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서 나오기 싫었다. 오후쯤 일어나 슬리퍼를 끌고 동네나 어슬렁거리다 다시 돌아와 차가운 맥주나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어느새 숙소를 뒤로하고 있었다. 전날의 엄청난 헤맴과 달리 역으로 가는 길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숙소에서 5분쯤 걸어나오자 만난 내리막길 끝에 이르쿠츠크시를 가로지르는 안가라강과 역이 보이자 허탈했다.
걸음을 서둘러 강을 건너는 다리 앞에 섰다. 이르쿠츠크역은 시 외곽에 있다. 시내로 들어가려면 역 바로 옆에 놓인 글라즈코브스키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르쿠츠크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예전의 것을 허물고 1932년 새로 지어 1936년에 완공했다. 역에서 시내로 가는 1번 트램을 타도 됐지만 다리만큼은 걸어서 건너기로 마음먹었다.
다리 초입에 올라서니 이르쿠츠크역이 보였다. 이르쿠츠크역은 내가 일하는 수색지구와 많이 닮아 있었다. 역과 더불어 객차와 화차를 정비하는 사업소도 있다. 다리 밑에는 기관차만 잔뜩 모여 있는 걸로 보아 기관사와 정비노동자가 근무하는 기관차 사업소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극동으로 가는 출입구 역할을 하는 이르쿠츠크역이니 그 중요성에 맞춰 큰 규모로 조성된 것이다.
“이 다리를 ‘남만춘 다리’라고 부르자”나는 다리를 건너며 일행에게 앞으로 이 다리를 ‘남만춘 다리’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한 친구가 그 이유를 물었다. 1917년 세계를 뒤흔든 러시아혁명은 곧바로 큰 벽에 부딪혔다. 혁명을 분쇄하고 옛 체제를 복원하자고 나선 귀족과 군부가 군대를 일으켰다. 백군이었다. 혁명을 두려워한 이웃 국가의 지배자들은 연합군을 만들어 백군을 지원했다. 볼셰비키가 이끄는 적군과 국제 연합군의 지원을 받는 백군은 운명을 건 싸움에 돌입했다. 혁명의 진원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멀어질수록 백군의 기세는 드셌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노선은 거의 백군의 차지였다.
1917년 12월, 이르쿠츠크역에는 중무장한 백군 병사가 주둔하고 있었다. 현재의 남만춘 다리는 큰 배를 통과시키기 위해 중앙 부분이 높은 아치 형태를 가졌지만 당시의 다리는 강물 바로 위에 설치돼 배가 통과할 때면 중앙이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이 다리 건너편, 이르쿠츠크 중심으로 항하는 도로 입구는 적군 부대가 수비를 맡았다. 어느 날 백군은 총공세를 펼치며 다리를 건넜다. 수세에 몰린 붉은 군대는 다리를 포기하고 후퇴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러시아 사관학교 출신 536연대 소속 중대장 남만춘이 적군 연대장을 설득해 특공대 25명을 조직해 수비에 나섰다. 25명은 모두 고려인이었다.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군대의 지원을 받는 백군을 물리치고 혁명을 사수하는 것이 조선 해방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 전사들이었다. 전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계속됐고 다리 사수를 맡았던 25명은 모두 전사했다. 남만춘만이 부상을 입은 채 살아남았다.
25명은 10대 후반에서 20대의 젊은이들이었을 것이다. 일찍 러시아로 이주한 세대의 자식이었을 수도 있고 일본 유학 중이거나 조선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무장부대를 찾아나선 이도 있었을 것이다. 조선의 미래를 짊어졌을 창창한 청춘들이 안가라강을 타고 노을 속에 사라졌다. 남만춘 다리를 건넌 뒤 1번 트램 노선을 따라 계속 걸었다.
