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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의 성차별을 멈추다

미국 플로리다의 첫 번째 여성주의자 록시 볼턴
등록 2017-06-15 14:03 수정 2020-05-03 04:28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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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럴, 다이앤, 재닛….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해군들은 태평양에서 발생하는 열대 태풍에 그리운 아내나 애인의 이름을 붙였다. 이 관습을 따라 미국 정부 일기예보관들도 1953년부터 공식적으로 태풍을 여자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태풍에 최초로 이름을 붙인 사람은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 기상대에서 일하던 클레멘트 래기다. 1900년대 초 래기는 폭우가 발생하면 정치인이나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의 이름을 붙여 기상예보를 했다. 그가 붙인 이름은 아마 대부분 남자였을 것이다.

미국 일기예보관들이 태풍을 여자 이름으로 부르면서 태풍 자체가 여성처럼 의인화됐다. 성차별적 관념이 적용됐다. 태풍은 예측할 수 없다, 신경질적이다, 섬이나 해안선에 추파를 던진다 하는 식으로 말이다. 미국 태풍합동경보센터가 정한 태풍 이름이 세계적으로 통용됐으니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2000년부터 미국과 한국을 포함해 태풍의 영향을 많이 받는 아시아·태평양권 14개 나라가 태풍위원회를 만들어, 각국이 제출한 이름을 번갈아가며 써왔다. 보통 동식물, 자연물 이름이 쓰였다.

플로리다주 록시 볼턴은 태풍에 여자 이름을 붙이는 것에 처음 분노를 표출한 여성이었다. 그는 “(여성이) 임의로 재난과 연결되는 게 굉장히 억울하다”고 했다. 마침 허리케인 센터는 볼턴이 살던 플로리다주 데이드카운티에 있었다. 볼턴의 공격이 시작됐다. 1968년부터 그는 미국해양대기관리처에 허리케인 이름 붙이는 법을 바꾸라고 항의하면서 여러 대안을 내놓았다.

허(her)리케인 말고 ‘힘(him)이케인’으로 하자

첫째, 허리케인(hurricanes)을 ‘힘이케인’(him-icanes)으로 부르자. 허리케인에서 여성(her)과 발음이 비슷한 접두어 대신 남성(him)을 넣어 만든 조어였다. 공무원들은 볼턴의 익살스러운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둘째, 회의에서 장광설을 늘어놓는 후원자들의 이름을 따서 부르자. 셋째, “상원의원들은 뭔가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걸 굉장히 좋아하니까” 국회의원 이름을 태풍에 붙이자. 당시 의회에 여성은 한 명뿐이었다.

볼턴의 제안은 다 무시당했다. 그러나 태풍 이름 논쟁은 이어졌다. 남녀 모두 민감하게 반응했다. 여성들은 태풍에 여자 이름이 붙는 것을 모욕으로 여겼다. 별 생각 없는 남자들이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한다는 거였다. 이를 ‘찻잔 속 태풍’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위협적’이라고 보는 이도 많았다.

10여 년 만인 1979년 볼턴과 여성주의자들이 이겼다. 1979년 발생한 두 번째 태풍에 남자 이름 ‘밥’(Bob)을 붙였다. 일기예보관들이 굴복한 것이다. 이후 여자와 남자 이름을 번갈아 붙이기로 했다. 허리케인 센터는 이런 변화를 발표하면서 볼턴, 그리고 퍼트리샤 버틀러, 도러시 예이츠 등 여성주의자들 때문이라고 밝혔다.

태풍에 여성 이름만 붙이는 관습이 사라지고 8년이 지난 1986년까지 는 회의적이었다. “어떻게 해도 많은 남자 이름들은 (태풍의) 분방한 성질이나 위급 상황을 전달하지 못한다.”

