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창에 대한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애정은 각별하다고 알려져 있다. 5년에 한 번씩 수도 탈린에서 열리는 합창 페스티벌 ‘라울루피두’(Laulupidu)에는 전국 각지에서 10만 명이 모여든다. 많게는 2만여 명의 합창단이 노래하는 대규모 합창의 장관을 경험하기 위해서다. 1869년 시작된 이 거대한 축제는 200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됐다.
광장의 합창이 이끈 독립 혁명그런가 하면 1988년 소련을 상대로 벌인 에스토니아의 독립 혁명은 ‘노래 혁명’(Singing Revolution)으로도 불린다. 이들은 소련이 무너진 1991년까지 3년 동안 광장에서 함께 노래하며 비폭력 평화 시위를 벌였다. 특히 1989년 발트 3국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에스토니아 탈린부터 라트비아의 리가, 리투아니아의 빌뉴스까지 장장 640km에 이르는 ‘인간 사슬’을 만들어 서로의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부르며 자유와 독립을 외친 사건은 발트해 연안 민족이 함께 만들어낸 독특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이들은 주로 옛 성가 스타일의 합창곡을 불렀다. 벨요 토르미스가 대중화시킨 이러한 합창곡은 시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노래는 기독교 정신만큼이나 발트해 연안의 민족 정서에 강하게 남아 있는 범신론적인 힘, 숲의 주술적인 신비를 품고 있다.
벨요 토르미스는 뛰어난 현대 합창곡 작곡가다. ‘핀란드에 시벨리우스가 있다면, 에스토니아에는 토르미스가 있다’고 할 정도로 20세기 에스토니아 음악의 상징으로 꼽힌다. 그는 사라진 발트해 연안의 고대 민속음악을 되살려, ‘토르미스 스타일’의 합창 전통을 새롭게 만들었다. 주로 사라지고 있거나 이미 소멸한 어족의 민속음악과 서사시에 토대를 둔 합창곡이다. 총 500여 곡을 작곡했으며, 합창곡 외에 다양한 교향곡, 오페라를 비롯해 35편의 영화음악도 만들었다.
사라진 옛 발트해 연안 문화의 기억을 되살린 에스토니아의 작곡가 벨요 토르미스가 지난 1월 21일 탈린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6살.
20년짜리 작곡 프로젝트 앨범토르미스의 합창곡에는 그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악기 없이 목소리만으로 편성된 아카펠라 곡이 대부분인데, 옛 성가의 느낌에 고대 북유럽 신화를 떠올리게 하는 주술적 이미지가 결합되어 있다. 때때로 두려운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아름답다. 낯선 언어로 불려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음에도 직관적으로 마음을 움직인다. 은 그의 음악을 “서사적 환상, 시골 마을 일상의 소리나 새소리 같은 요소와의 결합, 그리고 과장된 연극적 어조” 등으로 묘사했다.
토르미스 음악의 특징은 에스토니아 민속음악에서 비롯한다. 주제뿐 아니라 화성적으로도 그렇다. 그의 합창곡 중 몇몇 곡은 사실상 에스토니아 민요를 현대적으로 편곡한 버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가사 역시 에스토니아와 발트해 연안 핀족 등의 오래된 시를 바탕으로 한 곡이 많으며, 에스토니아를 통치하던 소련을 비판하는 곡도 상당수다.
토르미스의 관심은 에스토니아와 같은 어족인 ‘핀·우그리아 어파’ 계열의 다른 민속음악으로도 확장되었다. 핀·우그리아 어파는 북유럽, 동유럽, 시베리아 서북부에 분포하는 우랄어족에 속한 어파로 에스토니아어를 포함해 핀란드어, 헝가리어 등이 있다.
그중에는 국가의 관심을 받지 못하며 사라져간 소수 언어들도 있다. 리보니아, 잉그리아, 벱스 등으로 언어뿐만 아니라 이 언어를 사용하던 이들의 음악과 의례 등 문화도 함께 사라져갔다. 토르미스는 이들의 민속음악을 비롯해 라트비아, 러시아, 불가리아 등의 민속음악에도 관심을 가졌다.
