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경제발전을 하겠다고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었어요.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수십 년 동안 바란 북한의 변화 아닌가요. 그게 시작됐는데 왜 우리는 모른 척하고 있습니까.”
2019년 12월23일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사진)을 경기도 성남에 있는 세종연구소 연구실에서 만났다. 북한의 도발과 연말연초 북-미 관계와 남북관계의 전망을 묻자, 그는 지난 11월 펴낸 책 를 내밀었다.
“‘도발’ 저어하는 북한에 명분 줘야”여론이 온통 북한이 미국을 향해 예고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무엇이고 언제 ‘배달’될 것인지에 쏠린 상황에서 대표적인 대북 대화론자로서 이종석 전 장관은 그 너머를 얘기하고 싶어 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의 고강도 제재가 지속되더라도 북한 경제는 붕괴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결국 무력 도발과 함께 ‘새로운 길’을 선택하고 이미 사상 최고 수준인 제재의 수위가 더 높아지더라도 말이다. 외부 변수에도 북한 체제의 안정성이 쉽게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이 전 장관이 보는 이유는 명료하다. “북한은 현재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역사상 가장 폭넓은 구조 변화가 진행 중이며, 그중에서도 경제는 자체 발전 동력을 확보하는 데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의 시선은 북·미가 아닌 우리 내부를 향했다. 지난 1년간 금강산 관광 재개 등 우리 스스로 더 과감하게 상황을 주도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중재자 지위가 흔들린 상황을 두고 “모든 것은 타이밍(Timing·때)이다.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가) 할 수 있었던 일을 지금이라도 해야 한다”고 했다.
북한이 도발로 가는 절차를 밟는 듯하다.분명한 점은, 북한이 도발로 가는 길에서 굉장히 저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느낌이다. 자, 셋을 셀 동안 네가 답하지 않으면 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센다. 하나, 둘, 둘의 반, 둘의 반의반, 반의반의 반. 최근 ‘중대한’ 실험이나 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자위적 국방력 발전’ 메시지가 그렇다. 셋 뒤에 벌어질 일이 자신의 본뜻이라면 뭐 하러 반의반을 세고 있겠나.
반전의 여지는 있는가.
미국이 나서면 된다. 새로운 셈법을 내놓으라는 북한의 요구에 무조건 대화에 나서라고 하는 지금처럼 동문서답을 해서는 안 된다. 비핵화 조치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약속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친서로 답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이 상황에서 중국이 일부 제재 완화 카드를 던진 것은 의미가 있다. 중국은 최근 북한이 과거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노선을 천명했던 때에 버금가는 노선을 채택했다고 여긴다. 그래서 비핵화를 촉진하기 위한 상응 조치인 일부 제재 완화만 해도 도발 가능성을 낮추고 비핵화를 촉진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쉽게 말해 중국은 일부 제재 완화를 해줘도 북한이 핵실험을 하거나 비핵화 약속을 깨뜨릴 우려는 없을 거라고 본다. 아이러니한 것은 중국의 이런 태도가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고강도 제재 원칙에 반하지만 동시에 결과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이롭게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북한 노동자 송환 문제만 해도 중국은 이를 사실상 유예하면서 북한에 숨 쉴 공간을 주려는 것 같다. 중국의 노력은 긴장을 일부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풍선이 부풀 대로 부풀어오른 그 끝에 피식 조금 바람을 빼면서 결국 터지는 건 막는다고나 할까.
(중국과 달리) 미국은 여전히 더 강한 제재가 답이라고 보는 듯하다. 우리 안의 보수 진영도 마찬가지다.
그건 북한의 현실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고강도 제재로 (미국 뜻대로) 북한이 변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불가능한 일이다. 최근 2~3년 동안 국가전략을 군사 우선에서 경제건설 중심으로 돌아선 다음, (대외) 개방은 문을 열어놓고도 국제사회의 제재로 효과를 보지 못한 게 맞다. 하지만 (대내) 개혁은 북 나름의 발전 동력을 얻었다. 고강도 제재 아래에서도 농업 분야만 보면 개별 농민이 생산과 분배 단위가 되는 호전담당책임제 등을 통해 최소한의 완만한 성장을 이뤘다. 삼시세끼 굶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북한에서 내놓은 자력갱생이란 말은 이런 현실에 기반했다.
북한은 다가올 고강도 제재를 견딜 만큼 준비가 돼 있다는 건가.
분명한 사실은 그것의 가능 여부를 넘어 그 자체가 (개방보다)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북한도 그걸 잘 안다. 북한은 지난 2년이 경제 도약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핵을 포기하는 건 또 다른 생존의 문제였다. 선 비핵화, 후 제재 해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리비아 사례(정권 붕괴)에서 봤다. 발전이 아닌 생존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북한의 준비는 상당한 수준이다. 최근 공개된 모습을 보면 사회적·사상적으로 준비하는 듯하다. 사회가 단결을 강조하면서 지도자 중심으로 가다보니 과거회귀적인 모습이 보인다. 이는 연말연초에 있을지 모르는 ‘조치’를 염두에 둔 듯하다.
이때 우리가 중재자 역할을 잃어버린 것은 안타깝다. 2018년 인터뷰에서 “제대로 운전하지 못하면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요구를 받을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사실 ‘중재자다’ ‘운전자다’ 말 자체가 필요 없다. 우리 땅에서 벌어질 수 있는 비극이다. 우리 운명과 관련된 문제다.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미국을 향해 북한이 요구한 셈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중국과 러시아가 제시한 일부 제재 완화 결의안을 미국이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이제는 공개적인 의사표시가 필요한 상황이다. 물론 물밑에서 논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같은 긴박한 상황에선 강대국과 약소국이 밀실에 들어가면 논의가 약소국에 불리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공개적으로 말하면 미국은 싫어할 것이다, 왜 그런 걸 공개하냐고. 아무리 기울어진 국제정치 질서라도 공개적인 의사표시로 국제적인 공감대를 얻고 상대를 설득할 모멘텀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한계는 분명해 보인다.