조선말 흘러넘쳤을 5군단 거리이 길은 ‘5군단 거리’로 불린다. 웬만해선 거리에 군대식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만큼 이르쿠츠크에서 5군단이라는 이름이 갖는 상징성은 크다. 혁명을 수호한 부대 5군단, 이 중에는 특별한 부대가 있었다. 조선인으로 구성된 특립고려여단으로 여단장은 칼란다라슈발리에 이어 오하묵이 맡았다. 여단의 군정위원장은 박승만이었다. 자유시 참변 이후 여러 경로로 떠돌던 한인 무장대원과 이르쿠츠크의 고려인들이 부대원이 되었다. 20개 중대에 2천 명이 넘었다. 5군단 대로 주변은 독립투쟁 시절 조선말이 넘쳐나는 거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무심히 흘렀고 한적한 거리는 평일 오전의 나른함만을 품고 있었다. 수천 명의 한인 투사가 살았던 마을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5군단 거리가 끝나는 지점에는 레닌 광장이 있다. 볼셰비키 혁명을 이끌었던 레닌이 손을 들고 있다. 동상 앞을 무심히 지나는 현지인과 달리 여행자들은 레닌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동상 건너편 레닌 광장을 낀 사거리에는 유서 깊은 건물이 있다. 이르쿠츠크 레닌 거리 23번지의 주소를 갖고 있는, 오페라와 연극을 상연하는 극장이다.
1921년에 이 건물은 인민회관이었다. 5월4일, 인민회관 대강당에서 고려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조선 해방 투쟁과 노동자·농민을 위한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다짐이 울려퍼졌던 곳이다. 한편으로는 이르쿠츠크파로 불리는 공산주의 세력이 공식화되는 출발점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대회의 상당 시간이 상해파로 대변되는 한인사회당을 비난하는 것으로 채워졌다는 사실이다. 상해파는 이르쿠츠크파에 이어 5월20일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서 고려공산당을 창당했다. 조선을 대표하겠다고 나선 두 개의 공산당은 국제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으로부터 승인을 받기 위해 서로 치고받았다.
이 두 조직이 싸운 배경에는 디아스포라로서 조선인들의 운명이 들어 있었다. 러시아에 일찍부터 삶을 뿌리박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 극동과 중국의 독립투사들 간의 대립, 또 이들과 볼셰비키화한 한인들의 미묘한 갈등, 러시아 사회주의 건설과 조선 독립 중 어떤 것을 우위에 놓아야 하는가의 문제, 모스크바로부터 받은 활동자금을 둘러싼 다툼들이 뒤섞였다.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이 속한 당파를 대변하며 화합하지 못했다.
옛 인민회관 앞에서 택시를 타고 레닌 거리를 거슬러 올라갔다. 오전에 현지 여행사에 바이칼 순환열차 탑승권을 찾기 위해 들렀다 러시아 음식을 맛있게 하는 집을 알아놨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케이크와 커피로 대충 때운 아침 식사 때문에 배가 출출했다. 택시에서 내려 잠시 헤맨 끝에 여행사 직원 아나스타샤가 알려준 가게를 찾았다.
‘트로츠키’라는 이름을 낳은 횡단열차1900년대 초반의 이르쿠츠크는 영화 의 배경이 된 타투인 행성 같은 곳이었다. 행성의 지배자 자바의 용병들, 여기저기서 들어온 은하계의 밀입국자들, 다스베이더의 제국군, 제다이의 기사, 광속 화물선으로 한몫 챙기려는 한솔로 같은 중개업자들이 섞여 있어 일촉즉발의 묘한 분위기가 감돈다. 1910년대 이르쿠츠크의 한 술집에 문을 열고 들어선다면 일제히 집중되는 눈초리에 기죽지 말아야 한다. 타타르인, 부랴트인, 러시아인,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 유럽인, 미국인들이 테이블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조선인이나 중국인일지라도 무장항쟁에 나선 독립투사일 수도 있고 일본군의 밀정일 수도 있으며 아편을 밀매하는 마적단이 보낸 암거래상일 수도 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들이 뒤섞여 있는 담배 연기 자욱한 공간에서 재빨리 적과 우리 편을 구별해내야 한다.
