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깃발은 성소수자 운동의 상징이다. LGBTQ(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퀴어) 프라이드의 달 6월이 오면 세계 곳곳에 무지개 깃발이 나부낀다. 2015년 미국 대법원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면서 전세계 페이스북 사용자 2500만 명 이상이 프로필 사진을 무지개로 물들였다. 백악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나이아가라폭포도 무지개 조명을 밝혔다. 나아가 무지개 깃발은 성소수자 인권 관련 시위뿐 아니라 다양성과 평화를 지지하는 집회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세계적 상징이 됐다.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서로 연결돼 있다
미국의 성소수자 인권운동가이자 디자이너인 길버트 베이커는 약 40년 전 무지개 깃발을 처음 고안한 인물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무지개 깃발은 세상에 없었다.
1978년 그가 처음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상징할 깃발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이들의 국제적 상징은 ‘핑크 트라이앵글’뿐이었다. 핑크 트라이앵글은 분홍색 역삼각형 모양의 엠블럼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남성 동성애자에게 의무적으로 장착하도록 한 배지에서 비롯했다. 이들 중 다수가 수용소 내에서 조직적으로 학살됐다.
베이커는 이 상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강요된 것이었고 “학살과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장소와 히틀러로부터 온 것”()이었다.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는 아름다운 것, 우리 자신에게서 온 것을 필요로 했다”고 말했다.
이외에 일부에서 그리스 문자 ‘람다(λ)’가 사용됐지만 그 의미를 대중이 한번에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베이커는 ‘말’을 넘어 직관적으로 작동하는 상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무지개를 떠올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그 전까지 아무도 무지개를 깃발로 만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명백한 상징처럼 보였다.”()
무지개는 한눈에 성정체성, 젠더, 인종, 연령 등 모든 다양성을 표현할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색깔이 번갈아 덧대어진 형태는,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서로 연결돼 있다는 점을 나타냈다.
게이 프라이드의 국제적 상징인 무지개 깃발을 만든 미국의 인권활동가이자 깃발디자이너 길버트 베이커가 지난 3월31일 미국 뉴욕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5. 사인은 심장마비로 알려졌으며, 수년 전 뇌졸중이 왔지만 최근 거의 회복한 상태였다고 외신들은 보도했다.
베이커는 1951년 6월2일 미국 캔자스주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교사였고, 아버지는 변호사이자 판사였다. 그는 보수적인 캔자스에서 성정체성이 억압된 채 살았다. “가족이 나를 가두고 전기충격 같은 걸 줄까 겁이 났다.”() 베이커의 부모는 그가 게이라는 사실을 커밍아웃한 뒤 오랫동안 아들과 말을 하지 않았다.
베이커는 대학을 다닐 때 미군에 징집돼 베트남전에서 의무병으로 근무했다. 군 말년엔 샌프란시스코의 베트남전 상이군인들을 돌보는 병원에 배치됐다. 그는 자신이 “스크리밍 퀸”(screaming queen·한번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게이)이었으며 군대에서 동료 병사와 상관들로부터 수많은 불쾌한 경험을 겪었다고 했다. 그는 1972년 전역한 뒤에도 계속 샌프란시스코에 남았다.
1978년 ‘게이 프리덤 퍼레이드’에서 첫선샌프란시스코는 당시 시민권·여성인권·성소수자 운동의 중심지였으며, 히피와 비트족이 모여드는 진보적인 문화의 도시였다. 베이커는 고향 캔자스와 군대의 억압된 문화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살기 원했다. 그는 ‘버스티 로스’라는 이름의 드래그퀸(여성성을 강조한 분장을 하는 게이)이 됐다. 재봉틀을 구입해 화려한 드래그퀸 복장을 스스로 만들어 입었다. 그의 이런 재능은 곧 시위에 활용됐다. 친구들은 그에게 시위에 필요한 각종 배너와 사인 등을 제작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시위를 위한 배너가 필요할 때 부르는 사람이 됐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에서 그것이 내 역할이었다. 나는 ‘내가 만든 수공예품이 곧 나의 행동(운동)’이라고 말하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2008)
이즈음 베이커는 하비 밀크를 만났다. 하비 밀크는 1977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에 당선돼 게이로선 미국 최초로 선출직 공직자가 된 인물이다. 밀크는 동성애자 권리 조례를 제정하는 등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열성적으로 투신했다. 그는 성소수자가 단지 피해자로 치부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돼서는 안 되며 이들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밀크를 비롯한 친구들은 베이커에게 이런 생각을 담을 수 있는 성소수자 운동을 대표할 상징을 디자인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은 깃발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말하자면 하나의 민족이자 부족이었다. 깃발은 하나의 세력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었기에 아주 적절했다.”(2015년 뉴욕현대미술관(MoMA)과의 인터뷰) 여기에 다양성의 상징이 될 만한 ‘무지개’를 추가했다. 자연을 사랑하던 베이커는 무지개가 다름 아닌 하늘에 걸린 것, 자연적 상징이란 사실에 의미를 뒀다.
