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횡단열차 안에서의 음주는 금지돼 있다. 열차 내에서 맥주조차 팔지 않는다. 하지만 승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술을 구해다 마셨다. 가끔씩 올라타는 철도 경찰이 차내 승객들의 음주를 단속하고 술병을 빼앗아가기도 했다. 운이 나쁜 초보 여행자들이거나 이미 만취해서 단속반원들에 대한 경계를 느슨히 한 승객들이 술을 빼앗겼다.
횡단열차 안의 승객들은 하룻밤을 지내는 정도의 여정은 기본이다. 시베리아 벌판에 노을이 지고 차내의 조명 때문에 창밖의 풍경과 열차 안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 시작하면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저절로 술 한잔 생각이 나게 마련이다. 선로변에 작은 마을이나 외로운 집 한 채가 보여도 한잔 털어넣게 되고 도무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을 것 같은 끝없이 펼쳐진 벌판을 봐도 술잔을 채우게 된다.
“노 보다?” “야, 보드카!”나의 일행은 고향에 두고 온 식구들을 위해 건배하고 슬픔에 젖은 안산을 생각하며 잔을 꺾었다. 이렇게 달리다보면 술은 금방 떨어지고 곧 시간표를 들어 다음 정차역을 확인한다. 열차가 정차하고 기관차를 교체하거나 객차 정비를 하는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승객들은 우르르 승강장으로 내려간다. 상당수는 흡연을 위해서고 또 한 무리는 역사나 승강장에 있는 매점으로 가 먹을 것을 산다.
노보시비르스크역을 떠나면서 마셨던 술이 바닥난 뒤 살짝 아쉬웠던 나는 수시간 만에 도착한 첫 번째 정차역 승강장에서 매점으로 달려갔다. 머리에 보자기를 둘러쓴 할머니가 내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나는 “보드카” “노 보다”라고 조용히 속삭였다. 러시아 말로 물은 ‘보다’다. 할머니는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주위를 한번 쓰윽 둘러보고는 내가 한 말을 거꾸로 되물었다. “노 보다?” “보드카?”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야, 보드카!”라고 대답했다.
할머니는 매점 안쪽 창고 같은 곳으로 가서 보드카를 꺼내 검은 비닐봉지에 싸주었다. 콜라 한 캔과 보드카 한 병을 390루블(약 6500원)에 샀다. 할머니는 보드카를 내주며 오른손 검지를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표정만으로도 “걸리지 말고 잘 먹어라, 짜샤!”라는 의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깊은 바지 주머니 덕에 표 안 나게 차내로 술을 반입할 수 있었다. 열차가 출발하자 2차 술자리가 시작됐다. 40도의 독한 술이었지만 취객들은 달게 마셨다. 기분 좋게 침대 위에 뻗을 수 있었다.
시베리아횡단열차의 대표적인 승객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남자들이다. 이들은 현역 군인이거나 입영을 앞두고 고향을 떠나는 청년이다. 아직 솜털이 가시지 않은 앳된 눈의 청춘들에게 횡단열차는 가슴 아린 이별의 공간이다. 밤새 달린 열차가 햇살이 화사한 아침에 내려놓은 정차역 승강장에는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엉켜 있었다. 배웅 나온 가족과 일일이 포옹하고 연인과 아쉬운 작별의 키스를 나누는 짧은 머리 청년들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열차에 오른 젊은이들은 자리를 정리하는 일도 팽개치고 창가에 붙었다. 청년들은 밖에서 객차의 창을 어루만지는 가족이나 연인들의 손과 자신의 손을 합치시켰다. 열차가 서서히 움직이자 승강장의 가족과 연인들이 눈물을 훔치며 쫓아왔고 객차 안의 젊은이는 입술을 깨물며 손을 흔들었다. 붉게 충혈된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김광석의 노래 가 저절로 떠올랐다.
러시아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군대 내 폭력 사건이 심심치 않게 터지고 있다. 위계질서에 의한 강압이 자행되는 폐쇄된 공간에서 징집병의 운명이 고단한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두들 군 생활을 마치는 날까지 무사하기를 바랐다.
이날 오후 3시, 예카테린부르크역 승강장에는 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모여 흥겨운 표정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청량리역이나 성북역에서 경춘선 열차를 타고 MT를 떠나던 한국의 대학생들 모습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공부하고 놀러 가고 군대 가는 러시아와 한국의 젊은이들은 닮은꼴이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예카테린부르크역을 나와 택시 승강장으로 갔다. 나이 지긋한 기사 아저씨에게 서울에서 인쇄해온 목적지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택시 기사는 목적지에 들렀다가 호텔까지 이동하는 조건으로 3천루블(약 6만5천원)을 불렀다. 막 흥정하려는 찰나에 일행 중 한 명이 피곤한데 그냥 가자며 3천루블 오케이를 외쳤다. 오랜 열차여행에 지친 나머지 택시비를 깎기 위한 실랑이를 포기했다. 택시의 뒤 트렁크에 배낭들을 채워넣고 여유로운 관광객의 자세로 운전석 옆에 앉았다.
