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2020년 국가 전략으로 내세운 열쇳말은 ‘정면돌파전’이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자력갱생”과 “새로운 전략무기 개발”을 두 축으로 내세웠다. 지난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에서 예고했던 “새로운 길”을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자력갱생을 통한 경제건설과 전략무기 현대화를 통한 정면돌파전’을 ‘새로운 길’로 제시한 셈이다. 올해 투쟁 구호를 “우리의 전진을 저애하는 모든 난관을 정면돌파전으로 뚫고 나가자!”로 정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시는 허리띠 안 조이게” → “졸라매더라도”이와 같은 결론은 2019년 12월28일부터 나흘간 진행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를 통해 나왔다. 김정은 위원장은 7시간에 걸친 보고에서 “조-미 간의 교착상태는 불가피하게 장기성을 띠게 되었다”며, 오늘날 북-미 대결이 “‘자력갱생’과 ‘제재’와의 대결로 압축”돼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그는 “우리에게 있어서 경제 건설에 유리한 대외적 환경이 절실히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화려한 변신을 바라며 지금껏 목숨처럼 지켜온 존엄을 팔 수는 없다”고 말해, 미국 주도의 제재에 굴복해 핵을 먼저 내려놓는 일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오히려 김 위원장은 “우리가 앞으로도 적대세력들의 제재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각 방면에서 내부적 힘을 보다 강화할 것을 절박하게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객관적 요인의 지배를 받으며 그에 순응하는 길을 찾을 것이 아니라 정면돌파전으로 뚫고 나가 객관적 요인이 우리에게 지배되게 하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경제제재를 비롯한 “미국의 적대시 정책”을 정면돌파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미국의 셈법을 바꿔낼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과정에서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이를 감수하면서 “나라의 존엄”을 지켜나가는 게 최우선이라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취임 초반인 2012년 4월15일 태양절 100주년 연설에서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다시 허리띠를 언급한 것은 그만큼 상황이 엄중해지고 북한의 결기도 강해졌다는 뜻이다.
김 위원장은 전략무기 능력 강화의 필요성도 역설했다. 북한은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중지 그리고 핵시험장 폐기 등 “선제적인 중대 조치들”을 취했지만, 미국은 한-미 합동군사훈련과 첨단 무기 한국 반입 그리고 제재 강화로 일관했다며 미국의 상응 조치 부재를 강하게 비난했다. 또한 미국의 대화 제의를 정치적 잇속을 차리기 위한 “시간 끌기”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일방적으로 매여 있을 근거가 없어졌다”고 밝혀, 핵실험과 ICBM 시험발사 중단을 재고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경고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미래의 안전을 포기할 수 없다”며 “이제 세상은 곧 머지않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보유하게 될 새로운 전략무기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전략무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전략무기’는 대개 강력한 보복 능력을 갖춤으로써 상대방이 전쟁을 아예 결심하지 못하게 만드는 무기를 말한다. 그런데 북한은 2017년 11월 “국가 핵무력의 완성”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전략무기” 그 후속편으로 ‘핵무력의 현대화’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전략무기’란 무엇일까미국과 러시아 등 핵 강대국들은 전략무기로 3축 체계를 갖춰놓고 있다. ICBM과 전략폭격기, 그리고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의 능력과 군사적 효용성을 고려할 때 전략폭격기는 북한의 선택지가 아닐 것이다. 북한이 전략폭격기를 자체 생산할 정도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고, 한-미 연합 전력이 압도적인 제공력과 방공 능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북한의 선택지는 세 가지로 압축해서 전망해볼 수 있다.
