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미국을 방문했던 김현종(국가안보실 제2차장)은 미 정치인에게 “한·미·일 공조를 더 중요시하는지”, 아니면 “재무장한 일본을 위주로 하고 나머지 아시아 국가들을 종속변수로 하는 것으로 (미국의) 외교정책을 유지하는 것인지”를 물었다고 한다. 두 질문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 한국이 나아갈 바를 결정하는 데 미국 외교정책의 향방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 둘째, 한국 고위 정책 결정자가 미국의 외교정책을 확인해야 할 만큼 현재 국제 정세는 변화와 유동의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셋째, 한국은 주위를 둘러싼 각국 전략의 근본적 변화를 염두에 두고 어디로 움직일지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실, 마지막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하고 이전 시기와 달라진 점일 것이다. 인터뷰에서 김현종은 미국 정치인들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동북아 지역에서 일본도 중요하고, 한국도 우리의 굳건한 동맹이다’라는 얼버무림으로 넘어갔으리라.
하지만 대답은 분명하다. 미국 처지에서 보면, 한국과 일본은 비슷한 위상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한·일의 국제적 위상과 전략적 비중을 저울질하는 시도 자체가 판을 흔드는 ‘버릇없고 무례한 행위’라고 미국과 일본은 생각할 것이다.
한·미·일 삼각관계의 종속변수일본의 수출규제로 시작된 한-일 갈등이 한국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선언으로 이어지면서, 미국의 개입(조정)이 불가피해졌다. 역사에서 시작된 갈등은 경제, 군사 분야로 번졌다. 국제관계의 모든 부문이 갈등 양상을 빚고 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에서 나타나듯, 한-일 갈등은 한국과 일본의 문제에 멈추지 않고 미국을 비롯한 세계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외교정책은 장기 국가전략의 하나다. 한국은 스스로의 국가전략, 특히 국제관계에서 전략에 대한 고유 방침을 가지지 않았다. 정확히 얘기하면, 그동안 한국은 미국의 군사적 보호 아래 지속된 냉전체제의 하위 파트너, 한·미·일 삼각관계로 운영된 동북아 하위체제의 종속변수로 위치해왔다.
세계 차원에선 냉전체제가 막을 내린 듯이 보였어도, 유독 동북아에선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동북아에서는 냉전 질서가 그대로 유지되고, 새로운 협력 질서는 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중국은 눈이 부실 정도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해서 미국과 대등한 지위에 올라섰다. 북한의 핵위협은 미국을 위협할 만큼 늘었고, 이 문제에 뛰어든 한국은 ‘성실한 조정자’를 자임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북핵 문제는 동북아 지역 외교관계를 변화시키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 가장 높은 경제적 역동성을 보여주는 동북아 지역은 옛 냉전체제 질서가 새 질서와 공존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높은 경제성장과 역사적 갈등이 동시에 존재하는 동북아 지역이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발칸반도가 될 것인지, 평화로운 협력체제로 나아갈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지난 100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현재 상태가 어떠한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수밖에 없는지 짐작할 수는 있다.
국제정치 속 ‘국가전략’이란 한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가능케 하는 다양한 정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국제정치는 사실 힘을 앞세운 폭력의 세계다. 5·16 쿠데타 뒤, 일본 정치인 기시 노부스케를 만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선배님들, 우리를 좀 도와주십시오. 일본은 분명 우리보다 앞섰으니 형님으로 모시겠소. 그러니 형 같은 기분으로 우리를 키워주시오”라고 말했다. 폭력 세계의 ‘오야붕-꼬붕’ 관계를 연상시키는 이 발언은 한국인들에게 분노를 자아낼지 모르나, 국제정치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폭력의 세계다.
