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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의 전쟁과 평화

IRA 지휘관에서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주역으로 살다간 마틴 맥기니스
등록 2017-04-06 16:24 수정 2020-05-03 04:28
AP 연합뉴스

AP 연합뉴스

북아일랜드의 과격파 독립 무장조직 아일랜드공화국군(IRA) 지휘관이던 마틴 맥기니스 전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부총리가 3월21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66. 그는 1월19일 건강상의 이유로 부총리직을 사임했다. 외신들은 그가 희귀 유전 질환인 아밀로이드증을 앓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무기를 내려놓고 평화주의자로 전향한 전직 IRA 지휘관’으로 묘사되는 그는 북아일랜드 유혈 분쟁의 역사를 끝낸 평화협상의 주역이었다. 이력이 눈길을 끄는 건 ‘IRA’와 ‘평화주의’는 같은 자리에 놓기 힘든 단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IRA에 단지 ‘연루된’ 것이 아니라, 10대이던 1960년대 후반부터 IRA 활동에 투신해 27살에 IRA 최고위 지휘관을 지냈고 오랫동안 조직 핵심부에서 일한 거물이었다. 40대에 평화주의자이자 정치인으로 변신한 그는 IRA 무장해제를 중재하는 등 협상가를 자처하며 북아일랜드가 종파 간 대타협을 이뤄 영국에서 자치정부 지위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구교와 신교, ‘낄낄대는 형제들’

에 따르면, 앨버트 레이놀즈 전 아일랜드 총리는 맥기니스 없이는 자신의 임기 중 IRA의 휴전 선언은 없었을 것이며, ‘평화협상’은 지연되거나 결국 탈선해버렸을 거라고 말했다. 그 자신이 불법 무장조직에 가담했던 경력은 과격파 극단주의 그룹과 대등한 조건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자격증’이 되었고, 그들에게 전쟁은 누구도 승리할 수 없는 게임이란 점을 설득시킬 수 있었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1960년대부터 30여 년간 이어진 IRA와 영국 정부의 유혈 투쟁을 말한다. 700여 년간 영국 식민지이던 아일랜드는 1921년 독립했다. 이때 일부 북쪽 지역은 여전히 영국령으로 남았다. 영국령 북아일랜드에선 소수 가톨릭계(구교도) 주민에게 고용·주거·선거 등에서 심한 차별 정책을 취했다. 이에 신·구 교파 간 분쟁이 시작됐고, 1960년대 말 신교도와의 차별 철폐를 주장하며 가톨릭교도의 시민권 운동이 시작됐다. 이후 영국에서의 독립을 주장하는 구교 세력과 영국 연방 잔류를 요구하는 신교 세력 간 유혈 투쟁이 확대돼, 1972년 북아일랜드 런던데리에서 영국군이 가톨릭계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해 14명이 죽은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IRA 활동이 격화돼 폭탄공격·게릴라전이 잇따랐고, 1994년 IRA가 휴전을 선언할 때까지 25년 동안 영국, 아일랜드, 북아일랜드 등에서 3200여 명이 사망했다.

1998년 4월 타결된 평화협정 ‘성금요일 협정’(Good Friday Agreement)은 30년에 걸친 북아일랜드 유혈 분쟁을 끝낸 역사적 계기였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 아일랜드의 버티 어헌 총리, 신·구교의 여러 분파 대표들이 참석한 다자간 회담으로 이뤄진 협정 과정에 맥기니스는 북아일랜드 신페인당(Sinn Fein, IRA의 정치조직)의 협상 대표로 참여했다. 협정의 주된 내용은 각 정파의 대표들로 공동정부를 구성해 북아일랜드를 평화적으로 통치한다는 것이었다.

이 협정에 따라 북아일랜드는 지금도, 영국 잔류를 원하는 연방주의자(신교 세력)와 아일랜드공화국과의 통일을 원하는 민족주의자(구교 세력) 분파가 함께 공동정권을 꾸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맥기니스는 2007년부터 지난 1월 사임하기까지 10년 동안 자치정부의 부총리를 지냈다. 그가 10년간 공동정권을 이뤄 함께 일한 총리들은, IRA 시절 절대 나란히 설 것이라 상상할 수 없던 연방주의자, 민주연합당(DUP) 대표들이었다.

