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봄, 미얀마 국민은 군부독재 정권의 총칼에 맞서 목숨을 건 민주화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한겨레21>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미얀마 국민과 연대하고 그들을 지지하는 한국 시민의 글을 제1358호부터 미얀마어로 번역해 함께 싣습니다. #Stand_with_Myanmar
그는 시를 좋아하는 문학청년이었다. 17살 때부터 짬짬이 시를 썼다. 1988년 고향에 있는 양곤경제대학교에 진학했다. 미얀마 국립 양곤대학의 경제학부가 별개의 연구교육기관으로 독립한 경제경영 종합대학이다. 대학 1학년 뜨거웠던 그해 여름, 전국에서 대규모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8888항쟁’(1988년 8월8일)이다.
그도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군대는 무차별 유혈 진압을 서슴지 않았다. 9월에는 쿠데타로 나라의 전권을 다시 장악했다. 1962년 네 윈의 첫 쿠데타 이후 1974년 형식적 민간정부를 유지하다가 다시 군부독재로 돌아간 것이다. 한국에서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는 표어 아래 올림픽 축제가 한창일 때, 미얀마에선 한 젊은이의 삶이 민주화투쟁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로부터 3년 뒤, 그는 한국에 왔다. 얀 나이 툰(51·사진) 미얀마 민주주의민족동맹(NLD) 한국지부장 이야기다. 올해로 꼭 30년째, 한국살이가 고국에서 태어나 살던 햇수보다 훨씬 길어졌다. <한겨레21>은 4월6일 저녁 인천시 부평역 앞의 한 미얀마 불교 사원에서 얀 나이 툰 지부장(이하 직함 생략)을 만났다.
얀 나이 툰은 8888항쟁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비밀경찰과 군인들이 집에까지 찾아와 내 행방을 물었어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요.”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타이 접경지대로 피신했다가 국경을 넘었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체포돼 혹독한 고초를 치를 게 뻔했다. 문학청년 대학생은 한순간에 ‘정치적 난민’ 신세가 됐다.
1991년 무턱대고 한국으로 왔다. 15일까지 단기방문자의 비자 면제를 해주는 무비자 입국이었다. 마침 고향에 있는 아버지(81)의 친구 아들이 한국에 있다고 했다. 인천 남동공단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였다. 그렇게 처음 한국에서 동포를 만났고, 인천에 삶터를 잡았다. 15일 체류 만기는 금방 닥쳐왔다. 이른바 ‘불법체류자’가 됐다. “인천의 한 목재공장에 취업해서 생활비를 벌었어요. 지금도 같은 곳에서 일해요.”
몸은 한국에 있어도 마음은 늘 고국을 향했다. 1997년 한국에 체류하는 미얀마인 중 뜻이 같은 이들을 모아 ‘버마 민주화를 위한 모임’을 만들었다. 뭐라도 해볼 참이었다. 그러던 중 위기를 맞았다. 1998년 3월, 불법체류자로 체포돼, 본국으로 추방될 처지에 놓였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본국 송환 대신 타이로 추방됐다.
얀 나이 툰은 당시 타이에서 고국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던 미얀마 망명자들을 만났고,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NLD 본부와도 선이 닿았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연락해 ‘NLD 조직위원회 코리아’를 만들고 본부의 공식 승인을 받았다.
“1998년 8월 다시 한국에 들어왔어요. 2000년에는 한국 시민단체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의 도움을 받아 정식으로 난민 신청을 했지요.” 2005년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까지 꼬박 5년이 걸렸다. NLD 한국지부는 한국의 사회단체·학생단체와 손잡고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국제연대 활동을 한다. NLD 외국 지부는 한때 13개 나라에 있었으나 지금은 9개국으로 줄었다고 한다.
“미얀마 안에서는 NLD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심한데다, 국내 사정을 세계에 제대로 알릴 수단이 없었고 바깥의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어요.” 2021년 2월 군부가 쿠데타로 문민정부를 뒤엎고 정권을 장악한 뒤 민주화 인사 탄압이 더 극심해졌다고 한다. “수배자 집에 들이닥쳐서 가족에게 행방을 묻고, ‘모른다’고 대답하면 총으로 가족을 쏴버려요. 옛날에는 말로 협박하거나 폭행했는데, 지금은 더 나빠졌어요. 양곤에 홀로 계시는 아버지는 서로의 안전을 걱정하며 ‘나에게 전화도 하지 말고, 돈도 부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얀 나이 툰은 요 몇 년 새 미얀마 국민이 바뀌고 있다고 했다.
