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영양실조와 탈수 등으로 목숨을 잃은 주민이 18명으로 늘었다고 팔레스타인 보건당국이 밝혔다.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에서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무너진 건물 더미 아래서 버티고 있던 13살 소녀가 매몰 40여 시간 만에 구출됐다. 그의 나머지 가족은 폭격으로 모두 숨졌다. 유니세프는 가자지구 인구의 81%가 안전하고 깨끗한 물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며, 피란민(IDPs)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를 침공한 지 153일째를 맞은 2024년 3월7일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이 내놓은 최신 상황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가자지구 전역에서 이스라엘군의 폭격과 지상군의 작전이 불을 뿜으며 숱한 목숨이 매일 스러진 게 벌써 5개월을 넘어섰다. 3월5일 오전 10시30분부터 24시간 동안에만 가자지구 주민 86명이 숨지고, 113명이 다쳤다. 2023년 10월7일 개전 이후 3월6일 현재까지 이스라엘군의 공세로 인한 가자지구 사상자는 10만2873명(사망 3만717명, 부상 7만2156명)에 이른다.
목숨의 무게는 평등하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러시아의 침공 19개월째를 맞은 2023년 9월까지 우크라이나 민간인 사상자를 2만7449명(사망 9701명, 부상 1만7748명)으로 집계했다. 전쟁 기간은 가자지구가 우크라이나의 약 4분의 1에 불과하지만, 사상자 규모는 네 배에 육박한다. 폭력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전쟁 전 가자지구 인구는 210만~230만 명을 헤아렸다. 사상자가 10만 명을 넘어섰으니, 가자지구 인구 20명 가운데 1명꼴로 죽거나 다쳤다는 뜻이다. 여느 무슬림처럼 가자지구 주민의 절대다수는 사촌까지 대가족을 이뤄 모여 산다. 20명 가운데 1명이 죽거나 다쳤다는 건 가자지구 주민 전체가 가족의 사망과 부상을 애통해한다는 뜻이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세계 여성의 날’(3월8일)에 즈음해 유엔여성기구가 낸 자료를 보면, 개전 이후 3월1일 현재까지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여성은 약 9천 명이다. 아직 건물 더미에 깔려 주검을 수습하지 못한 사망자는 제외한 수치란다. 3월4일 하루 가자지구 남부 최대 도시 칸유니스 곳곳의 건물 더미에서 수습된 주검만 41구에 이른다. 유엔 쪽은 “가자지구 전쟁이 현 상태로 지속되면, 하루 평균 여성 63명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며 “사망 여성 가운데 약 37명은 가족과 자녀를 돌봐야 하는 어머니”라고 전했다.
가자지구 보건당국은 3월6일 “가자지구 북부 지역의 굶주림이 치명적 수준에 이르렀다. 특히 어린이와 임산부, 만성질환자가 위태롭다”고 발표했다. 유엔인구기금(UNFRA) 쪽도 최근 “가자지구에서 임신 여성과 수유 중인 여성층의 영양실조율이 치솟고 있다. 임산부와 신생아 모두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유니세프가 낸 자료를 보면, 가자지구 거주 2살 이하 어린이 6명 가운데 1명이 만성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다. 아델레 코드르 유니세프 중동 북아프리카 담당 국장은 3월2일 성명을 내어 “가자지구의 비극적이고 끔찍한 죽음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라며 “예견 가능했으며, 충분히 예방할 수도 있는 죽음”이라고 탄식했다. 앞서 폴커 튀르크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2월29일 스위스 제네바 유엔본부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상황 관련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가자지구의 참상은 어떤 말로도 수식이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10만 명이 넘는 가자지구 주민이 죽거나 다쳤다. 다시 한번 말한다.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가자지구 주민 20명 가운데 1명이 죽거나 다쳤다. 부모를 잃거나 가족과 떨어진 채 홀로 생활하는 어린이가 1만7천여 명에 이른다. 그보다 많은 어린이가 평생 감내해야 할 육체적·정신적 상처를 안게 됐다. 오늘 가자지구 사망자가 3만 명을 넘어섰다. 실종자도 수만 명이나 된다. 이들 대부분은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거주지 건물 더미에 깔려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학살이다. 끝내야 한다.”
튀르크 대표가 ‘학살을 끝내라’고 강조하던 날 새벽녘, 가자지구 북부 가자시티 외곽의 나불 지역에서 주민들이 일주일여 만에 재개된 구호품 배급을 받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집트 국경과 맞닿은 가자지구 남부는 그나마 사정이 낫지만, 이스라엘에 가로막힌 북부 지역은 구호품 전달이 어려워 굶주림이 만연한 채다.
마침내 물과 식량 등을 실은 대형 트럭이 교차로로 진입했다. 굶주린 이들이 트럭을 향해 내달렸다.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된 현장에서 총성이 울려퍼졌다. 이스라엘 군 당국은 “통로 확보를 위한 경고사격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 쪽은 “살상을 위한 발포였다”고 반박했다. 현장에서 적어도 112명이 숨지고 760여 명이 다쳤다. 영국 <비비시> 방송은 사건 현장 인근 알아우다 병원 의료진의 말을 따 “병원에 실려온 부상자 대부분이 총상을 입은 상태였다”고 전했다. ‘밀가루 학살’이란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핏빛 일요일’이라 한다. 25살 청년 인권운동가 존 루이스가 이끈 시위대 600여 명이 1965년 3월7일 미국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인종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국도 60번을 따라 행진했다. 행렬이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에 이르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주방위군이 최루탄을 쏘며 곤봉을 휘둘렀다. 시위대 전원이 뭇매를 맞고 쓰러졌다. 일요일인 2024년 3월3일 ‘핏빛 일요일’ 59주년 기념식이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 부근에서 열렸다. 인도계 어머니와 자메이카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상 첫 여성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가 연설에 나섰다.
“가자지구 주민들이 굶주리고 있다. 그들이 처한 비인도적 상황 앞에서 인도주의적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정부는 구호품 공급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미군은 이날 요르단군과 공동으로 가자지구 상공에서 3만8천 명분 식량을 낙하산에 실어 공중투하했다. 케네스 로스 전 휴먼라이츠워치(HRW) 사무총장은 소셜미디어 ‘엑스’(옛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비싸고, 비효율적이고, 위험하기까지 한 식량 공중투하를 하는 까닭은 지상에서 구호품 공급을 가로막고 있는 이스라엘에 막대한 군사·무기 원조를 중단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짚었다. 가자지구는 오늘도 ‘핏빛’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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