많은 현실주의적 국제정치 이론가가 취하는 현실주의 이론은 힘의 우위와 사용을 인정하거나 정당화한다. 아마도 제국의 세기가 인류에게 남겨놓은 최대 유산은 적나라한 폭력 사용을 선한 의지로 보이게 하는 정당화 기술일 것이다. 다른 공동체에 가혹한 폭력을 쓰고서도, 이것은 ‘당신들을 더 잘살게 하기 위한 도움’이라거나 ‘식민지 사람들이 능력이 없어서 우리가 도와준다’거나 ‘보편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군사적 개입’이라거나, ‘국제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거나, 군사적 개입(침략)이 폭력이 아니라 ‘평화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는 갖가지 부드러운 논리가 등장한다.
제국은 무력의 직접 사용이 아니라, 이런 소프트한(부드러운) 논리를 수백 년 동안 개발하고 발전시켜왔다. 이런 논리적·이론적 장치는 식민지 저항을 무력화하고 제국의 지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제국의 지배자들 스스로는 자신들이 정의를 이 땅에 실현하는 신성한 사명을 가진 자로 세뇌하게 했다.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 근대사는 침략전쟁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렇게 인식하고 반성하는 일본 국민은 많지 않다. 일본 국민에게 자신들의 행위는 침략이 아니라 남을 도와주는 시혜라는 인식이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시기부터 ‘생명선’ ‘이익선’ 등의 표현으로 조선과 만주를 향한 침략 의도를 계속 표출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청과 러시아를 세력권 밖으로 몰아낸 일본은 바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침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동아시아 지역 질서에 재편이 필요해지자, 일본은 ‘동아신질서론’을 들고나왔다. 이 시기부터 일본은 선(線)을 중심으로 했던 전략에서 각 지역들 간 관계에 중심을 두는 더 넓은 공간 지배로 이동한다. ‘동아연맹론’ ‘동아협동체론’ 등 다른 논리들도 있었지만, 이 논의에서 공통적인 것은 공산세력을 막고 각 지역 경제 결합을 위해 일본과 만주 그리고 중국을 하나로 묶는 일이었다.
일본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패권 정책을 노골화하고 영·미와 전쟁에 돌입하는 1940년께 되면, ‘동아신질서론’은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표어로 변한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용어가 공식화한 것은 1940년 8월이었다. 하지만 이미 1938년 육군성과 참모본부는 동아시아 지역을 자존권, 방위권, 경제권으로 구획하는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 창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 진주만 공습 뒤 선전포고 조서에는 ‘자존자위’(自存自衛)라고 했지만, 대동아공영권 구상은 진주만 기습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됐던 것이다.
대동아 지역 질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확보된 기존 동북아 세력권에 남태평양을 포함한 동남아 세력권을 추가하면서, 일본열도를 중심으로 한 동심원적 계열화였다. 대동아공영권은 세계를 동아, 미주, 구주, 소련이라는 네 권역으로 바라보았다. 여기서 일본은 동아(東亞)라는 한 축을 담당했다. 동아의 중핵권에 일본과 조선이 있었고, 소공영권에 중국·인도차이나 등이, 대공영권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인도·태평양제도가 포함돼 있었다.
대동아공영권은 서구 세력이 침탈한 아시아 각국의 민족주의 감정에 불을 질러 서양을 적으로 세우고, 아시아 세력의 이익을 방어하는 대표 주자로 일본을 그 중심에 놓은 지역 블록(권)이었다.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 세계의 일원이 되자(탈아입구)던 일본은 자신이 동아시아 맹주로 등장하자, 갑자기 아시아 민족의 이익을 방어하는 지도자로 나섰다. 일본은 이제 동아시아 지역의 이익을 옹호하는 주체였고, 이는 시효가 만료된 근대적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국제 질서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대동아공영권은 자원 부족을 해결하려는 의도가 깊이 깔려 있었다. 후진 제국주의 일본은 고도 산업화에 필요한 대부분의 공업 자원을 외부에 의존했다. ‘대동아공영권=광역경제권’이 만들어지면 자급자족이 가능했기 때문에, 과학기술 발전에만 매진하면 되었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자원을 확보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광역경제권의 건설과 전쟁이 필요했다. 전쟁은 피할 수 없었고, (일본) 국가 혁신과 패권에 필수 요소여서, ‘싸우면서 건설하자’라는 구호가 선언됐다. 1968년 한국에서 이 구호가 다시 등장한 것도, 북한의 무장공비 남파 사건이 일어나고 경제건설이 한창 추진될 때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형님의 나라’에서 쓴 구호를 그대로 빌려왔던 것이다. 경제성장과 자본시장 확대는 전쟁의 다른 이름이었다.
