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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전에 로큰롤은 없었다

로큰롤의 가능성과 방향을 정한 미국 흑인 가수 척 베리
등록 2017-03-29 15:07 수정 2020-05-02 19:28
DPA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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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에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아마 ‘척 베리’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비틀스 멤버 존 레넌은 척 베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척 베리가 없었으면 비틀스를 비롯해 비치보이스, 롤링스톤스, 밥 딜런, 엘비스 프레슬리 등 저명한 로큰롤 가수가 존재하지도 지금처럼 성공하지도 못했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라고 는 썼다.

로큰롤 초기, 그 가능성과 방향을 정했다고 추앙받는 미국 흑인 가수 척 베리가 지난 3월18일 자택에서 건강이 악화돼 별세했다. 향년 90.

늦었다면 늦은 28살, 베리는 단 한 곡의 노래 으로 하룻밤 만에 정상에 올랐다. 그전까지 베리는 고향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동네 클럽에서 기타 치며 노래하는 무명 밴드의 단원일 뿐이었다. CNN은 을 두고 “이전에 그런 것은 존재한 적 없다. 어떻게도 분류할 수 없는 곡이다. 그 곡은 흑인 음악가가 대부분인 리듬앤블루스(R&B)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 박자와 감성은 대개 백인 전통 컨트리 블루스와 웨스턴 스윙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고 평했다.

척 베리는 1926년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침례교 집사 아버지, 교장인 어머니의 여섯 번째 아이였다. 그가 처음 사람들 앞에서 공연한 것은 15살 때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였다.

1996년 으로 차트 1위

평생 베리를 따라다닌 범죄와 수감 생활은 19살에 시작됐다. 1945년 베리는 캔자스시티 상점 세 곳에서 강도 행각을 벌이고 운전사에게 총을 겨눠 차를 훔친 혐의로 기소됐다. 베리는 소년원에서 2년6개월을 보냈고 21번째 생일에 출소했다. 이후 수위, 목수, 자동차 공장 노동자로 전전했고 미용 분야 학위를 따 한동안 미용사로 일했다. 23살에 결혼해 아이 넷을 낳았다.

이때부터 베리는 지역의 블루스 트리오 그룹에 들어가 세인트루이스를 무대로 공연했다. 피아니스트 조니 존슨이 이끌던 트리오에 들어간 베리는 곧 그룹의 음악을 아예 바꾸어놓았다. 그는 흑인음악 블루스에 컨트리 뮤직을 더했다. 다종의 장르를 뒤섞은 베리 음악에 특유의 쇼맨십이 어우러진 공연은 흑인은 물론 백인들까지 사로잡았다.

베리는 재즈가수 냇 킹 콜의 정확한 발음을 숭배했고, 색소폰 연주자이자 가수인 루이스 조던의 위트와 스토리텔링에서 영감을 받았다. 콜과 조던 모두 주류, 즉 백인에게도 인기를 얻은 첫 흑인 뮤지션이다. 두 줄을 한 번에 당기면서 기타를 마구 휘두르는 기법 또한 베리가 시작했다. 이는 기타리스트 티본 워커를 본뜬 것이었는데, 베리 이후 이 주법은 로큰롤의 마스코트가 돼 롤링스톤스를 비롯한 숱한 뮤지션이 따라했다.

베리가 본격적으로 그의 영웅을 모방할 기회는 28살이 되던 해에 찾아왔다. 세인트루이스에서 베리의 공연을 본 시카고 블루스의 명인 머디 워터스와 음반사 사장 레너드 체스를 통해 베리는 음반을 내게 됐다. 베리의 곡 (Ida Red)에서 가능성을 본 체스는 음반 제안을 바로 수락했다. ‘메이블린’으로 이름을 바꾼 이 곡이 담긴 음반으로 베리의 로큰롤 시대가 열렸다.

베리는 이후 등 음악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는 히트곡을 연달아 쏟아냈다. 1958년 발표한 노래 은 미 항공우주국(NASA)이 1977년 쏘아올린 무인 우주선 보이저호에 실은 세계 대표 음악선 ‘골든 레코드’에 실리기도 했다.

‘한 세대를 위한 찬송가’

세상의 주목을 받고 곧 30대에 접어들었음에도 베리는 세상에 반항하는 10대의 리듬으로 기타를 치고 곡을 썼다. 미국 10대의 하루를 묘사한 곡 는 ‘한 세대를 위한 찬송가’로 일컬을 만큼 10대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춘기 청소년들은 그에게 열광하고 그를 공부했다. 사과할 줄 모르는 성격, 특유의 오리걸음으로 무대 위를 미끌어지면서 종을 치듯이 기타를 쳐대는 퍼포먼스는 베리를 ‘어른’의 분류에서 빼놓았다.

성공한 베리는 1957년 클럽과 식당을 세인트루이스에 열었다. 2년 뒤 그는 다른 주에 사는 14살 소녀를 데려와 클럽에 고용한 혐의로 체포됐다. 베리가 흑인이라 형이 과하다는 인종차별 논란이 일었으나 항소심에서도 유죄판결을 받았다. 베리가 감옥에서 20개월을 보내고 나온 1964년 부인은 그를 떠났다. 나중에 재결합했다.

이후 베리는 다시 이전 같은 창조적 재능을 보여주지 못했다. 주목할 만한 곡들은 당시 감옥에서 쓴 게 마지막이었다. 출소 후 베리는 공연을 계속했지만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평을 들었다. 미디어에 비칠 때는 말을 얼버무리거나 수수께끼 같은 모습으로 남았다. 그는 오로지 돈벌이에만 관심 있는 것처럼 굴었다.

베리는 그저 그렇게 잊힐 수도 있었다. 베리가 감옥에 있는 사이 음악 세계는 혁명적 변화를 겪었다. 베리는 대중의 눈에서 멀어졌지만, 비틀스로 대표되는 영국 신생 록밴드와 미국 록밴드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롤링스톤스와 비틀스는 베리의 곡 등을 각각 재해석해 내놓았다. 비치보이스는 베리의 곡을 리메이크했다가 저작권 문제로 베리에게 소송당하기도 했다.

머디 워터스는 1977년 영국 음악잡지 와의 인터뷰에서 비틀스, 롤링스톤스로 대표되는 ‘브리티시 인베이전’ 그룹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이처럼 설명했다. “비틀스는 척 베리를 많이 따라했고, 롤링스톤스는 나를 조금 따라했다. 그게 내 모국, 미국 사람들을 일깨웠다. 이전에는 부모가 아이에게 ‘니거(흑인을 낮춰 부르는 말) 음악을 집에서 틀지 말라’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말년까지 법정·교도소에

1980년대까지 베리는 록의 선구자로 여겨졌다. 예전 같지 못하더라도 그의 곡은 여전히 인기가 있었고 1979년에는 백악관에 초청받아 지미 카터 당시 미 대통령 앞에서 공연도 했다. 베리는 그래미 어워드에서 상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레코딩 아카데미는 1984년 공로상을 수여했다. 1986년 미국 클리블랜드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이 세워졌을 때 베리의 이름도 그곳에 올랐다.

말년까지도 베리는 법정과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1979년 베리는 탈세 혐의로 연방교도소에 갇혔고 4년간 보호관찰 됐다. 1990년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식당의 여자 화장실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한 혐의로 다시 법정에 섰다. 베리는 여성 59명에게 13억5천여만원을 지급하고서야 합의할 수 있었다.

김여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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