토르미스의 역작 중 하나는 1992년 발매한 앨범 (1970~1989)이다. 이 앨범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1970년 그가 20년짜리 작곡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이미 사라지는 중이거나 소멸한 민족의 민속음악을 토대로 한 작품이다. 더블 CD로 이뤄진 이 앨범에는 리보니아 걸프만에 거주하던 리보니아인, 탈린과 레닌그라드 사이 해안 지역 출신의 보트인, 이조리아인, 잉그리아인, 라도가 호수 동편의 벱스인, 레닌그라드 북쪽 핀란드 지역의 카렐리야인 등 위험에 빠진 발트해 연안의 고대인과 그들의 민속음악이 등장한다.
그는 서구 음악의 정해진 틀 안에 민속적 선율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에스토니아 민속음악의 구조 자체를 현대적인 작곡 안에 가져오려 했다. 이를 테면 ‘모방, 점진적인 평행 코드, 특정 모티브 주변의 단조로운 반복’ 같은 요소들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민속음악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민속음악이 나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의 곡 중 에스토니아 외 지역에서 가장 많이 연주하는 유명한 곡은 (Raua needmine/Curse Upon Iron·1972)일 것이다. 이 곡은 러시아 극동 해안 캄차카 반도 북부에 사는 민족 코랴크인의 주술적인 북소리가 끝없이 울리는 가운데, 웅얼거리다가 날카롭게 소리 지르기를 반복하는 기괴하고 아름다운 아카펠라로 채워져 있다. 철을 전쟁의 악마로 묘사하며 군대의 파괴적인 철의 사용을 맹렬히 비난한다.
‘사악한 철에 저주를!/ 악마여, 저주받은 철이여!/ 살을 파먹는 자, 뼈를 갉아먹는 자 (...) 너는 뿌리부터 적의의 냄새가 풍기고/ 악행으로부터 비롯했구나!’
민속음악 구조를 현대 작곡으로벨요 토르미스는 1930년 8월7일 에스토니아 쿠살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교회 오르간 연주자이자 음악 교사였다. 토르미스는 1942년 탈린 음악학교에 입학해 오르간과 합창 지휘를 공부했고, 1951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러시아 작곡가 비사리온 셰발린에게 작곡을 배웠다.
학업을 마친 후인 1958년 여름, 그는 에스토니아 키누 섬에 갔다가 숲에서 전통 혼례 모습을 보았다. 그는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발트 핀족의 고유한 노래와 퍼포먼스에 감흥을 받았고, 곧 민속음악 조사를 시작했다. 이후 그의 작곡 활동에 큰 영감을 주게 된다.
고국으로 돌아온 초기에는 교향곡, 오페라 등 주류 음악을 작곡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 민속음악이 정체성의 중요한 표현으로 여겨지고, 반공산주의운동의 은밀한 도구가 되면서 그는 점차 에스토니아 민속음악을 받아들였다.
토르미스의 음악은 1960년대 에스토니아뿐 아니라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해 연안 지역에 걸쳐 인기를 끌었다. 1975년까지 토르미스의 곡은 소련에서조차 널리 연주되었다. 몇몇 곡은 정치적으로 도발적인 가사여서 소련 정부로부터 금지처분을 당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민속음악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검열관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에스토니아가 독립을 쟁취한 후, 그의 작품은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다. 특히 에스토니아 필하모닉 챔버 합창단의 세계 투어 이후, 많은 나라에서 그의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컬 그룹 킹스 싱어스, 힐리어드 앙상블 등이 그의 음악을 연주했다. 1992년 ECM음반사에서 앨범 발매 이후 미국, 유럽 전역에 걸쳐 청중이 생겼다.
그는 후기에도 (1999), 핀란드의 민족서사시 에서 가사를 따온 합창곡 (The Singer‘s Closing Words) 등 역작을 내놨으며, 2000년 작곡을 그만두었다. 2010년에는 에스토니아 대통령으로부터 1등급 국가훈장을 받았다.
토르미스는 에스토니아 노래 혁명을 이야기할 때 언제나 앞자리에 언급되는 음악가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와의 인터뷰에서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이끄는 데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펑크록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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