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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책을 남기고 영면에 들다

데뷔작 <앵무새 죽이기>로 최고의 명예를 얻은 하퍼 리… 흑인 인권의 성장과 함께한 세월을 보내다
등록 2016-03-02 16:03 수정 2020-05-03 04:28
AP 연합뉴스

AP 연합뉴스

꼬부랑 할머니가 덩실덩실 춤을 춘다. 때는 2016년 2월18일 오후 3시30분. 장소는 미국 수도 워싱턴 펜실베이니아 에비뉴 1600번지, 대통령이 손님을 맞이하는 백악관 1층 블루룸이다. 이름은 버지니아 매클로린. 브라이트 블루로 손톱을 칠한 멋쟁이, 왼손에 자기 키만 한 지팡이를 쥔 106살 노인이 달뜬 목소리로 외쳤다. “세상에, 진짜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네~! 내 평생 백악관에 와볼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 흑인 대통령에, 흑인 영부인, 게다가 흑인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서라니….”

매클로린은 1909년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서 부모님과 드넓은 목화밭에서 일할 때만 해도, 언젠가 백인들과 같은 식당에서 밥 먹을 수 있을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13살에 결혼해 남매를 낳은 그는 남편이 사고로 숨진 직후인 1939년 워싱턴으로 이사해 한평생 재봉사로 일했다. 손자의 손자가 아이를 낳게 된 세월이다. 그는 2월22일 와 한 인터뷰에서 “이제 언제든 웃으며 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감격해했다. 세상은, 지난 106년 동안 얼마나 나아졌을까?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문제를 정면에서 고발한 기념비적 소설 의 작가 하퍼 리의 생각을 들어보자.

노예를 부리던 집안의 말괄량이

넬 하퍼 리는 1926년 4월28일 앨라배마주 남부 인구 6천 명 남짓한 소도시인 먼로빌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남북전쟁 때 노예제를 찬성하는 남부군 편에서 싸웠고, 집안 대대로 노예를 부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버지 애머사 콜먼 리는 저명한 지역 변호사로, 하퍼 리가 태어난 1926년부터 1938년까지 민주당 소속 앨라배마 주의회 의원으로 활약했다.

어린 시절 그는 이름난 말괄량이였다. 나무 올라타기와 땅바닥에서 뒹굴기가 취미였고, 남자아이 패주기가 특기였다. 초·중·고등학교를 집 근처에서 마친 그는 역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헌팅던 여자대학에 진학했다. 고교 시절부터 문학에 관심을 보인 그는 입학 직후부터 교지에 글을 기고했다. 하지만 여대 특유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1년 만에 앨라배마주립대로 옮겨간다.

가업 잇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권유로 법학을 전공했지만, 그는 옮겨간 학교에서도 교지를 통해 습작 발표를 이어갔다. 대학 4학년 때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여름학기를 보내고 돌아온 그는 곧바로 학교 문을 박차고 나왔다.

1947년 흑인 야구선수 재키 로빈슨이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을 체결하고 메이저리그에 발을 디뎠다. 1948년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군대 내 인종분리를 금지했다. 하퍼 리가 작가의 꿈을 키우기 위해 뉴욕에 도착한 것은 1949년의 일이다. 맨해튼 이스트 80번가에 마련한 허름한 거처에선 온수도 나오지 않았다. 잠시 서점에서 일하던 그는 항공사 예약담당자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고, 밤이면 창작에 몰두했다.

1954년 미 대법원은 이른바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 판결을 통해 인종분리 교육을 위헌으로 규정했다. 1955년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시작한 버스 승차 거부 투쟁이 남부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그 무렵 하퍼 리는 고향 친구의 소개로 만난 유명 작사가 마이클·조이 브라운 부부와 절친한 사이가 됐다. 1956년 작사료로 거액을 받게 된 브라운 부부는 하퍼 리에게 ‘특별한 선물’이 담긴 봉투를 건넸다. 동봉된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년간 유급 휴가를 줍니다. 뭐든, 쓰고 싶은 걸 써보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1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돈이 들어 있었다. 하퍼 리는 미친 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단편을 여러 편 완성한 그는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다. 장편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두 달여 만에 첫 작품의 초고를 완성했다. 출판사에선 유능한 문학담당 편집자를 붙여줬다. 편집자는 그에게 초고에 등장하는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에 집중할 것을 권했다. 그렇게 해를 보내며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완성돼갔다.

생애 첫 출간 작품에 퓰리처상

애티커스 핀치는 앨라배마주 소도시 ‘메이콤’에 사는 변호사다. 부인과 사별한 뒤 3살 터울 남매를 키우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인 말괄량이 소녀 스카우트 핀치가 6살에서 9살로 성장하는 1932~35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대공황의 여파로 미국 노동자 4명 가운데 1명이 일자리가 없던 때다. 흑인과 백인은 사는 곳이 완벽히 분리돼 있던 때기도 하다. 핀치가 백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쓴 흑인 남성의 변호를 맡게 되면서 생기는 갈등이 소설의 줄거리다.

