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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속 도서관을 살려내다

이집트 ‘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프로젝트 앞장선 역사학자 모스타파 엘아바디
등록 2017-03-25 20:30 수정 2020-05-03 04:28
www.amwague.com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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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책들이 있는 도서관’에 대한 상상은 유서 깊다.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 속 도서관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뿐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책까지 모두 보유하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에도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이 가득 차 있는 미로 같은 신비로운 도서관이 등장한다.

고대에 이런 꿈의 도서관이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300년께부터 기원후 30년께까지 존재한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다. 전설이 된 이 도서관은 전세계 문화유산을 종합적으로 수집하려던 최초의 도서관이다. 인류 지식의 보고로서 르네상스 시대에 비견될 만한 학문과 문화의 발전을 이끌어냈으나, 이미 2천 년도 더 전에 파괴돼 더 이상 실존하지 않는다.

2002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선 고대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의 현대적 버전을 표방한 ‘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Bibliotheca Alexandrina)이 개관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재건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30년 만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프로젝트 뒤에는 한 이집트 역사학자가 있었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이집트 역사를 연구한 역사학자 모스타파 엘아바디(Mostafa El-Abbadi)다. 그는 1972년 처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재건을 제안했고, 이후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완공하기까지 수십 년간 많은 역할을 했다. 이집트의 사회참여적 지식인이자, 알렉산드리아대학의 고전학 교수로 재직한 모스타파 엘아바디가 지난 2월13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8.

1972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재건 제안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재건 프로젝트는 1972년 아바디가 알렉산드리아대학에서 했던 한 강연에서 시작됐다. 그는 이 강연에서 “새로 건립된 알렉산드리아대학에 도서관이 없다는 건 슬픈 일”이라며 “고대의 전통을 정신적으로 이어받는다는 우리의 주장을 정당화하려면, 세계적인 도서관 설립을 시작해 고대의 본보기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캐나다 일간지 , 2005). 그의 아이디어는 도서관 재건 계획의 씨앗을 뿌렸다.

2년 뒤인 1974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이집트를 방문하면서 씨앗은 발아했다. 닉슨은 당시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엘사다트와 함께 알렉산드리아 고대 유적지를 돌아보며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보고 싶다고 했다. 이미 사라져버린 도서관을 방문하고 싶다고 한 것은 실수였지만, 이 일은 프로젝트가 실제 진행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아바디는 이 일로 이집트인들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이 신화적 도서관에 공명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프로젝트 진행을 위해 위원회가 꾸려졌지만 여전히 불가능한 꿈이었다. 아바디는 군사, 정치적 사안에 경도된 이집트 정부가 단독으로 이 프로젝트를 맡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1984년까지 계획은 부침을 거듭했다. 아바디는 대학의 후원을 이끌어내고 알렉산드리아시와 이집트 정부를 설득했으며, 수많은 국제 콘퍼런스에 참여했다.

본격적으로 계획에 착수한 건 1986년 유네스코의 지원이 성사되면서다. 원래 고대 도서관이 있던 곳의 부근 지중해 해안가가 부지로 결정됐고, 업적성 사업으로 이 프로젝트를 전폭 지지한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1988년 주춧돌을 놓았다. 1990년 이집트 아스완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도서관 건립 기금이 조성됐다. 1995년 공사가 시작돼 마침내 2002년 11층 건물에 책 800만여 권을 보관할 수 있는 서고와 열람실, 박물관 4개, 갤러리 19개, 콘퍼런스룸, 천체투영관 등으로 이뤄진 2만400여m²(약 6100평) 규모의 거대한 원통형 복합 컴플렉스, 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완공됐다. 총비용은 2억2천만달러가 소요됐다.

2002년 10월16일 도서관이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지만, 아바디는 개관식에 초대받지 못했다. 어떤 이집트 신문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는 2002년 개관식 풍경을 담은 기사에서 “이 도서관에 진정한 영감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한 남자는 초대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행사장에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요르단·스페인·스웨덴의 여왕들을 비롯해 각국 장관들과 대사 등이 참석했다. 아바디가 배제된 이유는, 이집트 정부가 진행한 프로젝트 과정에 그가 비판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됐다.

개관식에 초대받지 못한 이유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바디의 애초 제안은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계승하자는 것이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최초로 국경에 상관없이 당시 모든 서적을 수집해 세계의 지식을 취합했다. 도서관을 건립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리아에 다양한 문화를 도입하고 각지의 학자를 초빙해, 그곳을 학문과 문화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입항하는 선박이 가진 책은 모두 가져와 필사한 뒤, 사본을 돌려주고 원본을 도서관에 보관했다. 그렇게 이곳에는 전세계에서 온 책 50만 권 이상이 있었다. 그중에는 소포클레스·아이스킬로스·에우리피데스의 희곡 원본, 고대 페니키아의 서적, 인도산 불교 서적, 70인역 성서 등 귀중한 문서들이 있었다.

아바디에게 이 도서관은 인류 문명의 복잡성을 인식하게 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국가의 한계에 갇힌 것이 아닌, 서로 다른 지역·언어·종교·전통의 지식이 교차하는 세계적 개념의 지식이 출현했다”고 말했다().

이곳은 고대 세계 지식의 보고일 뿐 아니라 연구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서적 수집 외에, ‘무세이온’이란 기관을 두어 국제 학자들에게 학문 연구 환경을 제공했다. 이곳에서 유클리드·에라토스테네스·헤로필로스 등 많은 고대 학자들이 자신의 새로운 정리를 만들어냈고, 도서관은 수학·천문학·물리학·자연과학 등에서 많은 새로운 연구 결과를 보유했다.

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이 정신을 계승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바디는 2002년 에 이 도서관은 “세계적 수준의 연구센터”라기보다 단지 “문화센터”에 머물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도서관의 장서는 부족했고, 도서 수집을 위한 자금에도 한계가 있었다. 또한 그는 이곳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의 궁전이 자리했던 부지임에도 건설 과정에서 적절한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아바디는 근처 자신의 아파트 발코니에서, 공사장 불도저가 유물들을 파내 바다로 던져버리는 장면을 녹화해 공개했다.

“문화는 언제나 연합한다”

모스타파 압델 하미드 엘아바디는 1928년 10월10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942년 알렉산드리아대학의 문화예술대학을 설립했으며 첫 학장을 지냈다. 아바디는 1951년 알렉산드리아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해 1960년 고대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 박사과정을 마치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뒤엔 알렉산드리아대학에서 고전학을 가르쳤다. 1970년대 이집트 대부분의 고대사가들이 파라오 시대를 연구할 때, 아바디는 그리스·로마 시대에 천착한 희귀한 역사학자였다.

그의 책 은 1990년 유네스코에 의해 출판돼 5개 언어로 번역됐고, 지속적으로 학자들 사이에 회자됐다. 그 밖에 지은 책으로 (1993), (2008) 등이 있다.

그는 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2005년 와의 인터뷰에서 “이라크 바그다드의 도서관, 박물관, 기록물에 대한 미국의 파괴 행위는 ‘범죄’”라면서도 “문화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 연합해야 한다. 그것들은 언제나 그래왔다”고 밝혔다.

이로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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