하나는 고체 연료를 사용하는 ICBM 개발이다. 이 미사일은 액체 연료를 쓰는 ICBM보다 연료 주입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고, 기동과 은폐에도 용이하다. 또 하나는 다탄두 ICBM의 개발이다. 연료량을 늘리면 탄두 중량을 높일 수 있어 다탄두 ICBM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하면 미사일방어(MD) 체제 무력화에 용이해진다. 끝으로 시험 단계에 있었던 SLBM의 전력화다. 이는 2차 공격 능력 확보에 필수적인데, 그만큼 전략적 억제 능력이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 위원장의 보고에서 주목할 점은 그가 내놓은 경고가 대부분 ‘조건’을 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이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끝까지 추구한다면 조선반도 비핵화는 영원히 없을 것”이며,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철회되고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 체제가 구축될 때까지 “전략무기 개발을 중단 없이 계속 줄기차게 진행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우리의 억제력 강화의 폭과 심도는 미국의 금후 대조선 입장에 따라 상향 조정될 것”이라고 했다.
이는 미국에 공을 넘기겠다는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가 종말을 고하고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는 것을 감수할지,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태도를 달리해 한반도 비핵화를 다시 추구할지 양자택일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북한이 ‘조건부’ 핵보유국 의사를 피력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협상의 여지를 남겨둔 것은 문제 해결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새로운 전략무기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도 그 “폭과 심도”는 미국의 대응 여하에 달렸다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미국의 조속한 태도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김 위원장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보고 마지막 부분에 담겨 있다. “앞으로 미국이 시간을 끌면 끌수록, 조-미 관계의 결산을 주저하면 할수록 예측할 수 없이 강대해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으며 더욱더 막다른 처지에 빠져들게 되어 있다.”
김 위원장이 보고 서두에 강조한 것은 미국과의 장기 대결 불가피성이었다. 그런데 막바지에는 미국에 시간을 끌지 말라고 경고성 호소를 하고 있다. 장기전에 대비하고 이를 경고하면서도 조속한 문제 해결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전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김 위원장은 노동당 전원회의 ‘보고’로 ‘신년사’를 대체했다. 2019년 내내 “새로운 길”을 경고하면서 미국을 압박했지만, 미국의 실질적인 태도 변화는 없었다는 판단과 “새로운 길”에 새로운 내용을 제시하기 힘든 처지가 맞물린 결과이다. 그러나 미국이 태도 변화를 하지 않는다면, 북한의 핵보유국화와 한반도 정세의 항구적인 불안이 그 길을 차지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길을 제시해야 할 몫은 미국에 있다. 그리고 그 길은 절대 어려운 선택이 아니다. 대북제재를 유지하고 강화하면서 북한을 굴복시키겠다는 접근법은 1990년대 초반 이후 미국이 줄곧 취해온 방식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고 하면서 오히려 제재를 강화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에겐 일종의 ‘데이트폭력’처럼 비쳤을 것이다.
이제는 미국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나서야 할 때이다. 북한의 긍정적 조치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제재를 풀면서 비핵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상대방의 언행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공감’이라고 말한다. 제재를 앞세운 “최대의 압박”이 역효과를 내는 것이 분명한 만큼, 이제는 제재 완화를 통한 ‘최대의 공감’으로 방향을 선회할 때이다.
한국의 창의적 역할이 중요하다트럼프 행정부의 방향 전환을 위해서는 한국의 창의적인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대북제재 해결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북한과 미국이 비핵화의 정의와 최종 상태에 합의하는 데 있다. 그런데 북-미 간 동상이몽이 너무나도 커서 지금까지 이를 합의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문재인 정부는 존재하지도 않고 합의하기도 쉽지 않은 한반도 비핵화의 정의와 목표로 ‘비핵무기지대’(비핵지대)를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세계 115개국이 속한 비핵지대에는 이미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정의와 목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반도 비핵지대는 남북한이 ‘지대 내’ 당사자로, 미국·중국·러시아가 ‘지대 밖’ 당사자로 참여하는 ‘2+3 모델’을 일컫는다. 여기에 또 다른 공식 핵보유국들인 영국과 프랑스도 참여할 수 있다. 핵심 내용은, 남북한은 비핵국가 지위를 분명히 하고 핵보유국들은 남북한에 핵위협을 가하지 않고 핵무기도 배치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비핵화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차집합’을 최소화하고 ‘교집합’을 최대화하는 방식이다. ‘핵포기가 먼저냐, 제재 해결이 먼저냐’는 북-미 관계 교착상태의 돌파구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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