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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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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고생과 유람 사이

블라디보스토크역을 떠난 지 12일 만에 모스크바 도착, 컵라면과 군용 비빔밥으로 끼니 때우고 우랄산맥 감상하며 맥주 마시고
등록 2016-01-06 19:22 수정 2020-05-03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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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창에 걸린 커튼을 통과한 햇살이 산란을 일으키며 얼굴을 간질이는 통에 눈을 떴다. 침대 옆 테이블에는 아시아에서의 마지막 밤을 불태우게 했던 빈 맥주병들이 공 맞은 볼링 핀처럼 일부는 서 있고 몇 개는 누워 있었다. 집을 떠나온 지 11일째 아침, 마음속에 불편함이 살짝 깔렸다. 원인은 귀국 선물이었다. 우리 일행이 개고생하는 것과 무관하게 한국에 있는 지인들은 세월 좋게 유람을 즐긴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모두 하늘같이 지엄한 안주인들이 있는 터. 20여 일의 여행 기간 끝에 레닌 배지 몇 개를 던져놓는다면 무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침 일찍 트램을 타고 시내로 나가 방문한 곳은 시청사 맞은편에 있는 쇼핑센터. 예카테린부르크를 잊지 않을 수 있는 물건을 고르기 위해 상점들을 뒤졌다. 내가 산 것은 돌 같은 느낌이지만 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안경 쓴 고양이가 소파에 누워 책을 읽는 모양의 조각이다. 제법 근사한 선물을 샀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전된 차, 2차선 막아도 여유만만

오전을 쇼핑으로 보낸 우리 일행은 호텔로 돌아와 택시를 불렀다. 호텔 앞은 2차선 도로였는데 차 두 대가 보닛을 열고 점프선을 연결하고 있었다. 차선 하나를 멀쩡히 차지한 차의 배터리가 방전된 것이다. 보닛을 밀착시킨 두 차량 뒤로 차들이 길게 늘어섰다. 두 차의 기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점프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죽은 차를 살리기 위해 애썼는데 행동은 여유만만했다. 한국 같으면 벌써 자동차 경적이 울리고 운전자 몇몇은 내려서 헤매는 두 사람을 거들거나 욕을 할 상황이었지만 러시아 운전자들은 얌전하게 차 안에 그대로 있었다.

열차 시간을 놓치면 안 되는 우리는 사태가 어서 해결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드디어 방전된 차에 시동이 걸리고 길게 늘어선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앞에 나타난 택시기사는 점프선으로 고장 난 차를 구원해준 이였다.

공식 택시가 일반화되지 않은 러시아에서 어느 차가 콜택시인지 알 수 없었기에 우리는 과연 누가 호텔 앞에서 짐을 가득 든 우리에게 다가오는지 살펴야 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넉넉한 시간을 두고 택시를 부른 게 다행이었다. 대신 점심은 예카테린부르크역 앞 맥도널드에서 해결해야 했다. 내가 주문한 빅맥은 서울역에서도 종종 먹었던 것으로 오랜만에 경험하는 낯익은 고향의 맛이었다.

예카테린부르크역 오전 11시24분발 모스크바행 67열차는 이미 승강장에 도착해 있었다. 모든 열차시각은 모스크바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모스크바와의 시차가 3시간 나는 예카테린부르크의 현지 시간은 오후 2시24분이다. 러시아에서 열차를 이용할 때는 승차권에 인쇄된 시간이 모스크바 기준시간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잠깐 착각으로 열차를 놓치거나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가 있다.

맞은편 승강장에는 초호화 시베리아 횡단열차 골든이글익스프레스호가 서 있었다. 칸마다 개별 응접실과 더블침대, 전용 샤워부스가 딸린 객차로 나와 같은 여행자들에게는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귀족들이 화려한 장식의 커튼 너머로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을 뒤로하고 평민들은 분수에 맞는 열차에 올랐다.