지금 상황이 파국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우리 모두 생각하고 있지 않나. 그러려면 우리가 먼저 움직여 파열음을 내야 한다.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한반도에 위기가 닥쳐올지 모르는데. 중·러가 던진 일부 제재 완화 결의안과 미국이 생각하는 어떤 수준, 그리고 북한이 원하는 내용 그 어디에서 절충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북한이 셋을 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전 장관은 2004년 있었던 이라크 추가 파병 때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으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뜻에 따라 이라크 추가파병안(자이툰 부대)을 만든 당사자이기도 하다. 이라크와 호르무즈해협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이라크 파병 때를 떠올리며 “노무현 대통령도 정의의 전쟁은 아니라고 생각한 만큼 파병을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당시는 한반도 ‘평화’를 얻기 위해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고 했다. 이라크 파병과 달리, 이 전 장관은 호르무즈해협 파병에는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이라크 파병과 비교할 때 호르무즈해협 파병 문제는 명분과 실리 모두 우리가 손에 쥘 만한 게 없다는 것이다. “우리 논리로 명확한 반대 의사를 전달해야 한다”고 했다.
최근 호르무즈해협 파병과 관련해 논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분명히 할 게 있다. 당시 파병 상황과 현재는 다르다. 호르무즈해협 긴장은 이란과 국제사회가 맺은 합의를 트럼프 정부가 일방적으로 깨면서 시작되지 않았나. 대다수 유럽 국가들이 반대하는 상황이다. 미국 내 반대도 만만찮다. 민주당도 현재 트럼프 대통령의 대이란 정책에 반대하지 않나. 이라크 파병 때는 국제사회가 사담 후세인 독재정권에 부정적 인식이 강했고, 다국적군을 만드는 데 유엔이 나서면서 우리가 참여할 명분이 생겼다. 특히 영국, 프랑스 등 유럽 내 상당수 나라가 참전하는 상황에서 동맹국인 미국의 요구를 마냥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당시 북-미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참여정부 출범 초기 이미 미국은 (북핵 문제 등으로) 군사적 옵션(Option·선택)도 고려하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북핵 문제로 불안정한 한반도를 안정시키기 위해 미국의 태도 변화가 필요했고, 우리가 능동적으로 미국과 협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파병을 한다면 한반도 상황 안정이 그 전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은 북핵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부터 방위비 분담금 등 난맥상이 그때 못지않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호르무즈해협 파병은 국제적으로 명분을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이란은 우리에게 경제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국가다. 미국을 향해 파병은 안 된다고 명료한 논리를 세워 버텨야 한다. 그 정도도 못 버티면 안 된다.
보수 진영에선 한-미 동맹 균열 얘기도 나온다.
함부로 균열을 말하지 말자. 지금 한-미 관계가 안 좋다고 하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 때는 어땠나, 1969년부터 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 미국을 못 갔다. 지미 카터는 1976년 대통령에 당선될 때의 공약이 주한미군 철수였다. 결국 주한미군은 전략적 이익이 있다고 판단해 그대로 둔 것이다. 이번에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주한미군(2만8500명)을 유지하는 내용의 국방수권법도 마찬가지다. 미국도 한-미 동맹을 유지하는 데 이익이 분명히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우리가 할 말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동맹 균열을 주장하는 건 맞지 않다. 특히 한반도 문제는 우리가 중심을 잡아야 한다. 바람개비처럼 외곽을 돌면 안 된다.
2019년 12월24일 열린 한-일 정상회담과 이후 한-일 관계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정상회담을 연 이른바 ‘셔틀외교’의 실무를 맡기도 했다.
고이즈미 총리 시절도 한-일 관계는 어려웠지만 셔틀외교의 성과가 있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아베 정부와의 관계 난맥상은 그 이상이다.
한-일 관계가 언제 어렵지 않은 적이 있었나. 다만 참여정부 당시는 고이즈미 총리의 개성이 국정운영에 직접 반영됐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가 대표적이다. 현재 아베 신조 총리는 고이즈미 총리보다 우경화돼 있지만 그보다는 더 현실주의자다. 아베 총리는 국내 정치적 상황이 녹록지 않다. 섣불리 한국과의 관계를 당장 풀겠다고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 문제와 현재 국가 간 협력을 나눠 접근하는 투트랙(Two track·병행) 노선의 복원이 우선이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등은 피해자 몸에 새겨진 기억이다. 한-일 관계는 지도자의 비전이나 전략으로 되기 어렵다. 좀더 긴 시간을 두고 국민 정서를 봐가며 길을 잡아야 한다.
글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계엄의 밤, 사라진 이장우 대전시장의 11시간…“집사람과 밤새워”
롯데리아 내란 모의…세계가 알게 됐다
[단독] 노상원 ‘사조직’이 정보사 장악…부대 책임자 출입도 막아
‘28시간 경찰 차벽’ 뚫은 트랙터 시위, 시민 1만명 마중 나왔다
“안귀령의 강철 같은 빛”…BBC가 꼽은 ‘올해의 이 순간’
28시간 만에 시민들이 뚫었다...트랙터 시위대, 한남동 관저로 [영상]
탄핵 경고받은 한덕수 “내란·김건희 특검, 24일까지 결정 어렵다”
공조본, 윤석열 개인폰 통화내역 확보…‘내란의 밤’ 선명해지나
“역시 석열이 형은 법보다 밥이야”…모두가 행복했을 텐데
조진웅 “내란수괴가 판칠 뻔… 진정한 영웅은 국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