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횡단열차 안에서의 생활에 완전히 적응했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주어진 조건에 몸을 맞추었다. 한여름 땀에 젖은 승객들이 제일 바라는 것은 편하게 씻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씻을 공간이라고는 화장실뿐이다. 화장실 점유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역에 정차하기 30분 전부터 차장은 화장실 문을 잠근다. 배설물 직하방식 구조의 화장실에서 정차역 화장실 개방은 생화학적 문제부터 여러 가지 곤란한 일들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해가 뜬 뒤에는, 나같이 눈곱만 떼어내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이와 달리 반드시 얼굴을 씻어야 하는 사람들이 화장실 앞에 줄을 선다. 줄이 긴 경우에는 객실 안까지 이어진다. 아침 식사 뒤에는 활발한 대장 운동의 결과를 증명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손으로 화장실 앞 차창을 짚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어금니를 물고 있는 사람도 볼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인류애가 발휘돼 말없이 순서를 바꿔주기도 한다. 저녁에도 수건과 칫솔을 든 사람들이 화장실 밖에서 차례를 기다린다.
화장실 사용할 때 발휘되는 인류애화장실은 객실 양쪽 끝에 있다. 운이 좋으면 갈 때마다 늘 비어 있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다. 화장실 안에는 웬만해서는 맨살의 엉덩이를 밀착시키고 싶지 않은 좌변기가 있고 그 앞이 세면대다. 세면대의 수도꼭지에는 스프링식 수직 쇠막대가 달려 있다. 이 막대를 위로 올리고 있는 동안만 물이 나온다. 손으로 물을 받아 얼굴로 가져가면 물이 끊긴다. 세면대 구멍을 막으려고 골프공을 준비하기도 하는데 별 효과는 없다. 그나마 유용한 방식은 2ℓ 정도의 빈 페트병에 물을 받아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사람들은 삶을 대하는 태도와 성격에 따라 자기만의 방식으로 씻었다. 불가사의하지만 매일 밤 목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식후 양치질 외에는 간단한 고양이 세수로 버텼다. 땀이 마르고 다시 흐르는 걸 반복하면서 온몸을 겹겹이 코팅했다. 그래도 며칠째 교환되지 않는 속옷에 비하면 견딜 만했다.
북한 노동자들, 게임하느라 잠 못 이루고…
열차 안의 남북관계는 해빙 상태를 넘어 펄펄 끓더니 그나마 졸아서 끈적끈적하게 변했다. 조심스럽게 응하던 사진 촬영도 거리낌이 없었다. 서울에서 개성이나 평양이라고 해봤자 러시아나 중국의 철도 여행 개념으로 보면 코앞에 있는 마을이다. 북한 노동자들은 기껏해야 200km 남짓한 거리에 떨어져 사는 이웃이었다. 휴전선만 뚫린다면 서울 사람이 전주나 대구에 가듯 놀러가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북쪽 노동자들은 우리가 가져간 디지털 기기에도 관심을 보였다. 스마트폰은 물론, 디지털카메라의 사양이나 성능을 물어보기도 했다. 남쪽 일행 중 한 명이 가져온 아이패드 때문에 북쪽 친구 몇은 잠을 설쳤다. 사악한 남쪽 친구는 북쪽 친구에게 도낏자루 썩는 줄도 모르게 한다는 중독성 강한 게임을 알려줬다. 밀려오는 외계 비행체를 우주 전투기로 맞서는 게임이었다. 유일하게 평양이 아닌 해주에서 왔다는 친구가 탁월한 게임 감각을 보여줬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스테이지를 하나씩 돌파하더니 신기록을 경신해나갔다. 태블릿PC 게임을 신기해하는 동료가 바로 옆에 달라붙어 코치를 했다. “야, 기거이 보너스 먹을 욕심 내지 말라우! 그거 먹으러 가다가 내께 터지잖아!” 이 둘은 모두가 잠든 밤에도 아이패드를 들고 몸을 이리저리 기울이며 지구를 구했다.