쓰고 고치기를 2년여, 마침내 하퍼 리의 첫 작품이 완성됐다. 소설은 1960년 7월11일 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무명작가의 첫 작품임에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삽시간에 베스트셀러 목록의 맨 위칸을 차지했다. 1961년엔 퓰리처상을 받았다. 할리우드에선 이듬해 크리스마스에 맞춰 영화를 개봉했다. 애티커스 핀치 역을 맡은 미남 배우 그레고리 펙은 아카데미 주연배우상을 받았다.

가 출간된 지 3년 만인 1963년 8월28일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내겐 꿈이 있습니다’란 연설을 했다. 1964년엔 미 의회가 민권법을 통과시켰다. 흑인도, 백인처럼 투표할 수 있게 됐다. 정신없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퍼 리는 1964년 3월 뉴욕의 공영라디오 <wqxr>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빨리 유명해져 놀라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놀란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그저 멍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고, 뻗어 누워버린 기분이었다. 책을 낸 뒤 그저 평론가들이 이른 시간 안에 고통 없이 내 작품을 ‘안락사’시켜주기만 바랐다. 물론 누군가 이 책을 조금은 좋아해줘서, 내가 힘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차기작에 대한 대중적 기대감이 갈수록 커졌다. 젊은 작가는 쉽게 다음 작품을 내놓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하퍼 리는 <wqxr>와의 인터뷰를 끝으로 언론과 접촉을 끊었다. 그리고 고향 먼로빌로 내려갔다.
그의 오랜 친구인 토머스 레인 버츠 목사는 2011년 7월31일 오스트레일리아의 와 한 인터뷰에서 하퍼 리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내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출간 뒤 겪어야 했던 압박감과 유명세를 다시는 치르고 싶지 않았다. 둘째,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이미 다 했고 그걸 되풀이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젊은 작가가 은둔에 들어간 뒤에도 책의 인기는 사그라들 줄 몰랐다. 세대가 바뀌어도 소설의 울림은 바뀔 줄 몰랐다. 수많은 미래의 법률가들이 사춘기 시절 애티커스 핀치를 사표로 삼던 시절이다. 1988년 전미영어교사협회는 “미국 중·고등학교의 74%가 를 문학 수업 교재로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1999년 말에는 미국 사서협회 기관지 격인 이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하퍼 리의 작품을 꼽았다. 2015년까지 는 4천만 부 이상 팔린 것으로 전해진다.
책 출간 이후 반세기 동안 그는 먼로빌과 뉴욕 센트럴파크 인근에 마련한 자그마한 아파트를 오가며 생활했다. 조용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삶이었다. 수많은 명예학위와 훈·포장이 그에게 수여됐지만, 그는 한사코 축하 연설을 마다했다. 출간 50주년 기념행사 때도 그는 “바보가 되느니 침묵하는 게 낫다”며 말을 아꼈다.
팔순에 접어든 2007년 중풍이 덮쳐왔다. 쓰러진 그는 청력과 시력을 거의 잃고, 휠체어에 의존하게 됐다. 함께 살던 15살 연상인 맏언니 앨리스가 2014년 103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 뒤 그는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던 2015년 초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하퍼 리의 ‘새 작품’이 출간된다는 얘기였다. 출판계가 들썩였다.
출간 55주년을 맞은 그해 7월11일 이 출간됐다. 26살로 성장한 스카우트가 뉴욕에서 기차편으로 고향 메이콤을 향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소설 속 20년은 긴 세월이었다. 흑인 인권의 옹호자였던 애티커스 핀치가 백인우월주의 단체에서 연설할 정도로 많은 것을 바꿔놨다.
평단의 혹평이 이어졌다. 반세기 영웅이었던 애티커스의 ‘추악한 얼굴’에 독자들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출간을 전후로 하퍼 리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소문이 떠돈 것도 이 때문이다. 는 서평 기사에서 “가 양심적 백인 변호사를 내세워 불의한 세상에도 정의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면, 은 시대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며 “전작이 당의정이라면, 후속작은 쓰디쓴 약이라고 할 만하다”고 평했다.
55년 만의 후속작 혹은 원작
은 후속작이 아니다. 의 원작이었다. 하퍼 리는 책 제목 을 구약성서 이사야서 21장 6절에서 따왔다.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파수꾼을 세워 그가 본 바를 보고하게 하여라.” 파수꾼의 임무는 성문 밖을 지키는 것이다. 적이 몰려오면 소리쳐 알려야 한다. 파수꾼 하퍼 리가 지켜본 ‘적’은 누구일까? 애티커스 핀치의 20년 세월에 해답이 있다.
106살 버지니아 매클로린이 백악관에서 춤을 춘 지난 2월18일 하퍼 리는 먼로빌의 요양원에서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이튿날 깨어나지 않았다. 향년 89. 2월20일 먼로빌의 제일연합감리교회에서 절친한 친구와 가족이 모여 조촐하게 장례식을 치렀다.
하퍼 리의 오랜 친구인 역사학자 웨인 플린트가 조사를 했다. 제목은 ‘우리 안의 애티커스’, 2006년 지역단체가 인종평등에 기여한 공로로 하퍼 리에게 상을 줄 때, 플린트가 썼던 축하 원고다. 하퍼 리는 생전에 “한마디 보태지도, 빼지도 말고, 그대로 내 장례식에서 읽어달라”고 했단다.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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