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첫째날 아침, 모스크바의 출근길 인파에 섞여 지하철을 탔다. 세계 지하철 경연대회 같은 게 있다면 모스크바 지하철은 아마 대상을 받지 않았을까? 역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이다.
지하철이 모스크바의 지하를 거미줄로 연결해나가는 과정에서 크렘린의 지도자들이 고민했던 것은 서방의 공격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영국 런던 지하철이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했던 것을 알았기에 지하철은 수도를 보호하는 전략적 시설이었다. 냉전은 핵전쟁의 공포를 안고 있었다. 공산주의의 심장부를 보호하려면 깊은 땅속으로 철길을 내야 했다. 자연스럽게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 체제를 상징하는 미술 작품과 조형물이 들어서 시민들이 건강한 사회주의적 의식을 고양할 수 있도록 배려 혹은 강요했다.
8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모스크바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적응력이 필요하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에스컬레이터에 탑승하려면 점프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한다. 무사히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뒤엔 깊게 내려가는 길이에 놀라게 된다.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외부인을 구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하염없이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손잡이를 부여잡고 화려한 역사의 모습에 감탄하는 사람들은 이 도시에 방문한 이방인들이다.
점프력이 필요한 모스크바 지하철푸시킨 박물관과 아르바트 거리의 빅토르 최 추모 벽을 들른 뒤 붉은광장의 지하철 출구로 나왔다. 전세계 관광객들이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한때 비밀의 장막을 덮어쓴 사회주의의 심장부였던 거리를 활보했다.
광장 입구인 두 개의 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론 크렘린이 있고 그 앞쪽에 조성된 무덤을 볼 수 있다. 혁명의 아버지 레닌의 무덤이다. 이젠 빛바랜 관광객 유치용 장치로 기능하지만 이곳은 사회주의 혁명의 영원성을 기리는 성지였다. 레닌의 후계자들은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그랬듯 불멸의 전사가 혁명을 지켜주길 바라며 죽은 레닌의 몸에 방부제를 듬뿍 발랐다. 썩지 않는 혁명가의 얼굴은 유리관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다.
광장 끝에는 모스크바강을 뒤에 둔 바실리 성당이 서 있다. 게임 화면으로 낯익은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블록처럼 흩어져 있었다. 나는 주소가 적힌 메모와 지도를 번갈아 확인해가며 붉은광장에서 뻗어나가는 거리 하나를 찾았다. 레닌거리 17번지. 크렘린 맞은편 굼백화점 입구를 지나쳐 길게 나 있는 거리가 레닌스카야, 즉 레닌거리였다. 13번지, 15번지, 건물 벽에 붙은 숫자를 따라가는 나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드디어 17이라는 지번이 붙은 석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 건물은 1922년 1월 원동민족대회가 열렸던 곳이다.
식민지 약소민족의 해방을 염원하는 여러 나라의 독립투사들이 모였다. 원래의 대회 명칭은 ‘원동피압박민족대회’였으나 대회에 참가한 일본인들은 비록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지만 피압박 민족이 아니란 이유로 조정됐다. 이 대회에 가장 많은 사람이 참가한 나라는 조선이었다. 본대회는 크렘린궁에서 열렸다. 의결권을 가진 각국 대표 144명 중 한인이 56명으로 가장 많았고 중국 42명, 일본 16명, 몽골 14명, 부랴트 3명, 인도 2명 등이 대표로 참가했다.
독립투사들은 해방의 열정을 안고 모스크바로의 장거리 행로를 마다하지 않았다. 김규식, 여운형, 이동휘, 조봉암, 김단야, 홍범도, 그 이름만으로도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는 조선 독립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거인들이 모였던 거리에 섰다.
조선 독립 거인들이 모인 17번지한인 독립투사들은 크렘린의 환대를 받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총칼에 억눌려 비탄에 빠진 조선 땅을 이역만리에 둔 한인 독립투사들은 러시아와 중국, 만주 각지에서 모여든 서로의 손을 잡고 감격의 만남을 가졌다. 모스크바가 지원하는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갈등도 있었지만 조선 독립이라는 소명을 가슴에 안은 사람들이었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가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은 1921년 12월이었다. 홍범도가 도착하자 먼저 모스크바에 와 있던 이동휘가 홍범도가 묵고 있던 여관을 찾았다. 두 독립운동가는 2년 만에 낯선 타향 땅에서 손목을 맞잡고 쌓아두었던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원동민족대회 기간 중의 어느 날이었다. 홍범도가 묵고 있는 여관에 소비에트의 군관이 한인 통역을 데리고 찾아왔다. 군관은 고려혁명군 대장 자격으로 원동민족대회에 참가한 홍범도에게 예를 갖춘 뒤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홍범도 대장! 홍 장군님을 만나고 싶어 하시는 분이 밖에서 기다립니다. 같이 가주셨으면 합니다.”