열차 출발 뒤 셋째 날 새벽 1시께 치타에 도착했다. 치타는 베이징~선양~하얼빈~만저우리를 잇는 중국의 동북지방을 관통하는 열차와 합류하는 곳이다. 치타에서 하얼빈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어지는 철도 노선은 한때 동청철도라고 불렸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운행 거리를 단축하기 위해 만주 통과 노선을 청나라로부터 얻어냈다. 청일전쟁의 뒤처리에 개입한 러시아가 일본에 압력을 가해 청나라의 배상 부담을 줄여준 대가였다. 중국에서는 청을 위해 노력한 러시아에 우호적인 여론이 일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동청철도의 권리가 양도된 것을 알자 분노했다. 국제관계에서 선의란 자국의 이익을 감싸고 있는 포장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치타는 동청철도의 시점이 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이자 동청철도의 종점이 되었다. 그 중심에 있는 하얼빈은 러시아가 장악한 만주의 요충지였다. 러시아 철도 건설 노동자들과 군인, 관리들이 들어오자 하얼빈은 유럽풍의 신도시로 탈바꿈했다.
안중근이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출발한 곳은 블라디보스토크역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로 2시간쯤 달리면 우수리스크역이 나온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하바롭스크이고 서쪽으로 달리면 중국 국경을 넘어 하얼빈에 이르게 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등칸을 끊어 왔던 안중근은 이토 암살을 결의한 동지 우덕순과 우수리스크역에 내렸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가진 돈이 별로 없음에도 하얼빈행 2등칸 차표를 끊는다. 2등칸은 검문검색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중근이 하얼빈으로 가면서 가장 크게 고민했던 것은 러시아 말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중국령이었지만 러시아가 장악한 하얼빈의 당시 현실을 보여준다.
이광수가 미국행에 성공했다면 어땠을까?10월21일, 안중근 일행을 태운 열차는 중국 국경을 넘어 쑤이펀허에서 1시간가량 정차했다. 이때 안중근이 역 밖으로 나가 데려온 사람은 18살 소년 유동하였다. 유동하는 안중근과 아는 사이였던 한의사 유경집의 아들이다. 소년은 답답한 약방을 떠나 안중근을 따라나섰다. 유동하는 안중근 일행의 통역과 하얼빈 안내는 물론 가는 김에 한약재를 사오라는 부친의 심부름까지 여러 가지 임무를 부여받았다. 유동하는 자신이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뤼순 법원 피고인석에 안중근과 나란히 앉은 유동하의 앳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새벽 시간임에도 적지 않은 승객이 열차에 타고 내렸다. 나는 36분의 정차 시간을 확인한 뒤 홀로 역 광장으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 치타역이라고 쓰인 전광판이 붉게 빛났다. 광장 앞 도로에서는 택시 기사 몇 명이 호객을 하다가 승객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자 차를 몰고 떠나버렸다. 역 건너편 시가지는 택시가 사라진 도로를 삼킨 채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1914년 2월, 23살의 이광수는 치타에 도착했다. 이광수의 목적지는 미국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의 주필로 가기 위해 시베리아를 횡단한 뒤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는 배를 타야 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보내주기로 한 여비는 계속 지체되었다. 뾰족한 수 없이 기다리다 7월에 유럽을 불바다로 만든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이광수는 미국행을 포기한다.
이광수는 치타에서 시베리아와 북만주 일대의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한인 결사체인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편집을 돕고 있었다. 6월에는 치타에서 시베리아국민회 대의회가 개최된다. 이 회의에서 이광수는 의 주필로 임명되었다. 조선과 일본, 만주와 하얼빈, 이르쿠츠크의 바이칼호를 배경으로 하는 춘원의 멜로 소설 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다. 춘원 이광수는 샌프란시스코행을 고대하며 종종 치타역을 찾았을 것이다. 만약 이때 이광수의 미국행이 성공해 샌프란시스코에 자리를 잡았다면 어땠을까? 천황을 위해 몸 바쳐 싸우자며 부역했던 매국의 길과는 다른 행로를 갔을까?
