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 초창기에 몇몇 직원과 아시아인권연구모임이라는 공부 모임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 모임에 강사로 초청했던 미얀마(당시엔 버마) 출신 활동가로부터 타이의 국경도시 메솟에 있는 미얀마 난민들과 난민 학교를 소개받아, 그중 두 학교(New Society School, Burmese Labour Solidarity Organization School)를 후원했습니다. 국가인권위 직원들도 참여해 매달 20만원 정도를 현지 학교에 보냈습니다.
일이 커진 건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사진강좌를 함께 들은 친구들 때문이었습니다. 우연히 메솟의 버마 난민학교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친구 몇 명이 현장에 가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진 찍어 온라인 카페에라도 올리면 그곳 난민 사정을 더 널리 알리는 기회가 되지 않겠냐며 우리끼리 나름대로 명분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메솟을 방문한 게 2007년 여름의 끝자락이었습니다. 역시나 국가인권위 직원들의 도움으로 후원금을 거뒀고, 아이들이 볼 만한 그림책도 몇 상자 모았습니다.
메솟은 미얀마와 국경을 접한 타이 북부의 도시입니다. 시내에서 국경까지 차로 10여 분, 난민캠프가 있는 산악지역까지는 한 시간 가까이 차로 움직여야 합니다. 타이 경찰이 감시하는 눈을 피해 동트는 어스름 무렵 캠프에 들어가고, 비가 쏟아지는 캠프 산비탈의 진흙 바닥에 넘어져 구르기도 했습니다. 난민 수만 명이 캠프에 있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난민이 메솟 시내에 흩어져 살던 때였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미얀마 군사정권의 수탈을 피해 먹고살기 위해 국경을 넘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우리의 타이 여행은 늘 메솟을 중심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라곤 학교를 방문해 아이들에게 즉석사진을 찍어 나눠주고, 샌드위치를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수업하는 것을 구경하고, 쉬는 시간이면 학교 앞 공터에서 공을 차고 고무줄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집에 돌아갈 때 우리 숙소와 같은 방향의 아이들이 우리 손을 이끌고 우르르 함께 골목을 걸어갑니다.
2012년 방문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뒤 미얀마의 정치 상황이 조금씩 좋아져 메솟의 미얀마 사람들이 하나둘 고향으로 돌아가고, 몇몇 학교 선생님이 떠나면서 학교 운영이 어려워졌다고 들었지만, 미얀마 민주주의 발전의 징표라 여겨 크게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정기후원이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퇴보하지 않을 것또 긴 시간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미얀마의 민주주의가 전복되는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미얀마는 그때의 미얀마가 아니고 그때의 메솟 아이들도 이젠 아이가 아닙니다. 어쩌면 그 메솟 아이들은 지금 미얀마 민주화 투쟁의 주축인 MZ세대가 되어 피 흘리는 저항의 거리에 서 있을지 모릅니다. 혹은 부모 세대가 그랬듯 산에 들어가 총을 들거나, 아니면 숨죽이며 더 큰 미래를 도모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편으로 희망적인 것은 역사의 퇴보를 막으려는 미얀마 민중이 생계와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며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으로라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퇴보하지 않으며, 가슴에 새겨진 저항과 승리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그때 메솟에서 만난 아이들도 이 승리 기록의 목격자가 되길 바랍니다. 아이들이 다시 그 나라를 떠나 타국을 떠도는 지난하고 불안한 삶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최준석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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