홍범도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여관을 나서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차량에 올라탔다. 홍범도를 반갑게 맞이한 사람은 러시아혁명의 탁월한 전략 전술가 트로츠키였다. 민족대회장 청중석에서 트로츠키의 격정적 연설을 본 적이 있던 홍범도는 레닌과 버금가는 혁명가가 자신을 찾은 것에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적백 내전 시기 무장 장갑열차를 동원해 혁명의 야전사령관 임무를 수행한 트로츠키는 ‘무장한 예언자’란 별명으로 혁명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 건설의 주역이었다.
트로츠키는 놀라는 홍범도를 안심시키며 말을 이었다. “홍 장군! 내가 장군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안 또 다른 분이 함께 보자고 하시는군요. 같이 가시지요.” 홍범도가 트로츠키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방에는 레닌이 기다리고 있었다. 홍범도가 들어오자 레닌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홍범도 동지! 당신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갑습니다.” 레닌과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의 두 거두와 단독 만남을 가진 사람은 민족대회 참가자 중 한인으로는 홍범도가 유일하다.
남북한에서 외면당한 혁명가레닌은 홍범도가 항일투쟁 전선에서 러시아와 함께 공동으로 일본에 대항해 혁혁한 전과를 세운 것을 치하했다. 회동이 끝날 무렵 레닌은 미리 준비해둔 선물을 홍범도에게 전달했다. 고려혁명군 대장으로서의 격에 어울리는 군모와 군복, 레닌과 홍범도 장군의 이니셜이 새겨진 권총, 금화 100루블이 러시아와 조선의 혁명가가 맞잡은 손을 타고 전해졌다. 홍범도가 러시아 공산당원으로 가입한 것은 1927년이다. 식민지 해방과 인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각오를 가진 홍범도였다.
공산주의 사상은 고향을 떠나 풍찬노숙을 일삼으며 투쟁한 한인 혁명가를 인도하는 별이었다. 홍범도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입금되는 원고료로 마이너스 통장을 메꾸는 데 급급한 나 같은 소심한 사람에 비하면 홍범도의 삶은 거대하기만 하다. 홍범도는 레닌에게 받은 돈을 몽땅 한인 농민들을 위한 농업협동조합 사업 기금으로 보탰다. 타향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는 한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적 자립이었다. 땅과 농업은 한인들의 생존 기반을 튼튼히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또 협동조합의 구조를 갖춰 누구나 평등하게 노동과 사업의 결정에 참여하게 했다. 지주가 소작농을 착취하는 반인간적 구조를 벗어나겠다는 홍범도의 신념이 묻어났다. 안타까운 것은 홍범도 같은 독립운동의 거인이 남과 북 어디에서도 조명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 공산당원이자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던 홍범도는 독립운동에서 빛나는 역할을 했더라도 반공이 철추를 내린 남한에서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다. 북한에서도 절대존엄 김일성의 항일투쟁만을 앞세우다보니 홍범도와 같은 이들은 독립운동의 잔가지에 불과했다. 민족의 태양이 이끈 독립운동이 여러 독립투쟁 중의 하나여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우상이 덮어버린 남과 북에서 이성과 진실은 오래도록 어둡고 깊은 그림자에 덮였다.
레닌스카야 17번지를 뒤로하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다시 붉은광장 쪽으로 걸었다. 광장 입구에서 스탈린이 웃으며 다가왔다. 곧이어 친애하는 레닌 동지도 나타났다. 우리는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기념촬영을 마친 뒤 소비에트의 현황과 전망을 물으려 했는데 스탈린이 400루블을 요구했다. 나는 정색하며 너무 비싸다고 손사래를 쳤다. 스탈린은 자기가 다 먹는 게 아니라 레닌과 ‘반띵’을 해야 하는 것이므로 비싼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흥정 끝에 150루블로 낙찰을 봤다.
인사를 나누고 막 헤어지려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선글라스를 낀 푸틴이 뛰어와 한발 늦었다며 아쉬워했다. 미안하지만 푸틴과는 촬영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겐 무리한 러시아어 구사였다. 그새 레닌과 스탈린은 다른 관광객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에는 없는 모스크바역저녁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기 위해 다시 기차역 대합실 의자에 지친 몸을 기댔다. 일행이 도착한 역의 이름은 레닌그라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바로 레닌그라드다. 도시는 혁명 이전의 이름으로 되돌아갔지만 역의 이름은 아직 남아 있다.
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역이 없다. 신기하게도 모스크바에서 도착하는 지역의 이름을 땄다. 이를테면 서울역에서 순천을 가기 위해 열차를 탄다면 서울에 있는 순천역을 찾아가야 하는 원리다. 레닌이 1917년 혁명의 한가운데로 가기 위해 망명지인 스위스를 출발해 독일과 스웨덴, 핀란드를 거쳐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곳은 핀란드역이었다. 과거에 왜 레닌이 혁명이 물결쳤던 러시아가 아니라 핀란드에 내렸을까 의혹을 가졌던 것도 이런 연유였다. 핀란드역은 페테르부르크에서 핀란드를 오가는 열차의 종착역이다.
