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이 울렸다. 다행히 휴대전화가 손에 닿지 않는 거리에 있어서 던져버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침 6시30분, 다시 누워도 최소한 12시간은 꼼짝 않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일어나야 했다. 술을 줄이고 조금 일찍 잘 것을, 수십 년째 아침마다 하는 후회를 했다. 호스텔의 미녀 관리인에게 더 늦기 전에 다시 보자는 인사를 한 뒤 이르쿠츠크역으로 향했다.
이날의 일정은 이르쿠츠크역에서 아침 8시에 출발하는 환바이칼 열차를 타고 바이칼호수를 도는 것이다. 환바이칼 열차는 바이칼호수를 끼고 달리는 관광열차로 수요일과 토요일에 이르쿠츠크역에서 출발한다. 바이칼을 돌아 다시 이르쿠츠크에 도착하는 시간은 밤 10시다. 이때부터 역에서 시간을 보내다 새벽 1시2분에 서쪽으로 향하는 횡단열차를 타야 한다. 이르쿠츠크를 찾는 여행자들이 반드시 찾는 곳은 바이칼이다. 그중에서도 바이칼호 안에 있는 알혼섬은 필수 코스다.
일주일에 두 번만 출발하는 환바이칼 열차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알혼섬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여행의 목적이 시베리아철도 답사에 있었기 때문이다. 관광 노선으로 운행되는 바이칼 순환열차는 초기의 시베리아횡단철도 노선을 달린다. 철도에 3분의 2쯤 미친 나 같은 사람에겐 시베리아횡단철도의 근원적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선로를 찾는 것은 숭고한 과업이라 할 수 있다. 역경을 무릅쓰고 메카를 찾아 순례에 나서는 무슬림의 심정과 하나도 다를 바 없으리라.
이르쿠츠크역 짐보관소에 개당 160루블(약 3500원)을 주고 배낭을 맡긴 뒤 지하 통로를 지나 승강장으로 갔다. 곧 붉은색 전철이 들어왔다. 표를 보여준 차장에게 안내받은 칸은 1등칸이었다. 항공권과 횡단열차의 구간별 열차표는 모두 한국에서 예매했지만 환바이칼 열차만큼은 현지 여행사에 구매대행을 했다. 한국에서 구입할 방법이 없었고 여름 성수기라 혹여 표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끊은 표 중에서 모스크바발 베를린행 국제열차를 제외하고는 가장 비싼 열차 가격으로 1인당 83달러라는 거금을 들였다. 여행사가 예매한 표는 1등칸이었다.
현장에서 확인한 바로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기는 했지만 좌석이 매진될 정도는 아니었다. 3등칸은 거의 비어 있었고 딱딱한 의자였지만 바이칼을 즐기기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아침 8시, 열차는 정시에 출발했다. 곧이어 핸드 마이크를 든 중년의 여성 가이드가 들어오더니 인사말을 시작으로 러시아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장내에 작은 웃음이 돌았다. 어이없는 웃음이었다. 객차 안의 손님 대부분은 유럽과 미국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우리 일행 셋은 동양인이다. 알아듣는 이가 거의 없는데도 당차게 설명하는 가이드에게 모두 박수를 쳤다. 중량감 있는 풍채를 자랑하는 가이드는 유쾌한 웃음을 남긴 채 다음 칸으로 넘어갔다.
잠시 뒤 식사가 제공되는지 카트가 들어오더니 승객들에게 음식을 날랐다. 카트를 미는 승무원은 우리 자리에 와서 자신이 든 인쇄물과 좌석번호를 대조하고는 그냥 지나쳤다. 우리 일행이 끊은 표는 비록 1등칸이었지만 식사 옵션을 포함하지 않은 것이었다. 작은 컵라면 하나를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나온 터라 음식 냄새가 돌자 입에 침이 고였다. 불쌍한 표정으로 옆 좌석 사람들을 쳐다보면 샐러드 접시라도 하나 주지 않을 까 기대했다. 하지만 모두 자린고비 같은 표정으로 단 하나의 양배추잎과 심지어 당근 조각도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여 희망을 접었다. 먹을 것을 많이 준비해 쉬지 않고 먹어야 한다는 환바이칼 열차 이용 팁을 무시한 덕에 비상용 미니 초코바로 겨우 혈당을 높였다.
디젤기관차만 달릴 수 있는 옛 철길이르쿠츠크는 산에 둘러싸인 도시다. 열차는 계속 산등성이를 타고 달린 끝에 바이칼 순환 노선이 시작되는 슬루지앙카역에 도착했다. 슬루지앙카에서 바이칼호를 끼고 달려 종착역인 포트바이칼까지 달린다. 슬루지앙카역에서는 구 선로로 들어서기 위해 디젤기관차를 연결했다. 구 선로에는 전기 공급을 위한 전차선이 설치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4400호대와 비슷한 형식의 소형 디젤기관차가 연결되고 제동기능시험이 이루어졌다. 이 시간 동안 승객들은 역사 주변을 둘러본다. 역 바로 앞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구경하거나 역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특이한 모양과 조명 때문에 밤이면 ‘드라큘라성’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슬루지앙카역은 아담한 단층의 석조 건물이다.