이제 시베리아 횡단은 마지막 구간인 모스크바까지 29시간의 여정만 남았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모스크바까지는 이용객이 많아 우리 일행은 서로 떨어진 자리를 예약할 수밖에 없었다. 가능하면 내가 탈 6인 구역에 미녀들이 차지하길 바라며 침대 번호를 확인하며 자리를 찾았다. 하늘이 감동했는지 할머니 두 분이 온화한 미소로 반겨주었다.

철길 건널목을 건널 수 없는 이유
블라디보스토크역을 떠난 지 12일 만에 모스크바의 야로슬랍스키역에 도착했다. 9288km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본선을 모두 주파한 것이다. 종착역에 들어서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모습.

블라디보스토크역을 떠난 지 12일 만에 모스크바의 야로슬랍스키역에 도착했다. 9288km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본선을 모두 주파한 것이다. 종착역에 들어서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모습.

2층 침대 위에 짐을 부리고 개구쟁이 표정을 짓고 있는 맞은편 침대의 꼬마 소녀에게 윙크를 했다. 열차는 잠깐 움찔하더니 천천히 풍경을 뒤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늘 그렇듯 차장이 침구세트를 가져다주었고 다시 열차 안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열차 안 생활이 몸에 익어 객실 승무원으로 일해도 손색없을 정도가 되었기에 할머니 두 분의 매트리스에 시트를 장착해드렸다. 두 할머니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능숙한 솜씨로 침대를 정리하는 모습에 만족스런 얼굴로 감사 인사를 했다.

휴대전화의 안테나 표시가 줄어든 것으로 열차가 시내를 벗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언덕이나 나무가 선로에 가까이 붙어 있었다. 산을 오르는 게 분명했다. 우랄산맥이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들어가는 숭고한 순간 하필이면 배가 아팠다. 얼른 화장실로 달려가 마음과 몸속을 비우며 엄숙한 마음으로 경계를 넘었다. 산맥을 넘은 열차는 산등성이의 작은 마을 몇 개를 지나쳐 제법 큰 도시의 모습을 갖춘 곳을 지났다.

이런 도시들을 지나게 되면 자연히 철길은 도로를 가로막고 달리는 일이 많다. 이럴 때 만나는 것이 철도 건널목이다. 철도가 다니는 곳이라면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인데 러시아의 철도 건널목은 색다른 점이 있다.

열차가 접근해오면 차량이나 사람이 철길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차단기가 내려온다. 하지만 차단기가 내려와도 차들은 기차가 보이지 않거나 설혹 보이더라도 멀리 있다고 판단해 건널목을 급히 통과하다 사고 나는 일이 적지 않다. 러시아에서는 이러한 건널목 사고가 완벽히 방지된다. 철길 건널목에는 차단기뿐만 아니라 도로 바닥에서 철판이 올라와 군부대 정문의 바리케이드처럼 차량 진입을 막는다.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이긴 한데 그만큼 많은 사고의 대가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우리 일행의 밤 미션은 식당칸에서의 만찬이었다. 횡단 내내 누룽지를 곁들인 컵라면과 군용 전투식량 비빔밥이 열차 안 식사였다. 눈 딱 감고 돈 걱정 없이 한 끼를 먹기로 했는데 그것이 시베리아 횡단의 최종 구간인 이날 밤이었다. 식당칸은 예상한 대로 손님이 없었다. 우리 일행을 포함해 3개의 테이블에만 손님이 앉아 있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여유로운 여행자의 자세로 메뉴판을 받았으나 곧바로 스마트폰의 통·번역 애플리케이션(앱)을 작동하는 수선을 떨어야 했다. 메뉴판의 러시아어를 사진 찍어 번역기로 돌렸다. 쇠고기인지 돼지고기인지 닭고기인지 알 수 있는 것만으로도 흥분했다.

열차 안에서 주류 판매는 금지되어 있지만 식당칸만큼은 예외다. 편한 테이블에 앉아 우랄산맥 서쪽 언저리의 경치를 감상하며 맥주를 곁들인 식사를 하는 것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자라면 한번쯤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날 3명의 여행자는 그동안 먹은 것 중 가장 많은 식사비용인 3588루블(약 7만5천원)을 계산했다.