볼턴의 운동은 실제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 2014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에 실린 한 연구는 여성 이름을 단 태풍일 때 더 많은 사람이 죽거나 피해를 봤다고 분석했다. 이 연구는 사람들이 여자 이름이 붙은 태풍을 덜 심각하게 여긴다고 결론 내렸다. 남자 이름을 딴 태풍은 강하고 폭력적으로 보여서 더 주의하게 된다는 거다.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을 수면 위로

태풍 이름을 바꿔낸 볼턴은 플로리다의 첫 번째 여성주의자였다. 1926년 보수적인 남부에서 태어나 여성운동을 하며 조롱을 받으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마이애미의 백화점들은 식당에 ‘남성 전용’ 좌석을 운영했다. 은행은 남편이나 아버지가 없는 여성에게 대출을 해주지 않고 신용카드도 만들어주지 않았다. “남녀는 함께 자는데, 왜 같이 먹지 못하나요?” 볼턴이 주도한 끈질긴 운동으로 이는 폐지됐다. 그는 자신의 결혼 서약식에서 남편에게 ‘복종하겠다’는 부분도 빼버렸다.

1974년 볼턴은 성폭력 피해자 치유센터를 미국 최초로 설립했다. 그는 처음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지원을 요구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볼턴이 살던 코럴게이블스의 전 시장 재닛 슬렌스닉은 <cbs> 인터뷰에서 말했다. “1970년대 남자들은 성폭력치유센터 같은 것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성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여겼고, 성폭력 피해자는 동정받지도 못했다. 볼턴은 이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잭슨기념병원에 만들어진 성폭력치유센터 명칭은 1993년 볼턴의 이름을 따서 바뀌었다. 생후 2주부터 98살까지, 수천 명의 성폭력 피해자가 이곳에서 치료받았다. 볼턴은 1972년 가정폭력 피해 여성을 위한 쉼터도 처음 플로리다에 만들었다.
볼턴은 ‘핏불’(공격성이 강해 통제가 어려운 견종)로 불렸다. 1971년 볼턴은 ‘플레이보이’ 호텔 클럽으로부터 우편 한 통을 받았다. 볼턴이 플로리다 지부를 만든 전미여성기구 모임을 위해 공간을 제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그의 답장은 이랬다. “당신들의 엄청난 뻔뻔함이 내 인내력의 한계를 넘었다.” 플레이보이의 마스코트 ‘바니걸’은 볼턴에게 여성 착취로만 보일 뿐이었다. “당신이 엉덩이 뒤에 토끼 꼬리를 붙이고 걸어다니면 어떨 것 같은가?”
1972년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여성평등의 날’을 선포한 것도 볼턴 덕택이었다. 같은 해 볼턴이 상원의원 버치 바이를 설득해 미국 모든 주에서 성차별을 금지하는 양성평등 헌법수정안이 발의됐다. “남녀의 동등한 권리가 합중국이나 주에 의해 거부되거나 제한되지 않는다”는 게 수정안 내용이었다. 볼턴의 두 번째 남편 데이비드 볼턴이 양성평등 헌법수정안 통과 운동의 남성 대표를 맡았다.
‘인형’의 업적
공화주의자들의 여성 지도자 격이던 필리스 슐래플리는 반대운동을 격렬하게 펼쳤다. 슐래플리는 페미니즘이 동성애와 낙태를 조장하고 여성에게 열등감을 일으켜 미국 사회와 가정을 파탄시킨다고 주장했다. 법안 통과를 위해서는 미국 전체 52개 주 중 비준에 필요한 38개 주의 동의가 필요했다. 최종 기한인 1982년까지 35개 주만 동의해 헌법수정안은 결국 통과되지 못했다.
1960년대 에 칼럼을 쓰던 남성들은 볼턴과 여성운동가들을 ‘인형’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일이 ‘우스운 생각’이라고 썼다. 2017년 5월17일 91살로 별세한 볼턴의 부고 기사는 그 신문 1면에 실렸다. 전 생애에 걸친 업적을 다루기 위해 기자 3명이 투입됐다.
김여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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