자신을 중심에 놓고 동남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 인도까지 광역경제권으로 묶으려고 했던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의 독창적인 사상은 아니었다. 일본을 핵심으로 한 동심원적 계열화와 침략 정당화 논리는 나치가 부르짖었던 ‘생활권’론의 연장선에 있었고, 독일 지정학과 법학(정치학)을 그대로 계승했다.
독일에서 번성한 ‘광역권’ 이론 계승국가 행위를 공간과 관련해 이해하는 방식은 지정학에서 출발했다. 이 시도는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 팽창하던 독일에서 급속하게 번성했다. 독일 지정학자들이 처음 주장했던 ‘생활권’은 나치가 주변 국가들을 침략하고 합병하는 주요한 이론적 기초였고, 독일 우위가 확립된 시점에서 제기된 ‘광역권’ 이론은 국제정치에서 독일의 우세적 지위를 유지하는 주요한 개념이었다.
독일의 공간 이론과 개념은 일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생활권을 주장한 지정학자 카를 에른스트 하우스호퍼는 일본에 여러 해 머물면서 지정학을 일본에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과 태평양 지역의 지정학에 대한 저술을 펴내 일본 제국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제국주의 공간 확대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이론을 일본에 제시했다. 독일 지정학과 제국 이론은 유럽에서 끝나지 않고 아시아로 확산됐다.
카를 슈미트의 광역권 이론도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이론 형성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슈미트가 제시한 광역권은 ‘역외 열강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는 세계 질서’로 요약할 수 있다. 즉, 하나의 제국(Reich·라이히)은 자신의 광역권 내에서 이데올로기적 통합을 달성하지만, 다른 라이히에 간섭하거나 자신의 질서를 강요하지 않는다. 라이히 질서를 통해 세계 차원에서 평화는 이룩할 수 있다. 이것이 슈미트의 이론이었다.
슈미트의 주장은 독일 제국의 팽창을 아리안 민족의 생존권 차원에서 합리화하는 한편, 기존 유럽 제국 내에서 후진 독일 제국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이론적 표현이었다. 일본은 슈미트의 이론을 적극 수용하면서도, 인종주의 측면은 제외했다. 대동아공영권이 아시아 전체 민족의 협조와 번영을 목표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하우스호퍼와 슈미트 두 사람 모두 전쟁이 끝난 뒤 전쟁범죄자로 조사받았지만, 영토와 공간에 대한 이 개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채, 냉전의 기본 구도를 제시했다. 적이 만든 논리가 전쟁이 끝난 뒤 승전국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 적으로 싸웠지만, 결국 그들은 동지이기도 했다. 제국을 꿈꾸는 동지.
국가는 생명체와 같아서 계속 성장하고, 성장하는 국가는 자신에 알맞은 공간을 찾아야 한다는 논리에 영국의 해퍼드 존 매킨더, 미국의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도 동참했다. 머핸은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함에 따라 해군 건설만이 미국을 강대국으로 유지할 것이라고 주장해, 미 해군의 계속적인 강화를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미국 대외정책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고,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미 해군은 세계 주요 나라를 가상 적국으로 상정한 작전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을 적으로 상정해 작성한 ‘오렌지 계획’은 진주만 피습 뒤 실제 미 해군이 사용했다.