우랄산맥 기슭에서 단잠에 빠졌다가 유럽에서의 첫 아침을 맞았다. 날렵한 고릴라처럼 이층침대에서 내려와 1층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래층 할머니 두 분은 이미 화장까지 마친 고운 얼굴로 나의 인사를 받았다. 할머니들은 어서 아침을 먹으라고 챙겨주셨다. 할머니들의 눈빛과 손짓이 섞인 러시아어 어감만으로도 충분히 뜻을 알아듣는 게 신기했다.

눈빛과 손짓으로 나누는 이야기
열차에서 만나 우정을 쌓은 알렉셰나 할머니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할머니는 모스크바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얻은 여성의 연락처였다.

열차에서 만나 우정을 쌓은 알렉셰나 할머니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할머니는 모스크바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얻은 여성의 연락처였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한·러 민간 친선 화합대회가 열렸다. 통역으로는 모스크바에서 대학을 다니는 청년이 동원됐다. 할머니 두 분, 6살 꼬마와 여행하는 젊은 엄마, 두 명의 남자 대학생, 옆 구역에서 넘어온 40대 아저씨가 나를 중앙에 놓고 1층 침대에 옹기종기 걸터앉았다.

서로의 가방에서 꺼내온 먹을거리들로 간단한 다과가 준비됐다. 러시아어-영어-러시아어로 중계되는 이야기에 모두들 토끼처럼 귀를 쫑긋하며 눈을 반짝였다. 직업, 나이, 가족관계, 여행 목적 등 기초조사가 진행됐다. 이어서 한국의 열차여행 환경, 내가 가진 카메라 가격, 휴대전화의 한 달 요금이 어느 정도인지도 밝혔다. 이어서 모두가 자신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가족사진을 돌려보며 서로 멋지고 예쁘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할머니 한 분은 이름이 고르바트바 알라 알렉셰나였는데 약간 낡긴 했지만 한눈에 봐도 품격이 흐르는 사진첩을 꺼내 보여주었다. 사진첩 안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예뻤던 할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과 그녀의 아들, 손녀들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혹시 영화배우를 했냐는 나의 질문에 할머니는 유쾌한 미소를 얼굴 가득 보여주었다.

대화가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만은 아니다. 달리는 기차 소음과 나의 빈약한 영어 듣기 실력이 더해져 황당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코리아 템플”이란 소리를 듣고는 ‘아니 이 사람들이 어떻게 템플 스테이를 알지?’ 궁금해하면서 매우 매력적인 프로그램이고 값도 비싸지 않다고 설명했다. 대학생 통역의 어이없는 표정과 그것을 전해들은 러시아 친구들의 황당한 얼굴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휴대전화 메모장을 내밀어 코리아 다음 단어를 적어달라고 했다. 대학생이 찍어준 말은 온도를 뜻하는 ‘템퍼러처’(Temperature)였다.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겨울은 러시아보다 훨씬 덜 춥고 여름은 그 반대라고 설명했다.

모스크바로 향하는 시간 동안 한·러 민간 친선 모임은 모이기와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우정을 쌓았다. 알렉셰나 할머니는 내 노트에 모스크바 집 주소와 전화번호 두 개를 적어주었다.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얻은 여성의 연락처였다. 정이 뚝뚝 묻어나는 알렉셰나 할머니는 시간 나면 언제든지 방문하라고 당부했다.

6월30일 오후 5시, 블라디보스토크역을 떠난 지 12일 만에 모스크바의 야로슬랍스키역에 도착했다. 9288km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본선을 모두 주파한 것이다. 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별명만큼 복잡한 심정으로 승강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모스크바는 수십 개의 수식어를 붙여도 모자란 도시다. 하나의 사상이 시대를 관통했고 절대권력이 바벨탑처럼 솟구치다 무너졌다. 예술의 도시이자 혁명의 도시이고 철의 장막에 가려진 비밀의 땅이었던 곳, 눈물을 믿지 않는 모스크바의 하늘은 잔뜩 흐렸다.