모스크바에 있는 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역에서 밤 9시27분에 출발하는 206열차의 승차권에는 역 이름이 ‘붉은 10월 역’으로 적혀 있었다. 승차권은 더 깊숙이 옛 혁명의 시간을 담고 있다. 러시아에서 붉음은 아름다움과 같은 말이다. 많은 이들에게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은 붉은 혁명이자 아름다운 혁명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인위적 덧칠에 쉽게 추해지기도 한다.
밤새 달려갈 열차에 올랐다. 백야로 오랫동안 빛을 내던 태양이 조금씩 물러서는 탓에 창밖은 노을에 물들고 있었다. 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나의 여정은 어떤 여인과 똑같았다. 그녀도 이 시간 즈음에 모스크바에서 열차를 타고 달려 새벽녘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모스크바역의 승강장에 발을 내렸다.
쇳덩어리 야수에 뛰어든 안나톨스토이 소설의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는 무도회에서 우연히 만나 춤을 춘 청년 장교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죄책감과 혼란한 마음속에 바로 다음날 남편이 있는 페테르부르크로 가기 위해 급히 모스크바를 떠나던 안나는 객차에 오르기 전 자신이 그토록 지우고자 했던 청년이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남자 역시 안나에게 마음을 빼앗겨 뒤쫓아온 무도회의 그 사람 브론스키 백작이었다. “저는 당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 당신의 몸짓 하나하나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브론스키의 고백에 안나는 소리쳤다. “그만! 그만하세요!” 둘은 멀리 떨어져 앉았지만 밤새 달리는 열차에서 끝없는 생각의 미로에 갇혀 허우적거렸다. 는 남녀의 파국적 불륜을 다룬 러시아판 ‘사랑과 전쟁’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통속의 덫을 깨버리고 전세계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고전이 된 것은 소설 속에 19세기 러시아 사람들의 삶을 고스란히 녹여냈기 때문이리라. 톨스토이는 당시 러시아의 현실을 안나 카레니나의 또 다른 주인공 콘스탄친 레빈의 형 니콜라이 레빈의 입을 빌려 말한다. “자본가들이 그 모든 이윤과 잉여를 그들에게서 빼앗아가지. 노동자와 농민이 더 많은 노동을 할수록, 성인과 지주만 부유해지고 노동자와 농민은 늘 노동하는 가축이 되고 마는 그런 사회가 만들어졌어. 이제 이런 질서를 바꾸어야 해.”
안나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운명을 던진 곳은 기차 바퀴 밑이었다. 거대한 쇳덩어리 야수가 굉음을 내며 달리는 모습을 쳐다보던 안나는 화물열차의 첫 번째 칸을 놓치고 두 번째 칸의 양쪽 바퀴 사이 공간으로 뛰어들었다. 톨스토이와 안나를 생각하다 얼핏 침대에서 선잠을 잔 듯했는데 열차는 어느새 종착역에 도착해 있었다. 새벽 5시23분이었으나 그새 태양은 짧은 밤을 몰아냈다.
승강장을 걸어 역사 안으로 들어온 우리는 지독한 피로에 눌려 있었다. 전날 모스크바를 하루 종일 걸은데다 야간열차에서 잠을 설친 터라 아무 데나 눕고 싶었다. 만장일치로 오전 일정을 취소하기로 하고 러시아 철도청이 운영하는 역사 안의 게스트하우스를 찾았다. 그러나 이미 먼저 온 여행자들로 빈방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원래의 일정을 강행하기로 했다. 보라색 노선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스타라야제레브나역으로 갔다. 이곳에서 다시 101번 버스를 타고 40여 분 달려 종점에 내리면 페테르부르크의 입구 핀란드만 한가운데 떠 있는 섬 크론슈타트다.
붉은 군대가 짓밟은 것은출렁이는 바다를 보며 섬을 연결하는 긴 다리를 건너면 작고 아름다운 섬이 나타난다. 버스 종점에서 내려 5분 정도를 걸으면 이 섬의 랜드마크인 네오비잔틴 양식의 성 니콜라스 해군성당 쪽으로 이어진 숲길이 나타난다. 숲길 옆으로 운하가 흐르고 건너편엔 공장으로 쓰였던 붉은 벽돌 건물이 늘어서 있다. 이 공장은 ‘19세기엔 내가 최고였지!’라고 말하듯 과거의 운치를 간직하고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속 비행기 제작 공장 같은 느낌을 주는 건물과 숲길과 거리들은 마치 시간여행을 온 듯한 설렘으로 여행자의 심장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이 섬은 페테르부르크와 러시아의 영광이자 혁명과 배신의 상처로 얼룩진 땅이다. 1921년 3월 트로츠키의 명령을 받은 볼셰비키 군대는 얼어붙은 핀란드만 위로 진격했다. 군대는 반혁명 세력의 사주를 받아 반란에 나섰다는 크론슈타트의 수병과 노동자들을 진압했다. 붉은 군대가 짓밟은 사람들은 적이었을까 동지였을까? 마침 도착한 성당에서 종소리가 청아하게 공기를 갈랐다.
글·사진 박흥수 기관사·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 객원연구위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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