기관차가 힘차게 기적을 세 번 울렸다. 열차가 움직이자 판매원이 카트를 들고 등장했다. 바이칼에서 잡히는 연어과 물고기를 훈제한 ‘오물’이라는 특산품을 팔고 있었다. 오물을 시식해볼까 갈등하는 사이 판매원은 사라졌고 본격적으로 바이칼 철도의 기원을 따라 달리는 여정이 시작됐다.
1921년 11월 여운형은 이르쿠츠크를 향하고 있었다. 김규식 등 조선 독립운동에 나선 일행과 함께 이르쿠츠크에서 열리기로 한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여운형은 이르쿠츠크에서 다시 모스크바까지 갔다. 대회 개최 장소가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로 변경됐기 때문이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회의인 파리강화회의에 기대를 걸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천명한 민족자결 원칙은 조선 해방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려 했지만 서구 열강 어디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민족자결 원칙에 식민지 약소민족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때 제국주의 열강에 맞서 식민지 약소민족은 단결하자는 슬로건 아래 ‘원동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리게 된다.
11월 초 중국 베이징과 펑톈(봉천, 현재 선양)을 잇는 경봉선 열차를 타고 베이징을 떠난 여운형 일행은 만주로 가던 길을 급히 수정한다. 일본 경찰의 미행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처음 계획대로 하얼빈을 경유해 치타에서 시베리아횡단철도로 갈아타려 했다간 일본 경찰대에 검거될 게 뻔한 상황이었다. 이미 만주철도는 일본이 장악한 상태였다.
이때 일본 군경이 중국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잡기 위해 안달이 났던 이유가 있었다. 두 달 전인 1921년 9월12일 오전 10시, 경성의 조선총독부에서 폭탄이 터졌다.
일본 경찰 추적 피해 몽골로 향한 독립투사들식민지 최고 권력기관에 폭탄이 터져 건물 한쪽이 무너져내린 사건은 일본의 지배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웬만한 담력으로는 감히 실행할 수 없는 폭파 사건의 실행자는 김익상이었다. 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한 채 폭탄을 던지고 혼란한 틈을 타 유유히 사라진 김익상은 곧바로 경성역에서 열차를 타고 신의주로 가서 국경을 넘었다. 김익상이 베이징에서 만나 성과를 보고한 사람은 약산 김원봉이다.
김익상은 조선으로 잠입하기 전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두 개와 권총 두 자루를 받았다. 행동하는 혁명가 김원봉은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고 의 주인공 김산은 회고했다. 김원봉은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을 좋아했고 톨스토이를 모두 읽었다는 문학청년이었다. 김원봉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멜로 영화의 주인공을 독차지하고도 남았을 정도로 미남이다. 김원봉이 아나키스트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라도 짓는 모습을 주변의 또래 여성들이 봤다면 아마 신음을 내뱉으며 쓰러졌으리라.
독서광이자 폭탄 제조 기술자라는 어울리지 않는 취미를 가진 김원봉의 후원자는 상하이의 공산주의 지도자 이동휘였다. 상하이 고려 공산당 재무담당 중앙위원 김철수는 레닌으로부터 받은 독립운동 자금 가운데 1차로 가져온 40만원 중 가장 많은 돈을 김원봉에게 전달했다. 일본 경찰은 김익상과 김원봉, 그리고 이들을 후원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하는 여운형·김규식 일행은 모스크바에서 조선 독립을 지원해온 데 대한 고마운 마음을 안고 있었다. 조선의 혁명투사들은 무사히 대회에 참가해 더 구체적인 독립투쟁 방안을 모색하고자 단단한 각오를 하고 베이징을 떠나는 열차에 올랐을 것이다. 여운형 일행은 일본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열차에서 내려 육로를 이용해야 하는 몽골로 방향을 틀었다. 독립투사들은 밤이면 영하 30℃까지 떨어지는 고비사막에서 10여 일의 풍찬노숙을 거쳐 겨우 시베리아에 발을 들여놓았다.
환바이칼 열차는 느린 속도로 달렸다. 절벽을 끼고 이어진 선로 변의 나뭇잎들은 유월의 햇살을 받아 초록의 빛살을 한껏 반사했다. 호수가 보이는 창가에서 여행자들은 각기 다른 표정과 모습으로 바이칼을 보고 있었다. 깊은 우수에 젖은 사람,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계속 감탄하는 사람,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거나 동영상 촬영을 하는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있었다. 여운형과 김규식도 이 길을 달렸다. 그들은 바이칼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바이칼은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말이 없었다.
‘러시안 강철벨트의 황금버클’, 바이칼 순환 철도의 별칭이다. 이 이름에는 두 개의 의미가 있다. 워낙 난도가 높은 공사라서 엄청난 공사비가 투입됐다. 돈을 처발라 만든 노선이었다. 다른 하나는 시베리아횡단철도 노선 중 가장 찬란한 풍경을 보여주는 구간을 의미한다.
