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25일 오전 9시30분. 재판 30분을 앞두고 박정훈 대령이 서울 용산구 중앙지역군사법원 앞에 섰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등이 발언하는 동안 해병대 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박 대령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가 군사법원을 찾은 것도 벌써 8번째다. 이날 군사법원에선 항명 및 상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박 대령의 8차 공판이 열렸다.
박 대령의 공소장은 인적 사항 등을 빼면 2쪽에 불과하다.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이 이첩 보류를 지시했지만 이행하지 않았고, 이첩 도중 인계를 멈추라는 지시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명했다는 혐의, 수사 결과를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할 때 장관이 ‘사단장도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 하느냐’라고 언급했다고 말한 것이 허위사실 적시로 인한 명예훼손이라는 혐의다. 군검찰은 이 사건이 단순한 이첩 보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히려 재판 과정에서 많은 것이 밝혀졌다. 해병대 수사단의 사건 이첩을 막으려 했던 윗선의 외압 증거만 더 드러난 것이다.
그동안의 박 대령 재판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진 것 중 하나가 대통령의 격노설 여부다. 군검찰은 단순한 이첩 보류 지시를 이행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 격노설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 박 대령 쪽은 상관(김계환 사령관)의 명확한 이첩 보류 지시가 없었고, 있었더라도 해당 지시가 대통령의 격노로부터 시작됐다면 정당한 명령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9월24일 8차 공판을 하루 앞두고 만난 박 대령 쪽 김정민 변호사는 “이 사건은 명령이라기보다는 부정청탁”이라고 간결하게 정의했다.
박 대령 쪽은 2023년 7월31일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대통령실 전화를 받은 뒤부터 모든 상황이 급변했기 때문에 대통령 격노로부터 모든 사달이 시작됐다고 보고 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대통령실과 국방부, 해병대 사령부 주요 관계인들의 통화 내역을 신청했다. 이종섭 전 장관이 ‘02-800-7070’ 전화를 받은 사실이나 대통령 안보실 및 국방부에서 장관 보고 이후 사건 이첩 사이 해병대와 지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은 사실 등은 모두 이 재판을 통해 드러났다.
“우리 쪽에서 밝혀낸 것들은 일단 통화 기록이죠. 대통령의 통화나 임기훈(전 국방비서관)과 김계환의 통화 등이 다 밝혀졌고요. 또 하나는 텔레그램 메시지예요. 김계환과 박진희(전 국방부 군사보좌관) 사이 텔레그램이 이 사건 시작과 끝이거든요. 결국 국방부가 (해병대에) 어떤 요구를 했고 사령관은 어떻게 반발했으며 최종적으로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도 거기 다 담겨 있어요.” 김정민 변호사의 말이다.
박진희 전 보좌관은 7월30일 장관 보고 이후 김계환에게 보고서를 요구한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텔레그램을 주고받았다. 김 사령관은 이 장관과 직접 연락하는 대신 박 전 보좌관과 연락한 것으로 보이는데, 박 전 보좌관은 “조만간 이첩은 어려워 보인다”거나 “지휘 책임 관련 인원은 징계로 하는 것도 검토해달라”는 등 사건 처리와 관련한 부분을 지속적으로 언급했다.
임기훈 전 국방비서관과 김계환 사령관 사이에 지속적인 통화가 있었다는 사실도 재판을 통해 드러났다. 특히 7월31일 오후 5시 통화에선 대통령의 격노설을 전달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선 증명되지 않았다. 임 전 비서관은 박 대령 재판에 증인으로 채택돼 2024년 9월25일 8차 공판에 출석 예정이었지만, 국외 출장을 이유로 불출석했다. 임 전 비서관에 대한 증인신문까지 진행되면 재판은 어느 정도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재판 과정에서 국방부와 대통령실이 개입한 정황과 증거는 드러났지만, 그 배경과 이유를 증명하긴 어려웠다. 김정민 변호사는 이 사건에 대통령실이 개입한 이유는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모든 절차를 보면 이 사건은 국방부 장관의 부정청탁, 해병대 사령관의 간접적 거부였던 거 같아요. 그런데 나중에 이렇게 문제가 된 건 결국 대통령 때문이죠. 처음 시작도 대통령이었고, 이첩이 강행된 다음에 강한 드라이브가 걸린 것에도 대통령이 있어요. 김 사령관은 처음엔 대통령이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건 사실 오판한 거죠.”
김 변호사는 이종섭 전 장관이 처음에 언론 브리핑을 취소한 것보다 임 전 사단장에 대한 파견 명령을 취소한 것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2023년 7월31일 당시 임 전 사단장은 수사 대상자였기 때문에 직무 배제를 위한 분리 파견 명령이 내려져 있었는데, 이 전 장관은 언론 브리핑 취소를 지시하면서 임 전 사단장을 정상 출근시키라고 지시했다. 결국 임 전 사단장의 보직 해임을 막으려고 한 것이 국방부와 해병대의 갈등의 시작인데, 그게 결국 대통령의 뜻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김계환 사령관이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김 변호사의 설명이다.
다만 그는 임 전 사단장의 구명 의혹 등은 향후 특검에서 밝혀져야 할 영역이라고 말했다. “이제까지 밝혀지지 않은 것은 (구명) 로비 의혹하고, 누가 박정훈 대령을 항명으로 엮어서 구속영장까지 청구했느냐는 부분이거든요. 이 두 가지는 재판에서 다루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단초는 나왔다고 봐요.”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결국 사건의 본질은 임성근 사단장을 형사 책임에서 배제하려는, 그래서 더 본질적으로는 사단장에게 인사상 불이익이 전혀 안 가도록 보호하기 위한 부정청탁을 한 거예요. 여기에 해병대 사령관이 좀 난색을 표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상태에서 박정훈 대령이 예정대로 이첩을 강행한 거죠. 거기에 대해서 너무 과도하게 린치를 가하려다가 반발을 불러와서 여기까지 오게 된 그런 사건이라고 정리할 수 있어요.”
2024년 9월25일 열린 8차 공판에서는 군검찰이 항명 사건을 초기에 수사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실의 개입 의혹을 일부러 배제하려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채 상병 순직 사건 이첩 당시 중앙수사대장이었던 박세진 중령은 이날 증인으로 출석해 “처음 (군검찰에서) 진술할 때 기억이 생생하게 날 때라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브이아이피(VIP) 내용이나 여러 가지 부분들은 본인들에게 필요한 부분이 아니라며 조서에서 제외했다”며 “이첩 보류 지시를 왜 따르지 않았냐는 부분에 관해서만 진술을 들으려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박 중령은 당시 빨리 조사를 마치고 싶어서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며 2차 조사 때 관련 내용을 다시 얘기해달라고 해서 다시 진술했다고 덧붙였다.
9월25일 8차 공판을 마친 박 대령의 재판은 이르면 2024년 말 1심 결론이 날 것으로 보인다. 앞서 9월19일 채 상병 특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아직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앞선 두 차례와 같이 거부권을 행사한 뒤 재표결에서 부결될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실은 이미 거부권 행사를 예고한 상태다.
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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