태양에 그을린 자리가 엉덩이를 가열시켰지만 택시가 속도를 높이자 차창 안으로 바람이 들어와 더운 공기를 내몰았다. 택시 기사는 흥정 없이 선뜻 차를 탄 이방인들에게 선심 쓰듯 자신이 달리는 동안 시내 안내를 해주겠다며 창밖으로 나타나는 거리나 건물들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나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우리는 어색한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을 맞추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택시는 얼마 안 가 시 외곽으로 빠지는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직선으로 뻗은 도로 위에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이 어우러져 있고 가끔씩 나타나는 키릴문자 광고판은 이국적 느낌을 물씬 풍겼다. 시내를 벗어나 30여 분 정도 달린 택시가 멈춰 섰다. 택시 기사는 시동을 끄고는 운전석 의자를 눕히고 휴식 모드로 들어갔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곳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서쪽으로 약 17km 떨어진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비가 있는 곳이었다.
지구란 행성에 애초에 경계란 없었다. 오직 인간만이 선을 긋고 구역의 이름을 정했다. 유럽과 아시아를 어디서 나눌 것인가는 서구 지리학계의 오래된 논쟁거리였다. 러시아 역사학의 거두로 칭송받는 바실리 타티셰프는 18세기에 우랄산맥∼우랄강∼카스피해∼흑해∼터키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잇는 선을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라고 주장했다. 타티셰프가 설정한 경계는 지금도 그대로 인정받고 있다. 우랄산맥 아래 동쪽으로 내려와 처음 만나는 시베리아의 도시 예카테린부르크에 그 경계석이 있는 이유다.
1829년 독일인 알렉산더 훔볼트와 로즈는 예카테린부르크와 모스크바를 잇는 길이 나 있는 이곳에 타티셰프의 뜻을 받들듯 말뚝을 하나 박고 유럽과 아시아가 나뉜다는 표식을 세웠다. 1920년 원래의 경계 표지가 파괴돼 다시 만들어졌는데 몇 번의 재건을 거쳐 지금의 콘크리트 기초 위에 화강암을 덧대고 철제 오벨리스크를 세운 모양으로 서 있다.
판문점의 남과 북 경계선처럼 땅바닥에 선을 그어놓고는 한쪽은 아시아, 다른 한쪽은 유럽으로 규정했다. 나는 양발을 벌려 아시아와 유럽 대륙에 한 발씩 걸쳐놓거나 수도 없이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넘어가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리스인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러시아가 아시아인과 유럽인이 반반씩 사는 나라라고 했다. 그 반반의 물리적 상징점에서 유라시아라는 거대한 땅덩어리의 기운을 느끼기 위한 예식을 거행했다. 한 무리의 러시아와 유럽 관광객들이 동양에서 온 여행자들을 환영했다. 우리는 각각 아시아와 유럽으로 나뉜 땅 위에 서서 경계선을 넘겨 손을 맞잡고 세계 평화를 기원했다.
축제의 기운, 피의 성당시내로 돌아와 택시 기사가 데려다준 호텔에 짐을 풀었다. 깨끗한 비즈니스호텔의 상큼한 침대 시트 냄새를 뒤로하고 카메라만 든 채 큰길로 나섰다. 예카테린부르크의 주력 대중교통은 트램이다. 러시아의 트램 운전기사들은 여성이 많았는데 예카테린부르크는 그 비중이 훨씬 높았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멋진 기사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건네며 중심가로 가는 트램에 올랐다. 트램 요금은 23루블(약 500원)로 이르쿠츠크(12루블), 크라스노야르스크(19루블), 노보시비르스크(20루블)보다 비쌌다. 서쪽으로 갈수록 대중교통 요금이 오르는 법칙이 여지없이 적용됐다.
중심가의 적당한 식당을 찾아 생맥주를 곁들인 저녁을 먹고 예카테린부르크 시내를 돌아보기 위한 준비를 끝냈다. 중심가의 광장에는 영어 학원도 안 보이는데 젊은이들이 넘쳐났다. 생기 넘치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큰 짐을 한 무더기씩 지고 있는 한국의 청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시내에서는 큰 축제가 있었는지 얼굴과 옷에 온통 색을 덧칠한 사람들이 떼로 몰려다녔다. 녹색의 슈렉 얼굴부터 온갖 색으로 몸을 치장한 사람들은 웃음에 중독된 듯 까르르거리며 거리를 활보했다. 카메라 렌즈를 대자 페스티벌 참가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손으로 브이(V) 자를 그리며 흔쾌히 모델이 돼주었다.
그중 대학생 또래 아가씨 4명이 어깨동무를 하고 힘차게 노래를 부르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노래는 한국에서도 대규모 관객을 동원한 영화 의 주제가인 (Do you hear the people sing)여서 귀에 익었다.