이르쿠츠크를 출발해 안가라강을 따라 부설된 철길은 바이칼호에 막혔다. 호수 건너편의 횡단철도와 연결하기 위해서는 호수의 남쪽 둘레를 따라 동서를 잇는 선로를 놔야 했다. 이 중에서도 서쪽 지형은 깎아지른 절벽과 산등성이로 이루어져 감히 선로를 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건설 당국은 1888년부터 1900년까지 몇 차례나 조사를 했지만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1901년 이탈리아·독일·미국 등 여러 나라의 기술자들이 초빙됐고 1902년 6월에야 건설업체들이 결정됐다.
수백 명 노동자들 죽음 딛고 깔린 철길공사가 시작되자 밤낮없이 선로 부설 작업이 이어졌다. 바위를 깨 노반을 놓고, 터널을 뚫고, 역을 만들고, 다리를 건설하는 작업이 곳곳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돈을 벌기 위해 험한 일터로 찾아온 노동자들이 목숨을 건 노동에 나섰다. 이 중의 상당수는 불법체류자로 불리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였다. 유배자와 죄수들도 공사에 동원됐다. 검색을 통해 확인한 자료 사진에는 상투를 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선인들도 공사에 참여했던 것이 분명하다. 1903년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그해에 200명이 공사 현장에서 죽었다. 공식 기록에 누락된 이주노동자들의 죽음까지 포함한다면 훨씬 더 많은 노동자들이 사고로 죽었을 것이라고 열차 안에서 산 가이드북은 설명하고 있다.
바이칼 순환열차는 바이칼호의 남쪽 둘레를 동서로 잇는 철길 중 신선 건설로 운행이 중단된 서쪽의 약 100km 구간을 운행한다. 시속 30km 정도의 느린 속도로 운행하다가 옛 역사나 다리, 터널이 나오면 열차가 정차한다. 관광객들은 열차에서 내려 110년 전에 놓여졌던 옛 구조물들을 구경하며 감탄했다. 여러 형태의 터널과 다리들은 1세기 전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간직한 채 절벽을 잇고 산등성이를 뚫어 철길을 연결했다.
오후 2시쯤 허기가 져서 의식을 잃어가고 있을 즈음 열차는 폴로비니라는 정거장에 도착했다. 산비탈을 달린 열차가 계곡에서 바이칼로 흐르는 폴로비나야강을 건너는 다리를 넘으면 간이역 같은 승강장이 나온다. 승강장에서는 베레모를 쓴 꼬마가 가열식 보온통을 가져다 러시아 차와 빵을 팔았다. 그 옆에는 기념품 천막 노점이 열렸다. 한 개에 2천원쯤 하는 바이칼석 목걸이와 레닌 배지, 사진엽서 등을 팔았다.
폴로비니는 동화 속 마을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계곡 사이로 이어진 강을 따라 그림 같은 집들이 모여 있고, 바이칼을 마주 보는 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다.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열차가 지나온 다리를 구경했다. 다리는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한강철교처럼 철골 트러스교인데 선로는 걷어져 있었다. 최초로 놓인 단선 노선이었던 길이다. 바로 옆 바이칼호 쪽에 가까운 다리는 순환열차가 넘어온 것으로 석조 교각 위에 콘크리트 기둥들이 부챗살 모양으로 다리 상판을 받치고 있었다. 복선을 놓을 때 신기술로 도입된 콘크리트 타설법이 적용된 탓이다. 두 다리의 구조물이 하나는 위로, 다른 하나는 아래로 구성돼 마치 데칼코마니의 설치미술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폴로비니역에서는 식사를 위해 1시간의 정차 시간을 보장했다. 우리 일행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마을로 들어갔다. 관광객들의 도착 시간에 맞춰 음식을 준비한 집에서 달콤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시골집 앞마당에 설치된 천막 밑에는 긴 나무 탁자와 의자들이 준비돼 있었다.
우리가 앉은 자리는 하필이면 중국인 단체관광객들 옆이었다. 굶주림에 몸의 힘이 다 빠져 있었지만 음식을 시키기 위해서는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 할머니가 다가왔다. 한국말로 말했다. “아, 그냥 여기 기본으로 나오는 백반 같은 거 주세요. 빵하고요.” 할머니는 옆 테이블의 중국 사람들을 가리켰는데 같은 일행이 아니냐고 묻는 눈치였다. 나는 고개를 흔들고 손가락 3개를 펴서 세 사람분의 음식을 달라고 했다. 할머니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중국말이 하나도 안 들릴 정도로 끝내주는 맛음식이 조금 더 늦게 나왔더라면 거대한 오케스트라처럼 울려퍼지는 중국 사람들의 대화 덕분에 중국어 방언이 터져나왔을지 모른다. 할머니가 러시아 전통 수프 보르스치와 빵, 잼과 마요네즈, 몇 가지 채소와 소스를 가져다주었다. 보르스치는 토마토가 녹아든 맛에 각종 채소가 익은 고기 육수였는데 중국말이 하나도 안 들릴 정도로 끝내주는 맛이었다. 보르스치 수프에 빵을 적셔 먹으니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게 보였다. 나는 국그릇에 얼굴을 파묻고 폴로비니 마을의 돼지가 되었다.
글·사진 박흥수 기관사·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 객원연구위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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