나는 서부영화의 총잡이처럼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음식점의 여닫이문을 열었다. 혹시라도 누군가 달려들면 허리춤의 콜트 45구경 6발 장전 리볼버 권총을 뽑아야 했다. 하지만 총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식당 안은 점심 식사를 하러 온 현지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산뜻한 주황색 모자와 앞치마를 두른 점원이 바쁘게 움직였다. 손님이 길게 늘어선 유리 덮개 아래에 있는 음식들을 지적하면 직원이 쟁반에 담아준다. 차례대로 이동한 뒤 계산대에서 값을 지불했다. 맥도널드 매장 같은 플라스틱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유리창으로는 바깥의 거리 풍경이 보였다. 2015년이어서 다행히 누구와도 시비가 붙지 않고 러시아식 만두와 닭고기, 양배추 절임, 샐러드로 배를 채웠다.
이르쿠츠크는 제정러시아 시절 죄인을 보내는 시베리아의 황량한 유배지였다. 1902년 8월, 바이칼호를 끼고 있는 유배지 베르홀렌스크를 탈출한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슈타인은 건초더미 수레에 몸을 숨겨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모스크바행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르기 위해서는 신분증이 필요했다. 동지들이 내민 가방에는 새 옷과 위조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새 신분증에는 이름을 써넣어야 했다. 브론슈타인은 잠깐의 고민 끝에 자신이 오데사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의 담당 간수 이름을 생각해냈다. 트로츠키라고 서명이 된 신분증으로 열차에 오른 탈주자는 1917년 10월혁명 이후 적백내전을 진두지휘하는 무장 장갑열차의 총지휘관이 된다.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린다. 그렇다고 해서 이르쿠츠크가 프랑스식 건축양식을 본뜬 파리의 미니어처 같은 모습은 아니다. 이르쿠츠크가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리는 이유는 특별한 유배자들 때문이다. 제1차 조국전쟁이라고 부르는 나폴레옹과의 전투에 나선 러시아군은 파리까지 진군해 들어갔다. 이 중에는 러시아의 귀족자제인 청년장교들도 있었다. 이들은 파리에서 자유·평등·연대의 불순한 공기에 취했다. 러시아로 돌아온 청년장교들은 자신들의 영지를 중심으로 비밀모임을 만들었다. 비참한 지경에 이른 레미제라블이었던 농노를 해방하지 않으면 이들이 결국 귀족을 몰아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회를 뒤흔들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전제군주를 타도해야 했다.
‘데카브리스트’가 꽃피운 시베리아의 파리1825년 12월14일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을 디데이 삼아 쿠데타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시나리오마다 꼭 등장하는 밀고자에 의해 거사 계획은 발각되었고 주모자들은 체포된다. 불온한 꿈을 꿨던 이들을 12월 봉기 시도에서 이름을 따 ‘데카브리스트’(12월당)라고 불렀다. 처형을 면한 청년장교들은 이르쿠츠크로 유배당했다. 이들의 아내들이 귀족 신분을 버리고 뒤를 쫓았다. 데카브리스트들은 시베리아의 황량한 유배지 이르쿠츠크를 문화와 예술과 교육이 어우러지는 도시로 바꿨다. 시베리아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도시가 된 이르쿠츠크는 파리의 혁명정신이 만든 도시였다.
점심 식사 뒤 지도를 들고 뙤약볕의 거리를 걸었다. 데카브리스트 중 한 명인 세르게이 볼콘스키가 살던 집의 문을 열었다. 2층의 목조 저택은 방마다 옛 러시아 귀족의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톨스토이의 는 러시아와 프랑스의 전쟁, 즉 데카브리스트의 참전 경험을 토대로 쓰였다. 세르게이 볼콘스키는 이 소설의 주인공 안드레이 볼콘스키의 모델이었다.