얼른 앞으로 달려가 동영상으로 담고 싶다며 방금 불렀던 노래를 다시 부르며 행진해줄 수 있느냐고 부탁했다. 소녀들은 처음엔 부끄럽다며 한발 빼더니 서로 눈빛을 한번 교환하고는 바로 심호흡을 한 뒤 힘차게 노래를 부르며 행진을 재연해주었다. 알록달록 물든 얼굴로 입가에 미소가 가득 담긴 발랄하고 유쾌한 모습이 손에 든 카메라의 앵글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노래가 끝나고 우리는 어울려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중에는 놀랍게도 한국어를 공부한 학생도 있었다. 소녀가 말하는 러시아어 억양의 “안녕하세요?”가 그렇게 정겨울 수 없었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러시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장소인 피의 성당이었다. 지도를 참고하고 길을 물어 찾아나섰다. 뚜벅이 모드가 힘들긴 하지만 걸으면서 느낄 수 있는 색다른 맛이 있다. 스탈린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웅장한 붉은색 벽돌로 치장한 시청사 건물이 길 건너 레닌 동상과 마주 보고 있는 레닌 거리가 예카테린부르크의 중심가다.
역사란 무엇인가이곳에서 이세티강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지나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15분쯤 걸으면 9개의 황금색 돔형 탑을 가진 정교회 성당을 만나게 된다. 2003년 지어진 건축물답게 세월의 흔적은 느낄 수 없다. 성당이 있던 자리는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와 그 일가가 최후를 맞이한 곳이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정권을 잡은 케렌스키 임시정부는 황제와 가족들을 예카테린부르크로 유배시켰다.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던 황제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의 통나무집에서 목수 일을 배우며 평범한 삶을 살게 되었다. 옛 황제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적백내전이었다. 볼셰비키에 반대해 반혁명을 일으킨 세력들의 목표는 황제의 복권을 통한 제정러시아로의 회귀였다.
니콜라이 2세의 충실한 신하를 자처한 반혁명 세력이 주변 국가들의 지원으로 힘을 얻게 되자 러시아혁명은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10월 혁명으로 케렌스키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로서는 반혁명 세력의 정신적 지주이자 상징적 인물이 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을 살려둘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반혁명군의 공세가 한창이던 1918년 7월16일, 백군이 황제를 구출하기 위해 예카테린부르크로 총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던 밤이었다. 적군 장교와 병사들은 자고 있던 니콜라이 2세를 깨웠다. 옛 황제와 그의 아들 알렉세이, 부인과 딸들을 비롯해 하인들까지 병사들에 의해 지하실로 끌려갔다. 황제 일행 11명은 지하실 벽에 세워진 채 적군 병사들이 겨눈 총을 마주해야 했다. 1613년 미하일 1세로 시작된 로마노프 왕조가 니콜라이 2세를 끝으로 304년간 이어졌던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나는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생전 모습이 담긴 대형 사진들이 걸려 있는 성당 앞의 계단을 내려오며 역사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비운에 쓰러져간 마지막 황제인가? 러시아 민중의 심판을 받은 폭군인가?
1891년 5월19일, 니콜라이 2세는 황태자 신분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열린 시베리아횡단철도 기공식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서 있었다. 바로 직전 일본 방문 때 자객 습격 사건으로 부상을 입어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동방의 출발역에 서 있었던 황태자의 앞길은 험난했다. 발톱을 숨긴 태풍이 순서대로 접근하고 있었다.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이어지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제군주는 더 이상 불을 밝힐 수 없는 소진된 촛불이었다.
피의 성당을 떠나 예카테린부르크를 관통하는 이세티 강가로 향했다. 강변은 러시아의 여러 도시가 그렇듯이 산책하기 좋게 꾸며져 있었다. 경차를 이용해 노점 카페를 꾸린 이에게 추천받아 에스프레소를 받아들었다. 살짝 노을이 지고 있는 강변은 그 자체로 로맨틱한 영화의 배경이 된 듯했다. 곳곳에서 어깨를 두르거나 허리를 감싼 커플들이 은빛 물결이 살랑이는 강물을 바라보거나 석양에 붉게 물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입을 맞췄다. 우리 일행은 키스하는 커플들을 보며 러시아가 최소한 한국보다는 나은 나라임이 틀림없는 증거라며 오랜만에 의견을 일치시켰다.
밤의 예카테린부르크강둑 한쪽에서는 붉은 민소매티에 청반바지를 입은 여성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다가도 쑥스러운 웃음을 참지 못하는 아마추어 티가 물씬 풍기는 여가수에게 사람들은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여가수는 동양에서 온 이방인과의 기념촬영도 기꺼이 응해주었다.
이세티 강변을 지나 숙소로 향하는 트램을 타러 가는 길에 우리 일행은 어느새 마주치는 이들과 넉넉한 눈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어둠이 깔리고 트램의 전조등이 하나둘 켜지면서 거리는 밤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풍경으로 변해갔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아름다운 도시 예카테린부르크다.
글·사진 박흥수 기관사·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 객원연구위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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