“최근 100년 넘게 미얀마 국민은 (식민지 시절에는) 영국 밑에서, 일본 밑에서, 독립한 뒤에는 군부독재 밑에서 지냈기 때문에 눈도 귀도 가린 채 살았어요. 군사독재는 언론을 통제하고 국민을 세뇌했습니다. 국민의 75%는 군사독재가 무서워 숨죽이며 살았고 민주주의 인식이 낮은 편이었어요. 하지만 2015년 총선에서 NLD가 크게 이기고 수십 년 만에 문민정부가 세워진 뒤, 사람들의 의식이 조금씩 깨어났지요. 5년 동안 민주주의를 경험하며 그동안 세뇌당했던 데서 벗어나고 있는 거죠.”
8888항쟁의 참담한 실패는 미얀마 국민에게 큰 트라우마와 교훈을 남겼다. 얀 나이 툰은 8888항쟁과 2021년 항쟁은 크게 다르다고 했다. “1988년에는 민주화 시위가 벌어지자 군부가 쿠데타를 했고, 이번엔 쿠데타가 나자 시위가 더 크게 일어나고 있어요.”
시대와 세대도 다르다. “미얀마에서 요즘 젊은이인 ‘Z세대’는 우리 때와 많이 달라요. 머리도 좋고, 깨어 있어요. 인터넷으로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SNS로 조직적인 활동을 바로바로 실행하고, 미얀마 상황을 밖으로 알립니다. 여러 가지 창의적인 방법으로 평화시위를 하고, 군이 총을 쏘면 일단 흩어졌다가 금세 다시 모여요. 미얀마에는 냄비 같은 것을 두드려 요란한 소리를 내면 나쁜 귀신들이 도망간다는 전통적인 믿음이 있어요. ‘딴봉띠’라고 하는데, 음력설 같은 명절 풍습입니다. 이걸 군부를 쫓아내는 시위로 활용하자고 아이디어를 낸 것도 젊은이들이에요.”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다. 4월7일 미얀마 현지 매체 <미얀마 뉴스>는 이번 쿠데타 이후 군부의 무차별 발포와 폭력으로 600명 넘게 숨졌다고 보도했다.
“8888항쟁 때보다 지금 탄압이 훨씬 심해요. 1988년에도 군인들이 시위대에 총을 쐈지만 누군가를 표적 삼아 쏘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조준사격을 합니다. 시위대뿐 아니라 민간인의 집 안에까지 들이닥쳐 총을 쏴요. 출퇴근 버스에서 총 맞아 죽은 시민도 있고 외국인도 죽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 그들에게 ‘군부’라거나 ‘군사정부’라는 단어도 쓰지 않아요. 그들은 이제 ‘군대’가 아니라 ‘살인집단’입니다. 사람만 죽이는 게 아니라, 약탈도 하고 성폭행도 해요. 갈수록 하는 짓이 군대가 아니라 무기를 가진 강도집단이 됐어요.”
미얀마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시민세력 일부에선 무장저항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퍼지고 있다. 민주화그룹이 구성한 ‘국민통합정부’도 소수민족까지 아우른 ‘연방군’ 창설을 공언했다. 내전 우려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미얀마엔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유엔에 보호책임(R2P) 발동을 요청하고 미국이나 국제사회의 지원을 기다리는데, 거북이처럼 ‘나토’(NATO·No Action Talking Only,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만 하고 있잖아요. 우리나라 문제는 우리가 풀어가야 해요. 그래서 젊은이들과 소수민족이 함께 연방군을 만들어서 싸우려는 겁니다.”
