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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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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의 겨울, 견디는 시간

폐기 약속한 장소에서 ‘중대한 시험’ 한 북한,

2년 만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 소집한 미국
등록 2019-12-19 12:00 수정 2020-05-03 04:29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지역에 있는 혁명전적지를 순시하고 있다는 제목을 단 12월7일치 북한 <평양타임스> 1면 기사에 물린 사진.   평양타임스 갈무리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지역에 있는 혁명전적지를 순시하고 있다는 제목을 단 12월7일치 북한 <평양타임스> 1면 기사에 물린 사진. 평양타임스 갈무리

‘우등불’을 국어사전 포털에서 검색하면, 1) ‘모닥불’(잎나무나 검불 따위를 모아놓고 피우는 불)의 잘못, 2) 모닥불의 북한어라고 나온다.

북한에서 우등불은 단순한 사전적 의미의 모닥불이 아니다. 우등불은 일제에 맞서 게릴라전을 펼치던 빨치산들이 겨울철 추위를 막기 위해 나무토막이나 땔나무를 쌓아놓고 피우는 불을 말한다. 우등불은 김일성 북한 주석이 만주에서 펼친 항일 유격전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우등불’의 의미

구체적으로 김 주석의 회고록 에 우등불이란 단어는 모두 60회 나온다. 회고록에는 항일 유격대가 개발했다는 우등불 피우는 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장작을 밑에서부터 5개, 4개, 3개로 피라미드 모습으로 쌓고 위에서 불을 지폈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항일 빨치산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왜놈들한테 잡혀서 맞아죽지 않고, 추위에 얼어죽지 않고, 먹을 것 없어서 굶어죽지 않으면 우리는 조국을 찾을 수 있다.” 일종의 혁명적 낙관주의다. 우등불 덕분에 빨치산들이 얼어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항일 빨치산을 국가와 정권의 정통성 근간으로 내세우는 북한에서 우등불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우등불 모임은 우등불을 피워놓은 모임을 뜻한다. 북한에서 우등불 모임은 ‘항일혁명 시기 유격대원들이 우등불가에서 투쟁 결의를 굳게 다진 것을 본받아 어떤 일을 기념하거나 대중의 정치적 열의를 높이려고 할 때 갖는 모임’의 뜻으로 쓰인다.

우등불 모임 사진이 최근 북한 언론에 등장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 올랐다고 등이 12월4일 보도했다. 이를 보도한 사진 중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회 위원장이 부인 리설주, 현송월 북한 노동당 부부장, 조용원 노동당 제1부부장, 박정천 총참모장 등과 함께 눈밭 한가운데서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손을 녹이는 모습도 있었다.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 부의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김 위원장이 백두산을 오르고 모닥불을 쬐는 장면을 북한 주민에게 공개한 것은 결국 자력갱생, 빨치산 정신으로 제재 국면을 버텨내겠다는 의지”라고 해석했다. 할아버지(김일성 주석)가 어려운 사정에도 일본과 싸워 광복을 찾아왔듯이 앞으로 미국과의 힘든 싸움에서 이겨야 할 테니 북한 주민들에게 어려움을 각오하라는 정치사상 교육이라는 설명이다.

올해 북-미 협상은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판문점 남·북·미 정상 회동, 스웨덴 스톡홀름 실무협상까지 양쪽의 대화 노력은 계속됐으나 상호 입장 차이가 여전하다. 북한이 일방적으로 정한 비핵화 협상 시한인 연말이 다가오면서 북한과 미국이 2년 만에 ‘말폭탄’을 다시 주고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탄핵에서 벗어나면

북한은 12월7일 폐기를 약속했던 동창리 서해위성시험장에서 ‘중대한 시험’을 했다면서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 북한이 핵 활동을 재개하고 대륙간탄도탄(ICBM) 개발을 계속하면서 고강도 벼랑 끝 전술을 쓸 가능성도 제기된다.

북한의 대륙간탄도탄 시험발사와 핵실험 중단 조치를 외교 치적으로 내세워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적대 행동을 하면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고 북한에 경고했다. 미국은 12월11일 2년 만에 북한 문제를 다루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북한이 미국에 연말까지 ‘셈법을 바꾸라’고 요구했지만 미국이 반응하지 않고 있다. 미국 하원이 트럼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스캔들과 관련해 탄핵소추안을 공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탄핵 국면에 빠져 있다. 트럼프 대통령 처지에서 새로운 계산법은 탄핵 국면을 넘긴 뒤에야 가능하다.

해리 카지아니스 미국 국가이익연구소 한국국장은 12월12일 기고문에서 북한이 미국 하원의 탄핵소추에 직면한 트럼프 대통령을 압박해 조기에 양보를 이끌어내려는 전략을 쓰고 있지만 실수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탄핵에서 벗어나면 대북 협상에서 유연성을 높일 것이란 의지를 이름을 밝히지 않은 백악관 고위 관계자에게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제재를 앞세운 ‘최대 압박’이 비핵화에 유효하다는 믿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연말까지 미국이 새로운 셈법을 가지고 나오라’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말은 되돌릴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말을 바꿔도 되지만, 북한 최고 권력자의 말은 뒤집을 수 없다. 미국이 북한과의 정치·문화 차이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게 전략 실패의 원인(정세현 수석부의장)이란 분석도 있다.

북한은 연말 협상 시한을 넘길 경우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임을 강조한다. 이와 관련해 북한이 ‘백두산 우등불’ 사진을 공개한 것은 북한 주민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우리는 버틸 준비가 돼 있다. 경제가 어려워서 우리가 손을 들겠지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 탄핵안은 내년 1월이나 2월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원에서 부결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이 사이에 판을 깨지 말고 다시 판을 짤 준비를 해야 한다. 대륙간탄도탄 발사가 아니라 유예를 통해 협상의 법칙을 재구성해야 한다.”(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아직은 정치의 시간

북한의 절제된 언행이 필요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무력 사용 가능’ 발언에 대해 박정천 북한군 총참모장은 담화를 내어 “미국이 무력을 사용한다면 상응 행동을 가할 것이며, 매우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지금은 군인의 시간이 아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뒤인 2010년 12월 존 맥도널드 한미연합사령부 작전참모부장(미 육군 소장)은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인은 정치적 타협이 불가능할 때 나서는 사람들이다. 군인은 전장에 가는 마지막 사람(선택)이어야 한다. 그건 국민도, 정치인도, 군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아직은 정치(외교)의 시간이다.

권혁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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