전후 미국의 세계 전략은 식민지 확보로 이익을 얻었던 이전 제국주의와는 달랐다. 세계시장에서 최고 우위를 확보하던 미국은 독점적 영토 확보가 아닌 세계시장 확대에 중심을 두었다. 이는 전후 시기에 ‘점령’이라는 정치·군사 활동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경제적 형태를 띤다는 의미에서 가장 현대적인 제국주의였다. 19세기부터 등장한 조약을 통해 미국은 직접적 영토 지배를 회피하고, 각국의 독립과 자결 그리고 주권을 존중한다는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주도권을 관철할 수 있었다.
종전 과정을 주도한 것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따른 ‘국제주의자’들인데 이들은 자유무역, 개방체제, 세계시장의 원활한 운영, 대의민주주의, 전쟁 피해국에 대한 원조, 미국이 누리는 혜택의 타국과 공유를 주요한 모토로 했다. 이들에게는 영토가 아니라 자본이 들어갈 공간이 문제였기에 전세계가 그들 시야에 들어와 있었다.
미국은 전후에 생기는 신생 국가들이 미국에 적대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신탁통치’와 유엔을 이용한 세계 문제 처리 방식 등은 국제주의자들의 전후 처리 방식이었다. 그리고 종전 직후에 나타난 이른바 ‘군사 점령’은 미국에 우호적인 정권을 수립하고, 세계적 차원에서 자유무역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미국 대외정책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두뇌집단인 외교협회(Council of Foreign Relations)는 1941년 6월, 현재와 전후에 미국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규정한 보고서를 대통령과 국무장관에게 극비리에 보고했다. 외교협회는 통합 경제권이 필요하고 이 경제권은 완전히 자유로운 세계경제나 자급적인 체제보다 더 바람직한 시스템이라고 주장했다. 이 시스템에서 유럽, 영연방, 네덜란드 식민 지역, 극동(중국과 일본) 등은 미국과 경쟁하는 지역으로 간주됐고 원료 공급지인 동남아시아 등은 배후지로 여겨졌다. 그들은 이것을 ‘그랜드 에어리어’라 이름 붙였다. 유럽조차 미국 주도의 그랜드 에어리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외교협회의 시각과 내용은 독일의 광역권과 상당히 비슷했다.
미-소 냉전 시기의 블록체제는 카를 슈미트가 개념화했던 광역권이 그랜드 에어리어를 거쳐 현실화한 것이었다. 각 블록이 나름의 이데올로기(시장체제와 자유주의, 공산주의)로 블록을 통일시키고, 블록 안에서 자본과 상품 유통 체제를 확립했다는 의미에서 상당한 공통점이 있었다. 슈미트가 라이히들의 광역 질서에서 강조한 내용은 비간섭이었는데, 이는 냉전 역사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냉전 시기에 미·소 두 강대국은 핵심 이익을 서로 건드리지 않음에 따라 무력 충돌은 미국이나 소련의 국경에서가 아닌 비핵심 지역, 변경에서 일어났다. 한국전쟁은 그것의 중요한 사례다.
제국이 흘러간 100년 전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그런데 당시 시나 에쓰사부로(일본 외상)는 “대만과 조선 통치가 제국주의라면 그건 영광의 제국주의다”라고 주장했고, 시오노 나나미( 저자)는 “위안부라는 말을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참 상냥한 이름이다. 위안은 고통을 위로한다는 뜻이다. 전쟁터는 인간에게 극도의 긴장을 강요한다. 하루가 끝난 후에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위안부에게 가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어버리기만 한 젊은 병사들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네오콘(신우익)이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 내에 깊숙이 들어왔을 때, 부시 대통령의 수석보좌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이제 제국입니다. 우리가 행동하는 순간 새로운 현실이 창조됩니다. 당신들이 현실을 신중하게 살피는 동안 우리는 다시금 행동해 또 다른 현실을 창조합니다. 그것도 역시 당신들은 살펴야죠. 일은 그렇게 흘러갑니다. 우리는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여러분 모두는 우리가 하는 모양을 그저 살피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다. 더욱 불행한 것은, 이들이 아직도 세계를 주무르려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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