아침이 밝고 몇 번의 정차역을 거친 뒤 우리 객실 안에 새로운 승객이 합류한 사실을 알게 됐다. 북한 여행자들이 여성 승객 한 명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말투가 비슷해 중간에 합류한 북쪽 일행인 줄 알았으나 옌볜에 사는 조선족 동포였다. 열차 안에서 한민족 대회라도 열어야 할 판이 되었다. 조선족 동포는 1962년생이라고 했다. 54살, 중국의 현대사를 돌파해온 조선인 디아스포라였다.
“남조선 분이지요? 딱 보면 알겠네요.”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공간을 좁혀 내가 앉을 자리를 마련하는 동안 그녀는 명랑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지난밤 치타에서 열차를 탔다는 그녀는 종착역인 노보쿠즈네츠크까지 간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다. “복장 장사를 합니다.” 여자는 철의 실크로드를 따라 극동에서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종횡무진 누비며 옷 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순박함 속에도 야무진 당당함을 풍기는 그녀는 사내들에 둘러싸여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그녀는 동대문도 알고 있었다. 남한에서 장사할 생각도 했지만 요즘 남한도 경기 불황이라 옌볜 동포들이 수지를 못 맞추는 걸 보고 생각을 바꿨다고 했다.
남과 북에 옌볜 출신이 참가한 대토론회는 우연한 계기로 열렸다.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하다가 남자와 여자의 역할론에 이르러 서로가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여기서 의견이 부딪쳐 불길이 일었다. 이런 대화에선 흔히 그렇듯이 수시로 전혀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나는 어느 한 사람이 언성을 높이면 적절히 제지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철의 실크로드 따라 장사하는 여전사‘남자가 여자를 받들어야 하는가?’ 로 시작된 배틀은 국가냐 개인이냐의 문제로 이어졌는데 심오하면서도 철학적인 주제였다. “나도 그전에는 북조선하고 생각이 똑같았어요, 그런데 살다보니 그게 아냐. 내 쾌락이 중요하지, 내가 먼저 행복해야 되는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요.” “아이고 어머니, 내 말씀 좀 들어보시라요. 조국이 있어야 내가 있는 거야요.” 나는 권투 심판처럼 얼굴이 붉어져 목소리를 높이는 북쪽 패널을 진정시키고 토론 예절을 주지시킨 뒤 다시 파이팅을 외쳤다. 새로운 패널이 말을 이었다.
“이봐요, 아주마이! 내가 조국을 위해서 일을 많이 하면, 그래서 조국이 잘살면 그 속에 내 행복도 있다, 그거만 알면 됩니다.” “물론 조국이 부흥하면 좋지요. 그런데 내가 행복하고 살기 편해야 조국도 잘되는 거야요.” 옌볜 패널은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게 아니지요. 조국은 어버이와 같아요.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같지요. 우리가 식민지 고통을 얼마나 받았습네까? 조국의 품이 없으면 나는 없는 거야요. 어버이 조국, 어버이 장군님의 품이 진짜 행복한 거예요.” “나도 어린 시절 모택동이가 전부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모택동이 죽고 나니까 뭐 아무것도 아니두만.” “아니, 이 아주마니 어따 대고 우리 장군님하고 모택동이를 비교해?”