볼콘스키 저택에서 조금 걸어가면 이르쿠츠크 중앙시장이 나온다. 시장에서 우리는 퍼져버렸다. 음료수를 한 병씩 사서 좌판이 보이는 시장 거리의 벤치 위에 널브러졌다. 상인과 손님이 어우러진 모습은 여기가 남대문시장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기력을 충전했지만 우리의 체력 게이지는 붉은색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다시 택시를 찾아 200루블(약 4천원)에 흥정을 마치고 시의 북쪽 안가라 강변에 있는 ‘영원의 불꽃’으로 향했다.
영원의 불꽃은 2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24시간 꺼지지 않고 가스버너가 불꽃을 피워올린다. 러시아의 웬만한 도시마다 조성된 광장이나 공원에는 이 불꽃이 타오른다. 그중에서도 이르쿠츠크의 영원의 불꽃은 300년 역사를 가진 스파스카야 교회 앞 공원에 위치한다. 신에 대한 믿음에 애국심을 섞어 경건한 맹세를 할 수 있는 장소다. 이 때문에 결혼을 앞둔 남녀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기 위해 찾는다. 카메라를 든 친구를 대동하고 한 커플이 열심히 웨딩 사진을 찍었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젊음과 사랑은 한순간에 지나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방법은 끊임없이 사랑하는 것이리라. 영원의 불꽃 가스 값이 얼마나 들까 궁금해하며 광장을 걸어나왔다.
광장 양옆에는 신문사 앞의 신문 가판대 같은 게시판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거기에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의 흑백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중에는 동양인의 풍모를 가진 이도 적지 않았다. 혹시나 그들의 러시아 이름 중에 김이나 박 같은 조선인의 성이 있는지 찾아봤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중 몇몇의 눈동자는 삶의 출발지가 한반도였을지 모르겠다는 심증을 갖게 했다.
이르쿠츠크와 한반도의 끈질긴 인연이날의 마지막 목적지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이르쿠츠크 센트럴파크, 혁명전사상이 있는 곳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스마트폰에 번역된 러시아어와 지도를 보여주며 길을 물어 겨우 버스번호를 알았다. 지면의 뜨거운 열기를 받고 있는 발바닥에서는 불이 나고 있었다. 시원한 바닷물이 있다면 당장에라도 뛰어들었을 것이다. 이때 해운대행 버스가 정류장에 나타났다. 러시아 곳곳에서는 한국에서 수입한 중고버스들이 한글 행선지를 붙인 채 달리고 있다. 이르쿠츠크에서 해운대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키릴문자와 한글이 뒤섞인 버스를 보고 이르쿠츠크와 한반도의 길고도 끈질긴 인연을 실감했다. 우리가 탄 버스는 작은 승합버스였다. 이르쿠츠크의 대중교통은 12루블, 300원도 안 되는 가격이다. 빵, 전기료와 함께 러시아의 3대 저가 품목이다.
이르쿠츠크의 센트럴파크는 머릿속의 상상과 달랐다. 뉴욕 센트럴파크나 서울숲과 같은 모습을 생각했는데 관리되지 않은 숲이 우거진 동산이었다. 지도를 들고 숲길을 헤맨 끝에 혁명전사상을 찾았다. 혁명전사상은 이르쿠츠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 있었다. 혁명을 우러르던 시절 상징적인 장소를 찾아 상을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은 내장을 발라내고 박제된 지 오래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돌상은 곳곳에 균열을 드러낸 채 삭아가고 있었다. 보수공사를 시작했다가 손을 놓았는지 낡은 목재 보강 틀이 혁명전사를 겨우 부축하고 있었다. 인간 해방을 믿고 총을 들었던 전사들은 그렇게 화석이 되어가고 있었다.
글·사진 박흥수 기관사·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 객원연구위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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