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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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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창조자가 아니라 파괴자”

권력을 조롱한 급진 예술가 구스타프 메츠거
등록 2017-03-14 13:02 수정 2020-05-02 19:28

쭈글쭈글한 종이와 부서진 상자로 가득 찬 비닐가방이 미술관에 놓여 있었다. 청소부는 이 쓰레기를 집어다 분쇄기에 넣어버렸다. 2004년 영국 런던 테이트 미술관에서였다. 쓰레기로 오해받은 설치작품을 만들어낸 작가는 독일 출신 예술가 구스타프 메츠거(Gustav Metzger)다.
1961년에도 그는 런던 사우스뱅크 거리에서 구멍난 넝마를 선보이는 퍼포먼스를 했다. 메츠거는 먼저 길거리에 큰 나일론 천으로 천막을 쳤다. 이에 그림을 그리거나 치장하는 대신 메츠거는 방독면을 끼고 염산을 천에 들이부었다. 천이 녹아 구멍이 난 자리를 통해 성당이 보였다. 파괴를 통해 새로운 시야를 열어젖히는 게 그의 의도였다.
쓰레기로 오해받은 작품

위키피디아

위키피디아

메츠거는 이 퍼포먼스와 관련해 “염산을 쏟을 때 나는 매우 공격적이었다. (…) 자본주의 구조를 공격하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전쟁과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을 비난하고 상징적으로 파괴하고 싶은 마음을 피할 수 없었다”고 했다(2009년 메츠거가 자신의 회고전을 기획한 서펜타인 미술관장 줄리아 페이턴존스에게 한 말).

메츠거는 자본주의 시스템과 예술의 상업화, 전쟁과 핵, 그 외 모든 조직된 권력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예술가였다. 나치에게 부모를 잃은 유대인이자 10대 때 홀몸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메츠거에게 미학은 언제나 정치 바로 곁에 있었다. 그는 반핵 운동가이자 환경주의자이기도 했다. 평생 급진적 예술운동을 이어온 메츠거가 지난 3월1일 런던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90.

메츠거는 1926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이었다. 나치 지배 국가에 있는 유대인 어린이들을 구출하는 ‘아동 수송 작전’에 의해 메츠거 형제는 1939년 영국으로 보내졌지만 부모와 큰형, 많은 친척들은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12살에 독일을 떠난 메츠거는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영국 전역을 떠돌았다. 그의 유년기는 비극이었지만 독창적인 예술 세계의 밑거름이 됐다. 메츠거는 생전에 “나치와 나치 정부의 힘을 직면했던 경험이 나를 예술가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영국의 리즈에서 메츠거는 가구 제작을 배워 공장에서 일했다. 이 시기에 메츠거는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의 혁명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이후엔 자연 치유 이론 등 다양한 이상론들의 영향을 받았다. 19살에 자연 치유 클리닉에서 잠깐 정원사로 일하면서 채식주의자가 돼 평생 채식을 했다. 한동안 무정부주의자 코뮌에서 지낸 메츠거는 이미 10대에 무정부주의 혁명가로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진심이었다. 총살형이라든지 순교하는 일에 대해서도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1999년 영국의 유력 예술잡지 (Art Monthly) 인터뷰에서 말했다.

1945년 메츠거는 케임브리지 예술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급진적 행동에 나선 메츠거는 핵무기의 제조와 사용을 반대하는 집회에 참가했다가 체포됐다. 그 뒤로도 숱한 집회에 참가했다.

‘자동 파괴적 예술’ 이론 주창

런던 보로 종합과학대학에서 화가 데이비드 봄베르그의 수업을 들으며 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 메츠거는 그를 만나면서 예술이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고 이용하는지 관심을 갖게 됐다. 메츠거는 화가로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조각가가 되고 싶어 했다. 현실의 부조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방법으로 좀더 파괴적인 형태를 원했다. “구스타프는, 예술가는 창조자이기보다 파괴자라고, 예술가의 역할은 세상에 뭔가를 더하는 게 아니라 더 적게 만드는 것이라고 언제나 주장했다.” 런던 서펜타인 미술관 큐레이터인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는 에 보낸 추모글에서 이같이 밝혔다.

1959년 메츠거는 자신의 예술 세계에 ‘자동파괴적 예술’(auto-destructive art)이란 이름을 붙여 이론으로 만들었다. 그는 “파괴로서 집착을 재현하는 미술, 지배당하는 개인과 대중을 마구 때리는 일”이라고 이를 정의했다. 메츠거는 자신의 작품이 ‘터무니없는 현재’에 대한 기념비가 되기 바랐다. 2012년 인터뷰에선 “‘자동파괴적 예술’은 절대 파괴적이지 않다. 캔버스를 파괴하라, 그러면 새로운 모양이 나타난다”고, 인터뷰에선 “나는 파괴하지 않는다. 나는 현재의 혼돈을 넘어서는 아이디어를 창조한다”고 말했다.

‘자동파괴적 예술’은 나치의 폭력은 물론 연합군 쪽의 패권주의도 비판했다. 메츠거는 “나치가 행진할 때, 나는 기계 같은 사람들과 나치 정부의 권력을 봤다. (…) ‘자동파괴적 예술’은 권력을 거부하는 일이다”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연합군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한 것, 이어진 냉전 상황을 이용해 시민들의 공포를 조장하는 정부의 정책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반핵단체에서 활동한 메츠거는 좀더 직접적인 행동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단체 ‘100인 위원회’를 설립했다. 1961년 메츠거는 이와 관련해 기소됐고 감옥에 갇혔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도 함께였다. 메츠거는 보석을 거부하고 단체에 속한 회원 30명에게 비폭력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을 지속하도록 독려했다. 그는 법정에서 말했다.

“나는 12살 때 독일을 떠나 이 나라에 왔다. 내 부모는 1943년에 사라졌고 아마 나도 그들과 운명을 같이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언제나 사람들이 말살될 수 있었던 부헨발트(나치 강제수용소로 25만 명이 수감됐고 최소 5만여 명이 이곳에서 사망)보다 훨씬 더 야만적이다. 내가 살아갈 권리를 주장하는 것, 그것 외에 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투쟁하기를, 완전한 비폭력의 원칙을 택했다.”

메츠거는 1966년 ‘파괴 예술 심포지엄’(Destruction in Art Symposium)을 주최했다. 오노 요코 등 10개국에서 아방가르드 예술가 50여 명이 모였고 과학자, 철학자, 정신분석가도 참여했다. 사회와 과학, 예술 속의 파괴에 대한 문제를 이론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이었다. 사흘간 이어진 심포지엄은 사건의 객관적 이미지를 거부하고 사건이 사회·정치적 힘에 다양한 방식으로 관련되는 데 초점을 두고 진행됐다.

“상업화된 예술 시스템을 멈추자”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메츠거는 상업적 예술 세계를 곧잘 비판했다. 1977~80년에는 이와 관련해 ‘예술 없는 날들’(The Years Without Art)을 기획했다. 그 4년간 메츠거는 어떤 종류의 예술 작품이나 활동도 하지 않았고 전시와 작품 판매도 중단했다. 상업화된 예술 시스템을 멈추자고 예술가들에게 촉구했지만 참여한 이는 메츠거 혼자였다. “인류는 무언가를 창조하려는 욕구를 타고났다. (…) 현재의 상업적 체계가 사라지면 예술도 사라질 거라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김여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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