열차가 도착한 승강장에는 여행을 마친 승객과 마중 나온 가족이 뒤섞여 북적였다. 우리 일행은 일단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승강장 끝의 카페테리아에 가서 커피와 기름에 튀긴 납작한 러시아 빵을 사먹었다. 식당 입구에서는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진 알렉셰나 할머니가 마중 나온 가족을 데리고 와 인사를 시켰다. 아는 사람이 없는 모스크바에서 누군가가 정겹게 팔을 잡아끄는 경험을 하는 것은 열차여행이 주는 선물이었다.

길을 잃으면 지하철역을 찾아라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갔다. 모든 일정 중 가장 비싼 값으로 예약한 호텔이다. 시베리아 횡단을 마친 뒤에 묵는 숙소여서 최대한 편안하게 쉬기로 계획했기에 돈을 좀더 들이는 것을 감수했다. 도착한 곳은 로비에 기념품점과 바(Bar)까지 갖춘 진짜 호텔이었다. 머리맡에 은은한 스탠드가 켜지는 침대에 높이뛰기 선수처럼 등으로 다이빙을 한번 했다가 일어나 시내를 탐험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호텔 바로 앞의 트램 종점에서 막 출발하는 차에 올라탔다. 30여 분을 달리다가 점점 시 외곽으로 빠지는 느낌이 들어 트램에서 내렸다. 이제 도시를 헤매는 일은 익숙해져서 지나가는 행인을 물색했다. 우리가 지도에서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모스크바 시내에서 길을 잃었을 때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하철역을 찾는 것이다. 모스크바의 땅 밑을 거미줄처럼 이어주는 지하철은 편리하고 안전하고 빠른 철도의 장점을 여지없이 증명해주는 교과서 같은 존재다. 길을 물은 끝에 한참을 걸은 뒤 지하철역을 발견하니 안심이 되었다.

지하철 요금은 50루블(약 1100원)로 방문한 도시 중 가장 비싼 대중교통 요금이었다. 5회권을 구입하면 70루블이 싼 180루블(약 3940원)이므로 시내를 돌아다니는 여행자라면 고민할 필요 없이 승차권 묶음을 구입하면 된다.

지하철을 타고 알렉산드롭스키사드역에 내렸다. ‘알렉산더의 정원’이란 뜻이다.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제국을 세웠던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더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것은 러시아의 뿌리가 고대 그리스로부터 이어지는 유럽이었다는 것을 은근하게 드러낸다.

알렉산더의 정원을 나오면 붉은색의 크렘린궁이 보인다. 크렘린은 러시아어로 ‘성채’라는 뜻이다. 요새로 만들어진 성채는 해자로 둘러싸여 섬과 같은 모양으로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또 길게 이어진 성벽 앞에는 모스크바강이 천혜의 방벽 역할을 해주었다.

16세기 후반 이후 타타르인의 침략에 대비해 정교하게 보강해온 크렘린을 공격한 것은 타타르인이 아니라 나폴레옹이었다. 1812년, 불가능을 믿지 않았던 프랑스 황제는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의 심장부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자존심이 강한 러시아인들은 모스크바에 불을 질렀다. 성난 불길은 모스크바의 3분의 2를 집어삼켰다. 크렘린을 제외하고 시의 대부분이 잿더미가 되었다.

모스크바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크렘린을 바라보았다. 각도를 낮춘 태양빛이 크렘린의 붉은 벽돌을 더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크렘린은 모스크바를 생성하고 유지시키는 엔진이다. 크렘린을 둘러싼 도시의 모든 것은 나폴레옹이 물러간 뒤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난 것들이었다.

내 발 옆에 누군가의 등이 보였다

발길을 돌려 호텔 근처 무슬림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번화가였음에도 음식 값은 저렴했다. 사람들이 바글거려 맛집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러시아와는 다른 분위기가 물씬 풍긴 탓에 이슬람 디아스포라들의 만남의 장소라는 것을 알았다.

조명이 어두운 식당의 구석진 곳에 자리잡고 메뉴판을 보다가 무심코 옆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발 옆에 누군가의 등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앉은 자리 바로 옆은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장소였다. 기도를 마친 사람이 사라진 바닥에는 숱한 무슬림의 무릎으로 인해 무늬가 희미해진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글·사진 박흥수 기관사·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 객원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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