최초의 무지개 깃발은 베이커와 30여 명의 자원봉사자팀이 함께 만들었다. 이들은 성소수자 커뮤니티센터의 다락방을 작업공간으로 삼아, 휴지통에 염료를 붓고 천을 담가 각 색깔의 배너를 만들었다. 염색된 천은 빨래방으로 가져가 세탁기로 헹궈냈고, 다시 다락방으로 가져와 서로 연결해 꿰매고 다렸다. 그렇게 약 914×1800cm 크기의 첫 무지개 깃발이 완성됐다.
처음 깃발은 지금과 달리 여덟 색깔이었다. 분홍은 성적 취향, 빨강은 생명, 주황은 치유, 노랑은 햇빛, 초록은 자연, 청록은 예술, 남색은 화합, 보라는 정신을 의미했다. 그러나 곧 수요가 급증해 대량생산을 해야 했고, 당시 분홍색 천은 대량으로 구하기 힘들었을뿐더러 가격도 비쌌다. 그는 분홍색을 빼고, 청록색과 남색을 합쳐 파란색으로 대체한 여섯 색깔 무지개 깃발을 제작했다. 이것이 현재까지 널리 사용되는 버전이다.
“무지개 깃발은 사용하는 이들 모두의 것”최초의 무지개 깃발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78년 6월25일 샌프란시스코 게이 프리덤 퍼레이드에서였다. 깃발은 샌프란시스코 유엔 플라자에 걸렸다. 베이커는 에 “나는 하비 밀크가 거대한 무지개 깃발 아래 군중에게 손을 흔들며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리라는 꿈에 부풀었으나 불과 몇 달 뒤 비극을 맞았다. 같은 해 11월27일 하비 밀크와 당시 샌프란시스코 시장 조지 모스코니가 열렬한 반동성애 보수 당원인 시의원 댄 화이트의 저격으로 사망한 것이다. 이후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와 에이즈마저 광범한 피해를 일으키면서 미국 내 성소수자 인권운동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무지개 깃발 역시 투쟁의 시간을 거쳤다. 1989년 캘리포니아 웨스트할리우드의 존 스토우트라는 남자는 아파트 발코니에 무지개 깃발을 거는 것을 집주인이 금지하자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베이커는 1980년대 중국, 프랑스 등 세계 지도자들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깃발과 배너를 디자인하는 일을 했다. 1984년엔 민주당 전당대회와 슈퍼볼 게임의 배너를 디자인했다. 동시에 성소수자 집회와 행사의 연사로, 성소수자 인권 관련 강연자로 불려다녔다. 1994년 뉴욕으로 이주한 뒤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불을 붙인 스톤월 항쟁 25주년을 기념하는 약 1.6km 길이의 초대형 무지개 깃발을 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지개 깃발은 더 널리 받아들여졌다. 상업적으로도 활용돼 신용카드·운동화 등 수많은 디자인에 사용됐고, 기업들의 이미지 세탁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베이커는 처음부터 디자인 상표 등록을 거부했기 때문에 어떤 이득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무지개 깃발은 사용하는 이들 모두의 것”이며 “단지 하나의 깃발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베이커는 무지개 깃발 탄생 39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39장의 아홉 색깔 깃발을 제작했다. 원래 버전인 여덟 색깔에 ‘다양성’을 상징하는 라벤더색을 추가했다. 그는 2008년 ‘밀크’의 삶이 전기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영화에 등장하는 1970년대 버전의 무지개 깃발을 제작했다. 뉴욕현대미술관은 2015년 6월 베이커의 무지개 깃발을 디자인 컬렉션으로 소장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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