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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사랑한 탐험가

현대 잠수복을 대중화한 서핑용품 전문 브랜드의 창업주 잭 오닐이 쓴 서핑의 역사
등록 2017-06-22 17:42 수정 2020-05-03 04:28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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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핑의 역사는 2천 년 전에 시작됐다. 타히티 폴리네시아인 조상이 시작해 하와이로 전해졌고, 하와이에서 오랫동안 전통놀이로 이어져왔다. 1950년대 초만 해도 서핑은 여전히 하와이와 폴리네시아(태평양 중남부에 산재하는 작은 섬들) 지역 해안으로 제한됐다. 가장 큰 이유는 그 일대가 1년 내내 따뜻한 수온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서핑이 전세계로 확산된 데는 세계적 서핑용품 전문 브랜드 ‘오닐’의 창업주 잭 오닐의 공이 컸다. 그는 차가운 물속에서도 오래 견딜 수 있는 현대의 잠수복을 대중화한 인물이다. 그 자신이 전설적 서퍼였고 네오프렌 소재의 잠수복 판매를 통해 서핑용품 산업에 혁명을 일으킨 바다를 사랑한 탐험가 잭 오닐이 6월1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 해변의 자택에서 숨졌다. 향년 94.

좀더 오래 바다에 머물 수 있을까

잭 오닐은 1923년 3월27일 미국 덴버에서 태어나 남부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자랐다. 10대 시절 그곳 해안에서 보디서핑(서프보드 없이 가슴과 배로 파도를 타는 것)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해군 파일럿으로 복무했고, 1949년 오리건주 포틀랜드대학을 경영학 전공으로 졸업했다.

잠수복 개발은 그가 아내와 함께 1950년대 초반 샌프란시스코 오션비치로 이사한 뒤 이뤄졌다. 그때만 해도 서퍼들은 현대 기술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통나무를 잘라 보드를 만들어 탔고, 서핑을 한 뒤 아무 유목이나 잡아타고 해변가로 돌아왔다. 수온이 떨어지는 시기에는 고무 비닐로 안감 처리한 트렁크나 기다란 속옷, 혹은 기름기 있는 도료로 코팅한 울스웨터를 입고 바다에 들어갔다. 외관상 조금 더 따뜻해 보일 뿐 실제 보온에는 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서핑 뒤 파랗게 질린 몸을 덥히려고 해변에서 폐타이어를 태우곤 했다.

그전까지 창문 제도사, 택시 운전사, 주차권 판매기 세일즈맨 등으로 일하던 오닐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창고를 개조해 서핑용품을 판매하는 ‘서프숍’을 차렸다. 그는 서핑을 사랑한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하면 찬물에 대항해 좀더 오랫동안 바다에 머물 수 있을지 고민했다. 오닐은 서핑 슈트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합성고무 소재가 대중화하면서 오닐은 기회를 보았다. 1930년대 미국 듀폰사가 산업용으로 개발한 합성고무의 일종인 ‘네오프렌’ 소재의 조끼와 투피스 잠수복을 만들었다. 동료들은 그가 이상한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놀려댔고, 사업의 성공을 예상치 못했다. “친구들은 모두 나에게 ‘오닐, 너는 그걸 해변에서 친구 5명 정도에게 팔고 사업을 접게 될 거야’라고 말했다”()

이후 1960년대 나일론 저지 소재로 안감을 붙이면서 좀더 입고 벗기 편하고 내구성 있는 잠수복이 개발됐고, 서퍼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다. 디자인은 개조를 거듭했고 곧 지금까지 서퍼들이 애용하는 ‘애니멀 스킨’이라 불리는 전신 슈트가 등장했다.

시제품 테스트 중 사고로 한쪽 시력 잃어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서퍼들은 잠수복이 등장한 초기, 자신의 다양한 스타일과 문화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다. 서핑 잡지 의 설립자 스티브 페즈만은 와의 인터뷰에서 “잠수복이 처음 소개됐을 때, 나는 순수함에 가득 찬 행위로 꽤 오랫동안 그것을 입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잠수복은 곧 많은 사람을 서핑과 바다에 끌어들이는 계기가 됐다. 1960년대 중반 오닐과 그의 라이벌 빌리 앤드 밥 형제가 생산하는 잠수복은 초기 서핑용품 산업의 핵심이었다. 이들의 잠수복(현재까지 판매되는 잠수복 브랜드 ‘보디글러브’)은 서프보드보다 많이 팔렸다.