2007년 5월8일 그가 민주연합당 대표 이언 페이즐리와 공동정부를 구성했을 때, 한때 적이던 두 리더가 함께 취임선서를 하는 장면은 북아일랜드 국민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페이즐리는 개신교 신부 출신으로 1971년부터 민주연합당 대표를 지내며 가톨릭 진영과 IRA를 배척해온 극단적 친영파 정치인이었다. 이들은 함께 웃는 모습을 종종 언론에 드러냈고, 뜻밖에 ‘낄낄대는 형제들’(chuckle brothers)이란 별명을 얻었다.

맥기니스가 가진 또 하나의 상징적 이미지는 2012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처음 북아일랜드 벨파스트를 방문했을 때 환히 웃으며 그녀와 악수하는 모습이다. 그는 영국 국가원수와 악수한 첫 전직 IRA 리더였을 것이다. 은 “이런 모습은 맥기니스 자신이 세월이 흐르며 많이 변화했다는 사실뿐 아니라, 북아일랜드가 1968년의 런던데리 폭력 사태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는지 생생히 보여줬다”고 말했다.

정육점 점원에서 IRA 리더로

제임스 마틴 파첼리 맥기니스는 1950년 5월23일 북아일랜드 데리의 보그사이드 가톨릭교도 지역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주철공장에서 일했으며, 그의 부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기술학교에 진학했으나 15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정육점에서 일했다.

10대 시절 보그사이드에선 연일 폭동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시위를 가까이하지 않았지만 1969년 후일 ‘보그사이드 전투’로 알려진 대규모 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1970년쯤 공식적으로 IRA에 합류했다고 전해진다. 곧 급진주의자로 전향해 1972년 ‘피의 일요일’ 사건 때는 21살 나이로 런던데리 지역 IRA여단의 부지휘관이 되었다.

맥기니스는 1973년과 1974년 두 차례 투옥됐다. 폭발물과 탄약으로 가득 찬 차량을 소유했고, 불법적 IRA에 가입했다는 혐의였다. 그러나 2010년 공개된 ‘피의 일요일’ 재조사 보고서인 사빌 조사(Saville inquiry)는, 그가 무기를 소지했으나 그것이 사용됐다는 증거는 불충분하다고 밝혔다.

이후 1978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그는 IRA 최고지휘관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기간에 수백 명이 IRA 공격으로 사망했고, 1979년 영국 여왕의 사촌 마운트배튼 경 사망 사건을 비롯해 마거릿 대처 총리 및 내각 암살 시도로 알려진 1984년 브라이튼 호텔 폭발 사건 등이 일어났다.

언론은 그가 많은 IRA 공격에 연루돼 있다고 보도했으나, 그는 신페인당을 통한 정치에 집중하기 위해 1974년 IRA를 떠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2001년에야 공개적으로 자신이 IRA였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1983년 그의 오랜 동지 게리 애덤스가 신페인당 대표가 되면서(현 대표이기도 하다) 이들은 합헌적인 것과 폭력적인 정책을 이중 사용하는 ‘아말라이트 소총과 투표함’ 전략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1990년 초에는 호전성만으로 그들이 원하는 목적, 즉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아일랜드와의 통일을 이룰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IRA는 1994년 휴전을 선언했고, 1996년부터 이뤄진 대화는 1998년 평화협정으로 이어졌다.

맥기니스는 1999∼2002년 북아일랜드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1997년 영국 하원의원으로 당선돼 2001년, 2005년, 2010년 재선했다. 영국에 계속 항거한다는 뜻으로 ‘결석주의’를 주창하며 런던 의사당에는 나가지 않았다. 2011년 아일랜드 대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가 없는 평화는 가능할까

지난 1월 맥기니스는 ‘신재생에너지 정책’ 혈세 낭비 스캔들로 사임 위기에 처한 민주연합당 알린 포스터 공동정권 총리에게 독립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일시적으로 물러날 것을 요구했지만 거부됐다. 이후 그는 부총리직에서 사임했다. 공동정권이 무너지면서 3월 초 조기 총선이 치러졌고, 선거에서 신페인당은 다수당 민주연합당과 근소한 차이로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공동정권 출범 협상은 3월31일 현재까지 결렬된 상태다. 영국 중앙정부는 재선거 또는 과거 직접 통치로의 복귀 대신 협상 기간을 몇 주 연장하는 결정을 내렸다. 맥기니스가 떠난 뒤 북아일랜드 공동정권 내 갈등이 쉽게 해결될지는 미지수다.

맥기니스는 2007년 이언 페이즐리와 함께 공동정권을 출범하기 전날 이렇게 말했다. “종파주의를 약화시키는 데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정치적 신념을 가진 이들이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함께 일하는 것이다. 페이즐리와 내가 그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로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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