사회자 권한으로 잠시 냉각 시간을 가졌다. 그 덕분인지 분위기는 한결 누그러졌다. 토론의 마지막 결론은 과거에는 배 나온 게 부자의 표시였지만 지금은 고혈압·관절염 등의 원인이 되는 비만병이라는 것으로 종결됐다. 한참을 떠들던 패널들과 구경꾼들은 자신들의 뱃가죽 두께를 손으로 측정하며 해산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출발 4일째 오전 10시, 열차는 부랴트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역에 도착했다. 소련 시절에는 부랴트-몽골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의 수도였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연결되는 몽골종단철도(TMGR)의 종점이다. 만주의 독립투쟁사와 근대 철도의 흔적이 담긴 만철노선과 동청철도 노선에 흥미를 갖고 있다면 하얼빈을 통과해 치타에 닿는 만주횡단철도를, 몽골의 대평원과 사막을 느끼고 싶으면 몽골종단철도를 이용하면 된다. 두 노선 모두 베이징에서 출발한다. 역에 마중 나온 이들의 얼굴이 한국 사람을 보는 듯 낯이 익었다. 이웃 같은 생김새의 몽골계 사람들이 말하는 러시아어는 묘했다. 한국 사람의 말을 외국어 더빙으로 듣는 기분이었다.
나는 카메라만 챙겨 역사를 빠져나왔다. 시베리아 횡단 초기의 증기기관차가 역 근처 거리에 전시돼 있다는 정보를 미리 챙긴 터였다. 역 광장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가볍게 뛰었다. 곧 가로수가 늘어진 2차선 도로 건너편에 기관차가 보였다. 증기기관차와 전기기관차가 한 대씩 서 있었다.
증기기관차에는 러시아에서 조국 수호 전쟁이라 부르는 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 기념 장식이 설치돼 있었다. 소비에트연방 시절 횡단철도를 달렸던 2182호 텐더형 증기기관차는 무심코 지나는 행인들 사이로 먼 곳에서 찾아온 순례자를 맞이했다. ‘울란’은 ‘붉다’는 뜻으로 피를 의미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정신은 대륙 동쪽의 한을 품은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혁명을 파괴하기 위해 나선 백군과 이들을 지원한 일본군에 맞서 많은 몽골인들이 5년이나 지속된 빨치산 투쟁에 가담했다. 이 중에는 조선인 무장부대도 있었다. 이들이 흘린 피가 우데강을 붉게 물들였다. 혁명을 지켜낸 도시 베르흐네우딘스크는 이때부터 울란우데라고 바꿔 부르게 되었다.
조선인 무장부대 피로 물들었을 울란우데강긴 기적과 함께 열차가 서서히 움직이며 ‘붉은우데’역을 떠났다. 여정의 첫 번째 하차 도시 이르쿠츠크에 가는 데 9시간도 안 남았다. 승객들은 가석방을 앞둔 죄수라도 되는 양 얼굴에 여유를 되찾았다. 우리가 마녀라고 부르는 규율을 엄격히 강요했던 간수, 아니 차장도 열차가 서쪽으로 갈수록 너그러워졌다. 객차 연결 통로는 이미 공식 흡연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저녁 식사는 제대로 된 식당에서 먹을 수 있겠다는 희망 속에 가벼운 마음으로 이르쿠츠크 지도를 펼칠 때였다. “저… 이런 말씀 드리기는 미안합네다만….” 북쪽 친구가 어두운 얼굴로 찾아와 말을 걸었다.
글·사진 박흥수 기관사·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 객원연구위원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미국 최고 의사’ 84살 김의신 “암에 좋은 음식 따로 없어, 그 대신…”
“명태균에 아들 채용 청탁…대통령실 6급 근무” 주장 나와
“대통령 술친구 이긴 ‘김건희 파우치’…낙하산 사장 선임은 무효”
관저 유령건물 1년8개월 ‘감사 패싱’…“대통령실 감사방해죄 가능성”
법원, KBS 박장범 임명 효력정지 가처분신청 기각
김정숙 여사, 검찰 소환 불응하기로…“무리한 정치탄압”
다 ‘내가 했다’는 명태균, 이번엔 “창원지검장 나 때문에 왔는데…”
탄두가 ‘주렁주렁’…푸틴이 쏜 ‘개암나무’ 신형 미사일 위력은
‘야스쿠니 참배’ 인사 온다는 사도광산 추도식…‘굴욕 외교’ 상징될 판
“영화계 집안사람으로서…” 곽경택 감독 동생 곽규택 의원이 나선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