(2005)의 저자인 서핑 역사가 매트 워쇼는 에 “잠수복 자체가 역사상 어떤 서프보드 디자인보다 더 많은 사람을 물에 뛰어들게 했다”고 말했다.

는 “오닐은 서퍼들을 마약중독자 이미지에서 진지한 운동선수로 격상”했으며 “센트럴과 북부 캘리포니아 연안을 서퍼들의 연중 안식처로 확립했다”고 말했다.

오닐이 네오프렌 소재 잠수복의 ‘발명자’는 아니다. 미국 정부의 핵무기 개발 계획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물리학자 휴 브래드너가 1951년 해군 심해 잠수부와 스쿠버다이빙을 위한 합성고무 소재 잠수복을 개발한 바 있다.

오닐은 특유의 자유로운 정신, 탐험가 이미지와 마케팅 기술로 잠수복을 전세계에 대중화했다는 평가를 받았 다. 그는 무역박람회에 나가 자기 아이에게 잠수복을 입혀 얼음물로 가득 찬 물탱크에 들어가 놀게 해 그 효과를 과시했다. 서퍼 모델을 고용해 멋진 광고도 만들었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모험가 이미지를 갖고 있던 오닐은 해변에서 거대한 항공모함을 끌고 다니며 ‘오닐’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열기구를 직접 조종해 띄우거나 요트를 탔다. 사람들은 그를 이 잠수복의 ‘상징’으로 기억했다.

오닐은 1970년대 보드리시(보드용 줄) 시제품을 테스트하던 중 사고로 보드에 얼굴을 맞아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이후 남은 삶 동안 한쪽 눈에 검은 가죽 안대를 하고 다녔다. 무성한 턱수염과 가죽 안대를 찬 그의 얼굴은, 오랫동안 오닐사의 로고로 사용됐다. 해적 이미지의 얼굴은 인기를 끌었고 오닐 브랜드는 더 강력해졌다.

오닐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잠수복 제조사가 됐다. 오닐의 아들 펫이 1985년부터 운영해온 이 사업은 현재까지 전세계 잠수복의 약 60%를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닐이 초창기부터 내세운 ‘옷 안에선 언제나 여름’(It’s always summer on the inside)이라는 슬로건은 광고업계의 고전이 됐다.

오닐은 1959년 좋은 파도와 따뜻한 바다에 이끌려 다시 산타크루즈로 이주했다. 그는 여생을 이 도시에서 머물렀고, 1996년 해양환경 교육 프로그램 를 만들었다. 프로그램은 지금까지 약 10만 명의 아이들을 해양과학과 생태학의 세계로 안내했다. 이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는 오닐의 낡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만 아는 파도를 갖고 싶어 한다”

이들은 몬테레이만의 해양보호구역까지 가서 그곳을 둘러보았다. 바다를 사랑한 그는 AP 인터뷰에서 “는 내가 한 일 중 최고다”라고 말했다.

오닐은 2002년 언스트앤드영 기업가상을 받는 자리에 턱시도에 샌들을 신고 나타났다. 2005년 뇌졸중을 앓았고 죽기 전 수년간 서핑을 하지 않았다. 의 임원 댄 해이플리는 미국 라디오방송 NPR에 7월 오닐을 위한 ‘패들아웃’(보드에 엎드려 손으로 노를 저어 바다로 나아가는 것) 추모식이 있을 거라고 밝혔다. 패들아웃은 가족과 친구들이 보드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함께 손잡고 원을 그리는 서핑 전통이다.

오닐은 잠수복 판매로 백만장자가 됐지만 때로 자신의 사업적 성공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지역신문 에 따르면 오닐은 “나는 좋아했던 많은 해변을 사람들로 북적이게 만든 혐의를 받는다”며 “사람들은 자신만 아는 파도를 갖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이로사 객원기자*‘떠난 사람’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 김여란·이로사씨와 글을 아껴주신 독자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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