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대화 부재 속에 한반도 위기 국면이 장기화하고 있다. 집권 1기 때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에 나섰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은 한반도에서 현상 변경의 신호탄이 될 수 있을까?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은 한겨레21과 한 인터뷰에서 “북-미가 한국을 배제한 채 직접 협상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한국이 배제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인터뷰는 2024년 11월11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1시간 남짓 진행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를 어떻게 평가하나?
“선거는 자기 지지층을 얼마나 결집하느냐가 핵심이다. 미국 대선 결과를 보면 트럼프 지지층은 많이 줄어들지 않았는데,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기존 민주당 지지층을 모두 모아내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전쟁에 대한 미온적인 대응도 젊은층의 투표 참여율을 떨어뜨렸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경제였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코로나19 대유행이 끝난 뒤 막대한 자금을 풀어 경기를 끌어올렸다. 돈이 많이 풀리니 물가와 금리가 올라갔다. 예산 투입의 혜택은 양극화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간 차별적 효과가 크다보니 대중적 불만이 쌓였다. 이 불만이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 또는 민주당에 표를 주지 않는 것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주의’는 미국 우선주의다. 외교적으론 고립주의, 경제적으론 보호무역주의를 지향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와 차별화하지 못했다. ‘중산층을 위한 외교’를 표방하면서도 미국의 전통적인 ‘개입을 통한 질서유지’란 노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중간한 노선이었다. 어중간한 노선과 선명한 고립노선이 정치란 시장에 나왔을 때, 어중간한 쪽은 표를 얻기 어렵다. 전통적인 진보·좌파도 불만이고, 국내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유권자층도 ‘부족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태도는 우리 정치권에도 시사점이 크다. 어중간한 노선으론 표를 얻을 수 없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이 세계적 파장을 부르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으로 미국이 고립주의로 돌아서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고 중동에도 평화가 올 것으로 기대하는 시각이 있다. 물론 미국이 개입해 국제질서를 주도하던 시대는 끝났지만, 그렇다고 고립주의가 저절로 평화를 불러오진 않는다. 미국이 개입을 철회했을 때 분쟁지역에서 협상을 중재하고 쟁점을 좁히는 역할은 누가 할 것인가? 장기적으로 보면 일정한 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분쟁 해결을 위한 협상은 부동산 거래와 다르다. 부동산은 후려쳐서 싼값에 살 수도 있지만, 분쟁은 단번에 해결되지 않는다. 특히 행위자가 다수인 복잡한 분쟁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당사자 간 합의를 하더라도 위기는 또 찾아온다. 합의와 위기를 반복하며 고비를 넘겼을 때, 일정한 시간을 두고 화해와 평화 국면으로 넘어가게 된다. 부동산 거래하듯 단판 승부로 해결이 가능한 분쟁은 없다.”
―한반도 정세와 관련해 다시 한번 판을 뒤집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는데.
“트럼프 행정부 1기 때의 정책 결정 구조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실패 사례를 놓고 보자. 첫째, 트럼프 전 대통령은 북핵 관련 보고서를 전혀 읽지 않았다. 역사가 있고 쟁점이 있는데, 그런 것엔 관심이 없다. 둘째, 인사에도 일정한 규칙이 없다. 네오콘도 전통주의자도 쓸 수 있고, 2기 때는 충성파를 중용하겠다고 한다. 과연 그 사람들이 대통령과 얼마나 긴밀하게 조율하면서 위기 때 해법을 마련할 수 있을까? 셋째, 부처와 부처 간 협력이 없다. 하노이 회담 결렬 때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와 국무부가 서로 원수처럼 굴었다. 실무 협의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협상안 조율 과정도 없었다. 이렇게 되면 실무 협상을 아무리 해도 대통령의 뜻과 다를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사전 협상도, 정상회담 결과 이행을 위한 후속 협상도 어려워진다.
다만 일정한 긴장 완화 효과는 있을 것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간 인연 때문이다. 정상 간 ‘호감’은 그 자체로 긴장 완화 효과가 있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다시 편지를 보낼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한국을 통하지 않고, 북-미 간 직접 접촉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이다. 김 위원장은 남쪽을 경유하지 않는 북-미 접촉을 선호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바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도 ‘직거래’를 선호할 것이다. 어느 날 북한이 ‘대통령 트럼프’의 친서를 공개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이럴 경우 한국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게 된다. 북-미가 직접 접촉을 통해 협상을 타결 지을 수 있을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달라진 북쪽 상황과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결정 구조를 따져보면, 일시적 긴장 완화 효과는 있겠지만 최종 합의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시대’는 예측이 어렵다. 그건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 일시적 긴장 완화 속에 북-미가 해법을 마련하지 못할 때, 상황을 어떻게 관리할 것이냐가 중요하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해온 한-미 동맹,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 기조는 유지될까?