얀 나이 툰은 임시정부 격인 국민통합정부가 전적으로 미얀마 국민 전체를 대표한다고 말했다. 군의 탄탄한 기득권과 민주화 방해에도 지금까지 선거에서 계속 크게 승리했다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국민통합정부에는 소수민족 대표까지 참여해요. 국민통합정부는 조만간 새 내각을 구성하고 연방의회대표위원회(CRPH)를 통해 그 명단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국제사회가 국민통합정부를 미얀마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면 군부를 고립시키고 민주주의를 되찾는 데 큰 힘이 될 겁니다.”
NLD 문민정부 집권 시기에 군부가 소수민족 로힝야를 가혹하게 학살하고 추방한 것, 그리고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침묵했다가 국제사회의 비판을 산 것에 대해서도 얀 나이 툰은 미얀마 내부 사정이 있다고 했다.
“학살은 군대가 저질러요. 그런데 왜 하필 문민정부 때 했을까요? NLD의 도덕적 정당성을 깎아내리고 망신을 주려고 한 행동입니다. 그런데도 수치 여사님(그는 ‘여사님’이라는 존칭을 썼다)과 NLD 정부가 이런 사정을 적극 해명하지 못한 이유가 있어요. 수치가 무장투쟁을 벌이는 소수민족들과도 화합하려고 엄청 노력하는 단계에서 군과 사이가 틀어지면 제대로 민주주의가 이뤄지지 않을까봐 입을 열지 않았고, 결국 국제사법재판소(ICJ)까지 피고로 가게 된 겁니다. 군은 2008년 헌법을 근거로 지금도 국방·내무·국경 장관을 직접 임명하고, 연방의회뿐 아니라 지자체까지 모든 의회의 의석 25%를 가져갑니다. NLD 정부는 로힝야족을 도와주려 하지만 군이 계속 그런 식으로 문제를 일으켜요.”
그런데도 미얀마 국민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부에 맞서는 용기와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이번에 180도 뒤집지 않으면 8888항쟁의 실패가 되풀이된다는 절박함이 있어요. 그래서 연방군을 만들려는 생각도 나왔습니다. 미얀마의 젊은이들도 ‘내가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예전의 독재 시대로 가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우리 세대가 아니더라도 다음 세대를 위해 이번엔 우리가 꼭 이겨야 한다는 마음가짐이에요.”
NLD를 비롯해 미얀마 국민은 유엔의 보호책임 발동을 원한다. 그러나 보호책임 발동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고 부작용이 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제사회가 개입하면 미얀마 시민의 희생을 줄이고 시민사회와 군이 충돌하는 기간도 짧아질 수 있어요. 지금은 군부와 대화할 수 있는 단계를 넘었고 그런 식의 해결도 바라지 않습니다. 군과 협상하고 합의한다 해도 문민정부 이행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게 뻔해요. 1988년 쿠데타를 했을 때도 군은 똑같은 말을 했(지만 지키지 않았)어요.”
군부는 이번 쿠데타 이후 수많은 민주화 인사를 수배 명단에 올려 공영방송에서 보도했다. 얀 나이 툰 지부장도 그중 한 명이다. “두 차례나 수배 명단에 올랐어요. 한 번은 미얀마에서 총파업에 참여한 공무원들을 지원하기 위한 ‘불법 모금’을 했다는 이유로, 최근엔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면담했을 때 군부를 비방하는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하지만 지금은 미얀마 사람들이 수배 명단에 오르는 걸 자랑스러워해요. 수배자가 많아진다는 건 군부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고, 군부가 그것을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얀 나이 툰은 “이번 민주화운동은 꼭 성공할 것이라고 100% 확신”한다. 미얀마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크고, 전세계가 미얀마 상황을 지켜보며 도와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 시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꼭 실어달라고 했다.
“한국 국민과 정부에 진심으로 대단히 고맙습니다. 한국 국민도 예전에 군사독재 시절을 겪었고, 그래서 독재 밑에서 사는 게 어떤 것인지를 잘 압니다. 경험이 있으니까 우리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것 같아요. 한국이 미얀마 국민에게 보내주신 지지와 격려는 우리뿐 아니라 우리 딸 아들 세대까지 결코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얀 나이 툰의 인터뷰 통역 도우미로 자리를 함께한 윈라이도 감사의 마음을 보탰다.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많은 시민이 각자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를 돕고 있어요. 미얀마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걸 느껴요.”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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