도 자기식 먼로 독트린을 설파하며 서구 열강의 간섭을 배제했다. 영국도 대영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영국식 먼로 독트린’을 설파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주변국의 주권을 존중하라’고 요구하자 이렇게 답했다. ‘우리 독일도 미국과 똑같은 독트린을 유럽에 대해 갖고 있다.’ 세계가 두 번째 대전으로 향해가는 시점에 교전 당사국 대부분이 나름의 먼로 독트린을 갖고 있었던 게다.”

2026년 1월4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반전집회에서 참석자들이 평화를 기원하는 펼침막을 앞세워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신화 연합뉴스

2026년 1월4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반전집회에서 참석자들이 평화를 기원하는 펼침막을 앞세워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신화 연합뉴스


나토 사무총장 “조부모 때처럼 전쟁 대비해야”

미국이 만든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미국 손으로 무너뜨렸다. ‘돈로 독트린’은 “미국은 위협을 감지하면 언제든 일방적으로 대응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 살풍경이 낯익다. 세계를 무대로 벌인 ‘테러와의 전쟁’의 핵심 논리이기 때문이다. 무시로 위협하고, 제재를 선포하고, 해상을 봉쇄하고, 선박을 나포하고, 주권국 영토를 침범해 국가수반을 납치한다. 사방이 전쟁터다.

“우리 조부모와 증조부모 세대가 겪었던 전쟁과 같은 규모의 전쟁에 대비해야 할 때다.”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사무총장은 2025년 12월11일 뮌헨안보회의 주최로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을 염두에 둔 발언일 터다. 베네수엘라 사태에 이어 미국이 나토 동맹국인 덴마크령 그린란드까지 넘보는 지금, 유럽은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도 대비해야 하는가? 스티븐 밀러 백악관 부비서실장 겸 국토안보보좌관은 1월5일 시엔엔(CNN) 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그린란드의 미래를 두고 누구도 미국과 군사적으로 맞서려 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 안보리가 논의해야 할 문제는 베네수엘라 정부가 어떤 정부인지가 아니다. 특정 회원국이 군사력이나 강압, 경제적 압박을 통해 베네수엘라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하거나 내정을 통제할 권리가 있느냐다. 이 문제는 유엔 헌장 제2조 4항과 직결돼 있다. 해당 조항은 회원국의 영토적 정합성이나 정치적 독립을 해칠 수 있는 무력 사용 위협이나 무력 사용 일체를 금하고 있다. 안보리는 그 원칙이 지켜져야 하는지 폐기해도 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만약 이를 폐기한다면 엄중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1월5일 안보리 회의에 화상으로 참석한 제프리 색스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전문가 증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미국 정치학자 린지 오로크의 ‘은밀한 정권교체: 미국의 비밀냉전’(2018년) 내용을 따 “1947~1989년 미국이 외국의 정권교체를 시도한 게 70차례에 이른다”고 말했다. 냉전이 끝나고도 달라지지 않았다. 1989년 이후 미국은 안보리의 승인 없이 이라크(2003년)·리비아(2011년)·온두라스(2009년)·우크라이나(2014년) 등지에서 정권교체를 시도했다. 전면전, 비밀첩보 작전, 혼란 조장, 무장단체 지원, 여론 조작, 뇌물 전달, 표적 암살, 가짜뉴스 확산, 경제적 압박 등 방식도 다양했다. 색스 교수는 이렇게 덧붙였다.

제프리 색스 “인류의 평화와 생존이 걸렸다”

“오늘 안보리 이사국은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소집된 게 아니다. 미국의 군사 공격과 지속되는 해상봉쇄가 베네수엘라 국민에게 자유를 줬는지 예속시켰는지 판단하기 위해 소집됐다. 국제법과 유엔 헌장을 지키기 위해 소집됐다. 헌장이 부여한 책임을 이행하기 위해 소집됐다. 헌장이 국제법의 살아 있는 도구로 남을지 허깨비로 사라질지에 인류의 평화와 생존이 걸려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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