“가장 현실과 동떨어진 개념이 ‘가치외교’다. 냉전 때나 통하던 개념이고, 지금 세계 각국은 가치가 아니라 이익을 추구한다. 미국도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고 있지 않나. 트럼프 전 대통령은 ‘가치’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익이 되면 전통적인 동맹이든 뭐든 고려하지 않는다. 가치외교는 시대착오다. 바이든 행정부도 ‘동맹 복원’을 말하면서도 ‘이익의 균형’이란 개념을 사용했다. 물론 미국이 말한 ‘이익의 균형’이 과연 동맹·우방과 균형적인 이익 배분으로 이어졌는지는 재평가가 필요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집권 2기에서도 기본적으로 이익을 추구할 것이고, 외교도 거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거래는 ‘공정한 거래’가 아니다. 만만한 사람한테 덮어씌우는 방식이다. 외교협상을 ‘가치’로 접근한다거나, 먼저 더 많이 내주면 나중에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낭패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정부의 최대 약점은 국가 이익에 대한 관점이 부족한 것이다. 한-미, 한-일, 남북 관계에서 대한민국의 이익이 무엇인지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다. 외교는 국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협상은 이익을 조율하는 과정이다. 일방적 양보를 하고는 상대의 호의와 호혜를 바라는 것은 외교가 아니다.”
―북-러, 북-중 관계에 대한 전망은?
“중요한 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얼마나 지속하느냐다. 러시아의 필요에 따라 재래식 무기와 노동력, 병력 수요를 북을 통해 충족하고 있다. 그 대가로 북은 첨단 군사기술 협력과 에너지·식량 지원, 파병에 대한 비용을 받게 될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될까? 변수가 많다. 먼저 트럼프 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관계가 일정하게 종전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제도적 측면에서 러시아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정상적으로 복귀할 수 있느냐, 국제사회의 대러시아 제재는 어떻게 할 것이냐 등 조율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 여러 고비를 넘어야 할 것이다. 결국 북-러 관계는 러시아의 전체적인 외교정책 기조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미-중 전략경쟁이 심화하면, 중국에서 북의 전략적 가치가 높아진다. 앞으로 북·중·미 3각관계가 흥미로워질 것이다. 김 위원장은 트럼프 전 대통령 집권 1기 때 보낸 서한에서 ‘중국이 아니라 미국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내비친 바 있다. 북쪽을 중국의 ‘종속국’처럼 여겼던 트럼프 전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인식을 바꾼 계기였다. 일반적으로 문자·텍스트를 중시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성은 맥락과 상관없이 이런 ‘단서’를 중요하게 여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중국을 다룰 때 북한을 활용할 생각도 있을 것이다. 미-중 경쟁이 격화하면 북-미 간 대화 수요가 커질 수 있다는 뜻이다.”
―북쪽이 ‘적대적 두 국가’ 체제를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는데.
“북의 대남 강경책은 ‘하노이 노딜’ 이후 외교전략 전환 차원에서 나온 측면이 있고, 북의 국내정치적 수요도 있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면서 북은 2년 이상 완전 봉쇄에 가까운 상태를 유지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고, 사회적 불만도 커졌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남 강경책을 체제 유지의 명분으로 삼은 측면이 크다고 본다. 철도·도로 파괴라든가 통일 개념 삭제, 통일 관련 기념물 철거 등의 행위는 남쪽에 보내는 신호이기도 하지만 북쪽 주민을 결속시키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통상 미국 정권 교체기에 북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다. 하나는 위기를 증폭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분간 자제하는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와 트럼프 행정부 1기 출범 때 북은 위기를 증폭시켰다. 정책 우선순위가 낮은 상황에서 관심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두 정상의 관계도 있고, 위기를 증폭시켜 얻을 이익도 없다. 따라서 트럼프 행정부 2기의 대북정책이 마련될 때까지 북이 기다릴 가능성이 있다. 관계는 주고받는 것이다. 전단이 날아가고 오물풍선이 내려오는 등 현재 남과 북은 서로 도발 행위를 하고 있다. 우발충돌 가능성도 여전하다. 윤석열 정부가 자제력이 없기 때문에 남북 간 긴장을 국내정치적으로 활용할 가능성도 있다. 걱정스러운 상황이다.”
―남북 간 대화 재개 가능성은 없나?
“일단 시기를 놓쳤다. 앞으로도 대화 수요가 늘어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윤석열 정부는 대북 강경정책을 외교·안보정책이라기보다 국내정치적 측면에서 추진해왔다. 지금처럼 윤 대통령의 지지기반이 붕괴한 상황에서 대북정책 전환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대화 재개엔 조건이 있을 텐데 남쪽에서 이를 들어줄 가능성이 없으니, 북쪽도 남북대화를 통해 얻을 게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결국 지금으로선 남북 모두 대화의 수요가 없는 상태다. 남북관계도 따로 전망할 게 없고.”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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